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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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년간의 안식년을 마치고 준영은 출국했고, 송아는 경후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갔다. 준영이 있을 때에도 그리 자주 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예 만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혼자 있는 것은 생각보다 외로운 일이었다. 유진에게 일을 배우고 영인의 뒤를 따라다니며 공연기획의 일을 배우는 경후의 일이 송아의 체력을 쓰게 만들었고 또한 준영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더 짙게 만들었다. 그래서 송아는 경후에서 가까운 곳으로 오피스텔을 얻었다. 출퇴근 시간이라도 줄여 체력을 쌓겠다는 방법이었다.

 


경후 주변은 준영과의 추억들로 가득했다. 눈이 닿는 곳마다 준영이 보였다. 송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움의 눈물이 아닌 추억을 상기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까닭은 조금의 체력이 쌓인 것이 마음의 근육 또한 단단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임을 송아는 깨달았다.

 


출국한 준영이 생일선물로 보내준 헌정은 졸업연주회 때 들었던 것과 완벽히 같진 않았지만 먼 곳에서 보낸 준영의 마음이 들어있기에 송아는 자주 듣곤 했다. 들으면서 헌정 앞에 쳤을 준영의 다른 곡들이 항상 궁금했고 조금은 후회했다. 그렇지만 지나간 일에 너무 마음을 두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들을 준영의 수많은 곡들이 남아있었고, 지난 시간을 후회하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쳐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2.

 

나무마다 단풍이 들고 저마다 다르게 떨어지는 가을의 때, 저녁 늦은 시간 준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13시간의 시간을 넘어 그는 송아의 시간을 궁금해 했다.

 


“지금 뭐하고 있었어요?”

“이제 씻고 쉬는 중이예요. 가을밤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곡을 들으면서.”

“응? 가을밤에 잘 어울리는 곡? 브람스?”

“브람스 좋죠. 하지만 땡! 틀렸어요.”

“뭘까...... 드뷔시 달빛?”

“나를 아직 잘 모르네요, 박준영씨?”

“흐음. 그러면 난가? 헌정?”

“정답이에요. 3번째에야 맞추다니.”

 


기분 좋아 웃고 있는 준영의 소리를 들으니 가을밤의 시림이 가신듯했다.

 


“근데 준영씨, 그날 나 안 왔다고 생각하고 헌정 쳤잖아요. 무슨 생각하면서 쳤어요?”

“그 자리는 비었어도 송아씨를 위해 치는 거니까 내 마음을 다해서 쳤죠. 연습도 정말 많이 했는데.”

“나는...... 가끔 후회가 돼요. 그 자리에 가서 앉아있을 걸 하고요.”

“후회하지 말아요. 그 자리가 아니더라도 그 공간에 있었잖아요. 내가 치는 거 들었잖아요.”

“그럼 내가 그 자리에 앉아있었으면 어떻게 쳤을 거 같아요?”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그 자리에 송아씨가 있든 없든 송아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 거니까.”

“방금 그 말은 얼굴 안 보니까 술술 나오는 거죠? 얼굴 봤으면 귀가 빨개졌을 건데.”

“이미 빨개져 있어요. 놀리지 마요.”

 


서로의 일상의 안부를 물으며 계속되던 통화는 어느새 얕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송아로 인해 멈췄다. 준영은 송아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잘자요, 그리고 사랑해요, 송아씨.

 

 






 

3.

 

새로운 해가 되고, 준영이 속해있던 크리스의 기획사로 지민이 옮겨 오면서 크리스는 경후와 ‘승지민 단독 리사이틀 IN SEOUL’의 계약을 체결했다. 준영의 영향도 있겠지만 준영의 마음을 잘 조절해주고 도와주는 2명이 모두 경후에 있기에 지민의 한국 생활도 잘 부탁하기 위해 크리스가 큰 결심을 한 것이다. 영인은 리사이틀의 규모와 방향성 회의를 위해 밤낮없이 바빴고, 유진의 뒤에서 일을 배우고 있던 송아는 배움을 넘어서 영인의 옆에서 여러 일을 챙겼다.

 


“송아씨 이렇게 뒤치다꺼리 시키려고 뽑은 거 아닌데 정말 미안해.”

“아녜요, 팀장님. 바쁠 때 대처하는 방법 배우고 있는 거니까 괜찮아요.”

