박무진 권한대행을 지킨다. 목표가 같은 두 사람이 가까워진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수정에게 영진은 얄밉지만 유능한, 아니, 유능해서 얄미운 건가. 아무튼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무진을 가장 잘 비호하는 충직한 상사였다. ‘좋은 사람’ 박무진의 정치적 돌파구를 찾아주는 사람.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험지로 나가는 대행님을 따라 함께 진창을 구르는 사람. 이기는 사람을 택할 거라면서 늘 좋은 사람 곁을 지키는 좋은… 사람.
수정 청와대 정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믿게 해줘서 고맙고, 차 실장님이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서 더, 더 고맙구요.
영진 내가 좋은 사람인데 정수정 비서관이 왜 고마워해요?
수정 …?
영진 아니, 칭찬도 아니고.. 평가도 아니면, 뭐 고백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지금? 여기서?
수정은 깨달았다. 영진의 좋음은 자신과 결이 다른 좋음이라는 걸.
이 직속상사는 너무 거침이 없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넓은 비서실장 집무실을 두고 굳이 사무실, 그것도 수정의 자리 근처에서 어슬렁댔고, 이따금 본 적 없는 천진한 얼굴로 수정을 보곤 했다.
아니, 정치판세는 그렇게 잘 읽으면서 왜 저렇게 단순하지? 안 어울리게.
자신도 모르게 수정의 마음이 열려갈 즈음, 일이 생겼다. 테러의 청와대 내부공모자를 찾는 과정에서 영진이 용의선상에 올랐고, 수정은 무진의 지시로 그의 과거 행적을 캤다. 끝내 영진은 혐의를 벗었지만, 수정은 영진의 뒷조사를 한 셈이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정수정 비서관은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잖아요. 성실하게. 그러니까 담임선생님한테 끌려와서 반성문 쓰는 얼굴로 나 볼 필요 없어요. 나 벌점 같은 거 줄 생각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수정 스스로가 면목이 없었다. 잠시나마 그를 의심하고 거리두려 했다. 방법의 차이일 뿐, 이루려는 방향은 늘 같은 사람이었는데…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인간적으로 실수를 했다는 죄책감이 이전의 호감을 뒤덮었다.
[정수정 비서관. 내가 생각을 좀 해봤어요. 우리 얘깁니다.]
그 뒷얘기는 뭐였을까. 듣지 못했지만 알 것도 같았다. 영진의 마음은 그대로라는 걸.
망설여졌다. 청와대에서 함께 일하는 한, 언제라도 또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 있다. 직제구조상 차 실장님은 내 상사고, 이성적으로 엮이는 건… 옳지 않다. 옳지 않은데… 자꾸 미련이 남았다. 그간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린 건지, 혼란한 정국을 함께 헤쳐나간 나간 전우애인지, 자꾸 의지하고 싶고 갈팡질팡한 이 마음.
영진 내 사무실에 혼자서 처치 곤란한 물품이 좀 있어가지구… 라면, 먹고 가실래요?
의뭉스런 제안에 못 이긴 척, 이끌려 갔다.
영진이 뜨거운 물 받은 컵라면 두 개를 탁자에 두며 맞은편 의자를 손짓한다. 그 자리에 앉는 수정.
탁자 한쪽에 보이는 리본 장식된 컵라면 상자. 방금 꺼낸 2개 말고 그대로다.
수정 하나도 안 먹었네요?
영진 예. 아까워서.
수정 라면이 뭐가 아까워요.
영진 정수정 씨가 준 거라. 아까워서.
순간 둘의 눈이 마주치고. 동시에 눈길을 피한다.
영진 라면에 리본까지 달아주니. 어디 아까워 먹겠습니까.
딴 데를 보며 주절대는 영진. 수정이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앙 다문다. 어색함과 묘한 긴장감 속에 한동안 정적.
수정 3분. 됐어요. (젓가락 건네는)
라면을 먹기 시작하는 두 사람. 영진, 흘긋 수정을 보고. 수정, 흘긋 영진을 보고. 조용히 먹기만 하는데. 신경은 온통 앞 사람에 쏠려있는.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들어오는 김남욱 대변인.
남욱 차 실장님, 보도자료... 어, 라면! 이봐, 이봐. 내가 어디서 라면 냄새가 난다 했어. 어제 술 좀 먹었더니 해장하고 싶어서 헛게 맡아지나 했는데. 여기 라면 맞네, 맞아.
해맑다. 불길하게.
수정 같이 드실래요?
남욱 아 그럼, (다가오는데)
영진의 눈빛이 심상찮다. 반면 무구한 수정의 표정. 다시 영진의 험악한 얼굴. 살기가 느껴지는.
남욱 (멈칫)아..하하… 아, 아니에요. 저는 그, 식당 가서 먹으려고요. 오늘 메뉴가 그.. 네. 그럼 맛있게,
순간, 또 들어오는 한 사람. 박수교 행정관이다.
수교 어? 라면! 역시! 제가 아까부터 라면 냄새가 난다 했거든요. 역시. 제가 개코라 음식 냄새는 기가 막히게 알아요.
남욱 (수교의 팔을 잡아채며) 나가. 나가. 나가라고.
수교 저기, 저, 많은데,
거의 떠밀려가는 수교. 남욱이 문을 쾅 닫고 나간다.
다시 정적. 어색해진 분위기 속 수정이 웃음을 터트린다. 의아해하다 이내 같이 웃는 영진. 마주 보고 웃는 둘.
그날 밤, 광화문의 한 호프집.
한 테이블에 수정과 영진, 앉아있다. 가운데 놓인 치킨 위로 건배하는 두 사람.
이야기하는 수정을 보는 영진의 얼굴이 한없이 부드럽고.
때로 진지하게, 때로 환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탁자 위에 늘어나는 빈 맥주잔. 주변 테이블 사람들은 계속 바뀌는데 두 사람은 변함없고.
달이 환한 밤하늘에서 두 산자락 밑의 청와대, 경복궁, 광화문 광장까지 이어지는 화면. 도시의 불빛 속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이어지는 광화문 대로에서 꺾으면 펼쳐지는 청계천 전경. 그 속으로 들어가는 영진과 수정.
얼마간 걷는 두 사람. 밤 산책하는 사람들 속에 사이가 점점 좁혀지고. 어두운 가운데 수풀이 무성한 지점에서 수정의 시야를 가리는 수풀을 거둬주는 영진. 무척 가까운 둘 사이.
바람이 휘이 불자 몸을 움츠리는 수정. 영진, 겉옷을 벗어 수정에게 주는데. 손사래치는 수정에게 자켓을 쥐어주고 앞서가는 영진. 간지러운 분위기에 괜히 어기적대고. 영진의 옷을 어깨에 걸치고 따라가는 수정.
두 사람, 눈 마주치고 웃는다.
함께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페이드 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