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6. 너의 모든 처음이 나라서 좋았다.

 

진짜? 나 현경씨 애인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차정원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젓가락질을 멈췄다. 좋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입체적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한참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차정원이 현경에게 돈을 빌려주고 싶은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민한다. ? 차정원이 돈을 빌려준다고?

 

너 방금 돈 빌려주고 싶다고 했어?”

. 다른 것도 아니고 할머님 병원비라잖아.”

 

내가 알고 있는, 돈 한 푼에 신중하고 까다로운 차정원이 맞나 싶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답에 입 꼬리가 슬, 올라가다가 초코우유가 아닌 바나나우유라는 말에 뚝, 하고 바닥으로 내려간다. 어떻게 다른 것도 아니고 초코우유를 틀리지. 갑자기 입맛이 없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가,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것까지 말해주는 차정원의 말에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차정원이 맞았다.

 

자신의 모든 처음이 나였다는 말에 내가 지금 길 위를 걷고 있는 것인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두둥실, 저 멀리로 날아갈 것 같아 차정원의 손을 잡았다. 집이 이렇게 가까웠던가. 벌써 도착한 것이 아쉬워 차정원을 다시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차정원은 대답 대신 내 등을 떠민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올라왔다. 올라오자마자 베란다로 향했다. 아직 출발하지 않은 차정원에게 손을 흔들어주자 전화가 온다.

 

?”

-잘자라구.

너도 얼른 가.”

 

차정원이 뒷걸음질을 친다. 여전히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어, 위험해. 얼른 들어가. 창밖으로 몸을 반 쯤 뺀 내 모습에 차정원이 걱정스럽게 말한다. 그 목소리가 좋아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차정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곤 침대에 누웠다. 옷도 갈아입고 씻어야 했지만 손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으면, 세수를 하면 지금 이 감정이 사라질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 차정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늦은 밤, 방 안 가득한 달빛, 차정원의 목소리.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넣어두어야 했던 사랑을 이렇게 꺼내도 괜찮은 거구나, 방 안 가득한 행복함을 느끼며 까무룩 잠에 들었다.


**

 

뭐야, 저 사진 처음 봐.”

 

프레젠테이션에 뜬 차정원의 사진에 나도 모르게 손을 꼼지락거린다. 갖고 싶다, 저 사진. 차정원 역시 같은 생각인지 내 증명사진을 달라고 속삭인다. 저 사진이 어디 있더라.

 

, 여기.”

 

프레젠테이션에 쓰였던 증명사진은 서랍 속에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 사진을 건네자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제 지갑을 꺼낸다. 고등학생 이수현 옆에 자리 잡은 사회인 이수현의 모습에 조금 쑥스러워진다. 이제 내가 받을 차례다.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는 내 모습에 차정원이 뭐하고 있냐고 물어본다. 뭐하냐고?

 

..”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잊은 것 같아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한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게 한국 정 아닌가? 싶지만 차정원에게는 그 사진이 없다는 황당한 대답만 돌아온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조만간 다시 찍어 주겠다고 한다. 나도 액자에 새로운 사진 한 장 꽂아보나 했더니. 퇴근 할 때까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조금 신경질적이었다.

 

**

 

그냥 자주 놀러온다고 할 껄 그랬나. 현경이 빤-히 나를 바라본다. 현경을 속일 수 있는 자만이 사기꾼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농담이 생각나 작게 웃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원이가 뭘 생각하게 그렇게 웃냐며 물어온다. 해맑게 웃으며 네 얼굴이 재밌어서 웃었다고 하자 뚱- 하게 화장실로 도망쳐 버린다. 어라, 얼굴에 양념이 튄 걸 알았나?

 

차 대리, 미안해서 어째. 불금인데 애인이랑 놀지도 못하고.”

 

사람 좋은 윤팀장이 차정원에게 조금 미안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차정원을 향했다. 차정원의 시선도 나를 향한다. 저 시선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일까. 유추하는 내 귀로 현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현경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액션 영화였다. 덕분에 차정원의 손을 잡지도 않고, 차정원이 눈을 가리지도 않은 채 영화에 열중할 수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가득이었지만 윤 팀장이 있는 자리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가끔 바라본 차정원도 TV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웃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땐, 나는 차정원의 침대 위였고 차정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고 가겠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이 상태로 잠들면 정말 말 그대로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깜빡깜빡 졸고 있는데 한참동안 바쁘게 움직이던 차정원이 옆에서 자도 되겠냐고 물어온다. 하하, 이 침대 주인이 자기면서 왜 나에게 묻는지 모르겠다.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현경과 얘기는 잘 마친 걸까. 잠 가득 한 목소리로 묻자 방금 송금을 마쳤다고 대답한다.

 

난 정말내 손으로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줄 줄 몰랐어. 너무 신기해.”

 

차정원이 자신의 행동이 신기한 듯 송금을 마친 제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치, 신기하지. 정말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겠지. 그러니까 너랑 나랑 다시 만난 것 아니겠어? 웅얼거리는 내게 차정원이 조용하게 속삭인다. 그 목소리가 자장가 같아 점점 더 잠에 빠져든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사랑해, 수현아.”

 

정말 한 끗 차이로, 잠에 빠져 들려던 찰나, 귓가에 차정원의 고백이 맴돈다. 눈이 번쩍 뜨였다. 10년을 기다린 말이었다. 온 몸을 관통하는 찌릿함에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고 나도,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차정원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웃음을 참으며 두 팔을 차정원에게 뻗었다. 그러자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를 안아준다. , , .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박동이 세찼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안 잤냐는 차정원의 질문에, 기다렸던 말이 들려 깼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차정원이 고개를 든다. 이제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고 싶었다. 그 마음을 담아 차정원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두운 방안에서도 차정원의 볼이 발개진 게 느껴졌다. 아니, 내 배에 닿은 차정원의 것이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차정원이 옆으로 굴렀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차정원에게 욕정 하는 것처럼, 차정원도 내게 욕정하고 있어 기뻤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옆에 누운 차정원이 나를 안았고, 나는 나를 안은 팔을 감쌌다. 따뜻했고 아늑했다. 차정원의 온기를 느끼며 잠에 들었다.

 

나를 안은 이는 더 이상 친구도, 동료도 아닌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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