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어느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은 멀쩡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조차 뜨지 못해 어둠만이 존재했다. 어디에 문제가 생긴걸까 아니면 내가 죽기라도 한 걸까 수많은 생각이 스쳐가는 어느 순간에 눈이 떠졌다. 정확히는 내가 뜬 것이 아니었다. 이불을 걷던 손이 멈추었다. 이것 역시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나의 행동은 내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손을 유심히 바라보던 나의 몸은 그대로 일어나 내 방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며칠 전 왕궁에 입고 갔던 푸른 드레스부터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까지 바라보던 나의 몸은 그대로 뛰쳐나가 거울 앞에 섰다.



"은발에.. 분홍색 눈?"



입이 열리고 내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몸을 차지하고 움직이는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묻고 싶지만 나의 몸을 내가 조종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시중을 드는 이가 들어온다. 레이르아 아가씨. 식사가 거의 준비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면 세수할 물을 가져오라고 말하며 옷을 고르는 것이 일상이었다.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오늘은 누리지 못한다. 하인의 말에 눈을 깜박이는 나의 몸은 자신의 이름만을 혼잣말로 되뇌였다.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는 이유를 알지는 못하지만 나의 몸을 차지한 존재는 망했다라는 말만을 중얼거리며 방을 배회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멈춰서고 나서는 다시 거울 앞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다짐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가씨. 갑자기 왜 저한테 존댓말을 하시나요?"


"제가 어떻게 아가씨에게 말을 놓습니까..."



내 몸을 차지한 존재는 막무가내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정원을 관리했던 집사에게 당치도 않은 존대를 썼다. 어이가 없었다. 집사 르카가 오랫동안 가문을 위해 일했고 그에게는 아버지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공작가의 아가씨가 존대를 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녀들에게 활짝 웃으며 자신에게 말을 놓아도 된다는 걸 직접듣고 나서는 자신의 몸을 차지한 존재가 귀족의 예법조차 모르는 이라는 걸 느꼈다. 



"너 요새 이상하다? 갑자기 왜 친한척인데?"


"레이르아. 어디 아픈 것이냐?"



서로 모르는 척 하며 지내던 이복 형제에게 다가가 애교를 부리지 않나. 공작인 아버지에게 귀족의 품위는 내다 버리고 어린애처럼 행동하지를 않나.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더 기분이 나빴던건 그 이복형제가 자신을 챙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왜 몸을 차지한 이는 좋다고 더 열심히 따라다니는 걸까.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몸을 움직여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라고 생각한 사건이 터졌다. 약혼이 오가던 황태자에게 파혼해 달라고 말한 순간이었다. 귀족 세계에서 열 넷은 이미 성인과 다름 없었다. 그 모든 말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황태자는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짓다가 농담이라는 듯 넘겼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대체 이 미친 존재는 무슨 생각으로 그딴 말을 내뱉은 걸까.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나는 여전히 내 몸을 조종할 수 없었고 내 몸을 차지한 이는 수많은 사건들을 저질렀다. 귀족은 그 어떤 말을 듣더라도 언제나 차분하게 행동하며 거짓된 미소를 지어야한다.



"꺄악!"

"그딴 사고방식에 갇혀있으니까 그딴 말이나 지껄이지." 



공작가가 아니었다면 사교계에서 이미 매장당했을 수많은 행동들을 했다. 예복을 제대로 입지 않았다며 험담을 하는 귀부인에게 술을 뿌리고 드레스 사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들을 비웃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무언가 즐거운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한가지 이상했던 점 하나는 귀부인이나 소녀들을 볼때 생김새를 살피듯 머리와 눈 쪽에 시선을 두고 나서 혼잣말로 그들의 이름을 중얼거린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더 흘렀다. 가정교사를 부르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내 몸을 차지한 존재는 교육원에 들어가겠다고 주장했다. 입학식이 있던 날 나의 눈은 연설이 이어지는 단상이 아닌 평민들이 앉아있는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했다. 학원을 다니면서 나의 몸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여러 귀족 아가씨가 한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 둘러싸인 소녀는 평민인듯 옷차림이 화려하지 않았다. 근데 왜 나의 몸은 찾았다라는 말을 외치며 입가에 미소를 그리는가.



"황태자 전하. 제 친구랍니다."



평민소녀에게 친구가 되자는 말을 스스럼 없이 외치며 나중에 만난 황태자에게 소개시켰다. 그리고 열심히 두 사람을 지켜보기도 했다. 나의 몸을 차지한 존재는 두 사람을 이어주려는 듯 셋이서 자주 만남을 가지려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짓을 하는 걸까. 가끔 보이는 황태자의 눈빛은 저 평민 소녀가 아닌 나를 향하는 것 같은데. 아니 나의 몸을 차지한 존재에게 향하는 것 같은데.



"내가 사랑하는 건 레이르아. 당신입니다."



달이 밝게 빛나던 밤에 황태자는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당신이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야. 그러게 소리치고 싶었다. 내 몸을 차지한 존재는 처음에 그의 고백을 믿지 않았다. 당신이 사랑하게 될 이는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집에 들어왔을 때 이복 형제는 나를 반기며 가지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여행을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의 몸이 기뻐하며 그들에게 안겼을 때 나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현재 반기는 나는 내가 아니라 내 자신을 차지한 존재라는걸. 공작가의 사랑받는 레이르아는 내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예전의 내 주위와는 너무나 달라져버린 상황에 나는 점차 나의 몸을 되찾겠다는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다. 지독히 외로웠다. 나를 차지한 존재의 의견으로 가문은 더 성장했다. 황태자는 자신을 배신한 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내가 아니라서, 나의 몸을 차지한 존재 덕분에 내 주위는 더 행복해졌다. 지금 내가 없어지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을 터였다. 지속적으로 고백을 하던 황태자를 결국 또 다른 나는 받아들였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열렸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러갔다.



"어?"



내가 내 몸을 제어할 수 없게 된 날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는 내 몸을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과 감촉에 나는 내 손을 들어 나의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생각을 하던 중에 나를 감싸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레이르아. 일어났습니까?"



밝게 미소지으며 나를 쳐다보는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당신이 사랑하는 레이르아는 내가 아니야. 그리고 또 다른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렇다면 그 전에 내 몸을 차지했던 이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 순간에 다시 나는 이전처럼 내 몸을 잃지 않을까. 나의 이름을 부르는 이의 목소리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당신 오늘따라 이상해.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어 입술만 깨물며 방을 나섰다. 하루동안 나를 만난 이는 모두 나를 불렀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이는 내가 아니었다. 그들이 원할 이는 내가 아니었다. 현재 이곳에 있을 레이르아는 내가 아니었다.


--

빙의글을 읽다가 문득 원작 캐릭터가 무의식으로 밀려났다면? 이라는 생각이 들어 써본 이야기인데... 

  • tory_1 2019.01.06 19:03

    헉 이렇게 보면 엄청 안쓰럽다ㅠㅠ... 만약 나였다면 어쩔줄 모르고 한동안 엄청 방황하거나 아무도 못 믿을듯...

    전부 '나'에게 한다고 하는 행동이지만 실질적으론 '나'에게 하는 행동이 아니니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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