“야근수당도 많이 못주는데, 매일같이 나만큼 바빠서 어떡해. 준영이가 뭐라 하지 않아?”

“준영씨도 바빠서요. 지금은 시카고라는데 잘 지내고 있대요.”

“다행이네. 아, 20분 후에 있는 회의 자료는?”

“여기요.”

 


회의 결과가 쌓이면서 리사이틀의 방향과 일정도 정해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쇼팽의 곡들로 지민의 테크닉을 보여줄 이번 리사이틀은 강렬한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7월에 열릴 예정으로 5월까지 일본 연주여행을 마친 지민이 한국으로 들어와 잠시의 휴식 후에 경후에서 연습할 예정이었다.

 


준영과의 추억이 남겨진, 그리고 치열한 바이올린을 향한 송아의 짝사랑이 묻어있는 경후문화재단 리허설룸에 또다른 입주자가 오는 것이다. 경후에 도착한 지민에게 영인과 유진, 다운 그리고 송아가 인사를 건넨 후 리사이틀까지의 일정을 설명했다.

 


“주말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리허설룸은 이용가능하시고, 저희에게 연락하시는 게 불편하실 까봐 미리 열쇠는 복사해놨어요. 원하실 때 언제든 사용해주시면 되고, 리사이틀 3주 전에 토크 콘서트가 한 번 내정되어있거든요. 미리 질문지 받아서 드릴 거고, 지민씨 보기에 불편한 질문들은 컷하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리사이틀 후에 지면인터뷰가 잡혀있긴 한데 그건 천천히 말씀 드릴게요. 인사만 하고 너무 일정통보만 한 거 같네요.”

“아니예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근데 크리스대표님한테 저 전담으로 연락하실 분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아, 송아씨가 할 거예요. 준영이할 때도 잘 했고, 트리오 공연할 때도 잘 케어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영인의 말이 끝나고 송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 재작년에 연주회 하셨을 때 보러갔었어요.”

“아, 준영이형 왔었을 때요?”

“네, 브람스 좋아해서 갔었어요.”

“와, 그렇구나. 어떠셨어요, 제 연주?”

“제가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평가 아닌 감상을 바라는 거니까 편히 이야기해주세요.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화려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터치가 좋았어요. 콘체르토에선 협주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중요한데, 그 균형이 잘 맞는 느낌이라 곡 전체에 집중할 수 있어서 또 좋았구요. 피아노를 많이 사랑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송아씨, 감상평도 좋다. 이렇게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이 기획서를 써야 감동을 주는 공연을 만들 수 있지. 바쁜 일 끝났으니까 지민씨 리사이틀 끝나면 유진대리한테 기획서 샘플 받아서 천천히 준비해봐.”

 


영인의 말에 송아는 다시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민의 표정들 사이 짧게 스쳐 지나간 어두운 표정이 신경 쓰였지만 지민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어 송아는 마음 한편에 두고 넘어갔다.

 

 

 





4.

 

지민의 연습에는 패턴이 있었다. 수요일에는 휴식을 취하고 월화목금 오후에 4시간씩 경후의 리허설룸을 방문했다. 카페인을 못 먹었던 준영과 달리 지민은 커피를 좋아했고 지민이 마음에 든 카페가 가까이 있어 연습 날마다 준비해놨더니 지민이 좋아해 어색한 사이가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 든 송아였다. 시간이 나면 살짝 열린 리허설룸의 너머로 들리는 지민의 쇼팽을 듣곤 했다. 지민이 치는 쇼팽을 듣고 있자면 준영이 생각났고, 그러면 저장해놓은 준영의 헌정을 듣곤 했다. 그러던 중 지민의 리사이틀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들어온 후 로비에 있던 송아의 핸드폰에 헌정이 울려 퍼졌다. 준영의 전화였다.

 


“준영씨!”

“아, 송아씨. 전화 가능해요?”

“네, 점심시간 아직 20분 정도 남았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오늘은 왠지 송아씨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갑자기?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아니, 오늘 뉴욕에 비가 많이 와서 들어가는데 송아씨 생각이 많이 나서 전화했어요.”

“우산은 잘 들고 다녔구요?”

“그럼요. 송아씨가 사준 거 잘 들고 다녔어요. 비 오는데 괜히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어져서 젤라또도 하나 사 먹었어요.”

“아이스크림 안 좋아하잖아요, 준영씨.”

“이제 좋아해요!”

“흐-음. 정말로요?”

“쌀맛은 맛있었어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바닐라맛을 안 좋아한 거 같아요.”

“나도 내일은 아이스크림 사먹어야겠다. 준영씨가 먹었다고 하니까 나도 먹고 싶어요.”

“그래요. 아, 송아씨, 점심은 뭐 먹었어요?”

“...... 떡볶이요.”

 


멋쩍은 송아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저번 통화를 했을 때도 떡볶이를 먹었다고 했으니 본인이 찔린 탓일 것이다.

 


“오늘따라 되게 보고 싶어요.”

“응? 나도 보고 싶어요. 그런데 또 귀가 빨개지진 않았나요?”

 


농담으로 던지는 송아의 말에 준영은 조금은 토라진 말투로 답했다.

 


“송아씨는 내 귀의 상태만 궁금한가봐요?”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송아씨!!”

“삐진 준영씨는 달래기 어려우니 여기까지만 할게요. 나는 매번 지민씨가 치는 쇼팽을 들을 때마다 준영씨가 치는 쇼팽이 궁금했고, 그러다보면 준영씨를 생각하게 됐고, 생각하면 그리워서 준영씨가 생일선물로 보내준 헌정을 듣곤 했어요. 오늘도 오전에 2번이나 들었어요. 나는 준영씨를 생각보다 많이 그리워해요. 통화를 하는 지금도 많이 보고 싶어요.”

 

 


준영은 담담히 말하는 송아의 말에 비가 쏟아지는 뉴욕에서 웃으면서 울었다. 친구가 되자며 자신이 먼저 안았던 7월의 그 날 밤의 따스한 온기를 생각하며.

 

 

 




 

5.

 

지민의 리사이틀 당일, 송아는 다운과 함께 리셉션에서 초대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노트북에 기록된 명단을 확인하던 송아는 영인의 이름으로 하나의 초대표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다운에게 물었다.

 


“어, 저번에 초대표 확인할 때는 팀장님 거 없지 않았어요? 누가 오시는 건지 다운님 아세요?”

“저도 추가 해달라고만 들어서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누군지는 곧 알게 되겠죠?”

 


“그 초대표 제가 가지고 있는데요.”

“준영씨!”

“박준영선생님!!”

“사람들 많은데 너무 크게 부르지 말아요, 나 다른 사람들한테 잡히기 싫어요.”

 


준영의 웃음에 송아는 같이 웃어보였다. 다운은 벌어진 입을 쉬이 다물지 못하다 바빴던 영인이 돌아와 어깨를 토닥였을 때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속속들이 도착한 관객들의 입장을 마무리한 후 송아는 높았던 하이힐을 낮은 단화로 갈아 신고 지민이 대기실로 들어갔다.

 


“지민씨, 곧 입장하셔야 해요. 준비 다 되셨나요?”

“네. 저 잘 할 수 있겠죠?”

“지민씨의 연습이 제 대답을 대신 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리허설룸 너머로 들린 쇼팽은 정말 멋있었으니까요. 아, 입장콜 들어왔네요. 이제 나가시면 될 거 같아요.”

 


지민의 입장과 함께 ‘승지민 단독 리사이틀 IN SEOUL’의 막이 올랐다. 준영은 홀 안의 자리에서, 송아는 리셉션에서 각자 지민의 연주를 들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됐을 때의 지민의 연주는 송아가 재작년에 들었던 것과 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경후에서 연습을 거듭한 후 미묘하게 불안한 끝음 처리, 마디 사이의 유려했던 이음이 흔들린 모습들이 한 번씩 보였다. 그저 청중의 한 사람인 송아이기에 자신이 아까 건넨 말이 지민에게 더 부담을 주었을까 겁이 조금 났다. 그러나 긴장되어 보였던 지민은 송아가 보았던 흔들렸던 모습이 아닌 쇼팽 콩쿨에서 우승한 빛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었다. 조금 부은 다리를 통통 두들기며 지민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던 송아의 옆으로 영인이 다가와 앉았다.

 


“지민씨 연주 어때요? 매번 리허설룸 지날 때마다 열심히 들었잖아요.”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고 화려한 불빛 아래 춤추는 지민씨 밑에 아주 조그만한 뾰족한 얼음이 찌르고 있는 느낌이라 조금은 불안했는데, 그 얼음은 이미 녹아버렸나 봐요. 열심히 춤추는 지민씨 열기에 녹아버릴 얼음이었는데, 저만 걱정한 거 같기도 하구요.”

“열정이 긴장과 두려움까지 녹일 수 있는 때도 있으니까요.”

“팀장님도 피겨하실 때 그러셨어요?”

“그래서 미련을 못 놓고 계속하다가 부상이 왔죠.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송아씨는요, 송아씨는 바이올린 놓은 거 후회돼요?”

“후회되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으니까요. 준영씨나 지민씨처럼 수많은 사람 앞에서 독주회나 콘체르토를 연주할 수 없는 건 아쉽지만 저의 한계를 아니까요. 거기까지가 제 자신이 상처받지 않는 사랑이었던 거 같아요. 자기...... 만족일까요?”

“그건 송아씨만이 아는 거니까요. 누군가 자기만족이라 한들 그 사람은 송아씨가 아닌걸요. 송아씨가 선택한 게 옳다고 걸어가면 송아씨에게 옳은 일이 될 거예요.”

“그럴까요?”

“자신이 믿지 않으면 의심이 어디선가 쌓여서 송아씨를 괴롭힐 거예요. 내가 본 송아씨는 충분히 자신을 알고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잘 하고 있어요.”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띤 송아를 본 영인은 마지막 곡이 끝나감을 모니터로 확인했다.

 


“송아씨, 앙코르곡은 들어가서 들어요. 나는 문외한이라 모르니 밖에서 대기할게요. 이번 리사이틀 고생했는데 앙코르곡은 듣게 해주고 싶어요.”

 


영인의 말에 마지막곡이 끝나고 잠깐 지민이 퇴장했을 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홀 내로 들어가자 잘 보이지 않아 걸음을 잠시 멈췄다. 자신의 팔을 잡는 누군가에 화들짝 놀란 송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채로 눈을 깜박여 암흑에 눈을 순응시키기 시작했다.

 


“나예요, 송아씨.”

 


익숙한 준영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시야에도 준영의 모습이 보였고 여전한 준영의 옅은 코오롱

향도 느껴졌다.

 


“놀랬어요. 근데 어떻게 나 온 줄 알았어요?”

“영인누나한테 부탁했거든요. 앙코르곡 같이 듣고 싶다고. 여기로 들어올 줄 알고 마지막곡 시작부터 여기서 대기 했죠.”

“다리 안 아파요? 비행기 타고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사실...... 시작하고 한 1-2분 있다가 바닥에 앉아있었어요.”

“잘했어요. 사람들 다 들어오면 우리 여기 그냥 앉아요.”

 


쇼팽을 주제로 한 리사이틀곡들을 마친 지민은 예고했던 앙코르곡으로 브람스와 리스트편곡의 라캄파넬라를 연주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 한 스페셜 앙코르곡을 지민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헌정이었다.

 


송아는 나란히 앉은 준영의 손을 잡았다. 준영은 송아의 손을 자연스레 더 깊게 잡고 지민의 헌정을 감상했다. 연주가 끝나고 일순 고요했던 홀이 청중들의 박수로 가득 차 울리기 시작했다. 박수를 함께 나누던 송아는 준영에게 속삭였다.

 


“준영씨의 헌정과는 다른 느낌이네요? 뭔가 굉장히 깊은 사랑을 하신 것 같은 느낌?”

“응? 그럼 나는 깊은 사랑이 아닌 거예요? 나도 헌정 내 마음 담아서 쳤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굉장히 지독한 사랑 같은 헌정이에요. 놓아주지 않겠다는...... 흐음 근데 왜 헌정을 고르셨을까? 쇼팽이어서 앙코르는 리스트로 갈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리스트편곡의 슈만의 헌정이라......”

“뭐 지민이도 누구에게 바치고 싶나보죠? 송아씨는 내가 리사이틀 앙코르곡 뭐 쳤으면 좋겠어요?”

“음...... 저 개인적으로 드뷔시 달빛이요.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갔을 때 봤던 달빛이 좋았어서요.”

 


박수가 어느새 끝이나고 송아와 준영은 제일 먼저 홀을 빠져나와 영인에게로 갔다. 준영은 리셉션 뒤편에 앉아있고 송아와 영인은 리사이틀을 마무리짓기 시작했다. 청중들이 퇴장하고 송아와 준영은 지민의 대기실로 갔다.

 


 

찾아온 지인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지민을 기다리던 송아는 준영에게 속삭였다.

 


“나 지민씨 집에 데려다드리고 가야하는데 먼저 가 있을래요?”

“송아씨 없는 집에 나 혼자요? 첫 방문인데?!”

“아 그런가...... 그러면 어떡하죠.”

“나도 지민이 데려다주는 거 타고 갔다가 같이 오면 되죠.”

“지민씨한테 물어봐요. 나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니까요.”

 


설핏 웃으며 말하는 송아에 준영은 같이 웃어보였다. 지민의 모든 인사가 끝나고 송아는 다가갔다.

 


“지민씨 댁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그리고....”

“나도 같이 타고 가도 될까?”

“네? 준영이형이 왜요? 비행기 타고 오셔서 피곤하실 텐데 얼른 가서 쉬시는 게 낫지 않아요?”

“송아씨랑 다음 일정이 있어.”

“이렇게 늦게요? 아, 알겠어요.”

 


지민이 살풋 웃으며 대답하자 송아의 볼에 옅은 홍조가 번졌다.









6.


운전석엔 송아가, 조수석엔 준영이, 그리고 뒷좌석엔 지민이 탄 차는 예술의 전당을 빠져나와 지민의 집으로 향했다. 지민이 관자놀이 부근을 문지르는 것을 본 준영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지민아, 컨디션 안 좋니?”

“머리가 좀 아파서요. 저는 항상 공연 끝나면 그래요. 형은 안 그러세요?”

“난 오히려 끝나면 홀가분한 편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주하는 거니까 끝나면 편하더라고.”

“저랑은 반대시네요. 전 끝나고 나면 힘들어요. 제 연주를 곱씹게 되니까요.”

“나도 내 연주를 돌아보긴 하는데, 어느 부분이 힘든 거야?”

“만족하지 못하는 연주, 그리고 만족하지 못하는 제자신이요. 못난 점만 생각이 나요.”

 


말을 마치고 지민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적이 이어지다 결국 지민에게서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갓길에 차를 주차한 송아가 준영과 눈을 맞췄다. 준영이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자 송아는 티슈를 꺼내 지민의 옆에 두었다. 소리 없이 울던 지민이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치자 준영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울고 나니까 속이 좀 후련하지? 난 베개를 주먹으로 치면서 우는 날도 있었어. 피아니스트니라 손은 소중하니까 칠 게 베개밖에 없더라.”

“...... 형은 피아노 치면서 만족하세요?”

 


물어보는 지민에 준영은 싱긋 미소 짓고는 송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만족하는 건 아냐. 그냥 이제야 좀 치고 싶어. 지금까지는 내 의지가 아닌 강요로 쳐왔던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한테 그걸 물어보는 이유는 뭘까?”

“잘 치고 싶은데 피아노가 저를 안 봐주는 거 같아요. 어렸을 땐 잘 몰랐는데 피아노에 대한사랑은 저에겐 외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삶은 외사랑과 짝사랑 그리고 마주하는 사랑 그 세 사랑의 연속이다. 지민에게 피아노는 어느 순간 짝사랑을 넘어서버린 외사랑이 되어버렸다. 피아노는 지민의 마음을 알면서도 받아주지 않으니 짝사랑이 아닌 외사랑이라 지민은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이니까. 준영과 송아가 볼 땐 지민은 넘치게 피아노를 사랑하고 있어서, 자꾸 욕심을 내서 외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준영의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한 피아노와 달리 지민의 피아노는 화려했다. 화려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집중을 받을 수 있었던 지민이기에 더욱 욕심을 냈다. 자신의 터치에 사람들이 집중해주기를 바랐으니까. 그 욕심이 사랑을 외사랑으로 만드는 줄 모르고 지민은 힘들어하고 있었다. 준영과 송아는 각자 겪어온 그리고 함께 겪었던 사랑으로 인해 욕심내는 사랑이 얼마나 서로를 좀먹게 하는지, 또한 욕심내지 않는 사랑이 서로를 얼마나 의심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민아 피아노는 충분히 널 사랑해. 단지, 네가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뿐인 거야. 선율과 리듬을 충분히 느끼면서 빛나던 손가락인데 화려하게 보이려고만 하면 곡 전체가 다 무너지는 거니까.”

 


준영의 위로에도 지민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쩔줄 모르는 표정으로 준영은 송아를 바라보았다.

 


“지민씨. 지민씨가 친 앨범을 다시 들어보시면 어떨까요? 제가 말하는 것보단 직접 들으셨을 때 스스로 알게 되실 거 같아요.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송아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아는 지민의 집 쪽으로 차를 운전했다. 지민이 내리고 송아와 준영이 따라 내렸다.

 


“지민아 오늘 리사이틀 하느라 수고했어. 들어가서 고민하는 것보단 따뜻한 물에 씻고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는 걸 추천해.”

“편히 쉬시고 영인팀장님께는 제가 연락 넣어놓을게요.”

 


송아의 자취집으로 돌아오는 길, 준영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힘들 때 밝게 빛나 보이기만 하던 지민이도 힘들어하네요.”

“누구나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잖아요. 자신이 내려갈 때 올라가는 사람과의 격차는 더 커 보이구요. 지민씨가 피아노와의 사랑을 잘 느꼈으면 좋겠네요. 서로 소중하다는 걸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요. 근데 준영씨 대전 안 가봐도 돼요?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모레 내려갔다가 오려구요. 비행기타기전에 연락드리고 왔어요. 사실 거의 송아씨만 모르는 입국이었달까요?”

“진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연인은 킥킥대며 웃었다. 차에서 내리자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준영에게 올라간 온도는 송아의 생일에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열기가 가득한 여름에 태어난 송아는 겉으로 차분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송아 안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여름처럼 뜨거움을 준영은 잘 알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만큼 가까이 붙은 연인은 음악과 삶에 관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여름날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온기를 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지민은 그날 저녁 그리고 그 다음날까지 자신의 앨범을 들으면서 어떻게 피아노를 사랑했는지 알아갔다. 피아노에 대한 사랑을 순간순간 느꼈지만 당장 그때처럼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 궤도에 다시 오르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 연습이 필요함을 지민은 알고 있었기에 피아노에 대한 무력감이 떠올라도 수년간의 피아노를 친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금 피아노를 쳤다. 지민은 이어진 서울 리사이틀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출국해 또 다른 연주여행을 시작했다.

 

 

 

 

 


 

 

7.

 

한국에 있는 4박 5일동안 준영이 송아 옆에서 떨어진 시간은 대전을 다녀온 시간뿐이었으며 각자 쌓아온 1년간의 이야기를 나눴고 또 서로를 걱정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사랑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으니 서로가 사랑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자고, 또한 서로를 배려할 순 있지만 그 배려가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좀먹게 하거나 배려 이상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 반드시 서로 대화하자는 약속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각자 가진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일 때에는 눈감고 넘어가줄 필요는 있음을,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이 능사는 아님을 아는 서른한살의 준영과 송아는 4박5일간의 짧은 서울생활을 끝내고 준영은 출국을 위해 송아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3개월간의 미국 연주여행을 마치고는 한 달간의 쉬는 시간이 있을 것이기에 서로는 그 시간을 기대하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아, 현호의 첼로 콘체트로 공연관람을 위해 1달쯤 후에 출국할 예정인 것은 준영에게 비밀로 해둔 채, 송아는 인천공항 출국장으로 나서는 준영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송아가 보기에도 발걸음이 점점 늦어지던 준영이 다시금 뛰어 돌아와 송아를 품에 안았다. 연애 초반부터 준영은 송아를 품에 안은 채 마음을 가다듬는 일이 많았기에 자연스러운 포옹이었지만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곳에서 안는 건 송아로서는 조금 부끄러웠기에 준영의 등을 작은 손짓으로 토닥여 떼어냈다,

 


“나 가는데 안아주지도 않고 보내려고 했어요?”

“집에서 많이 안았잖아요. 여기는 사람도 많은데.”

“공항에서는 많이들 이러니까 괜찮아요.”

“나는 안 괜찮아요......”

 


준영은 기어들어가는 송아의 목소리에 웃으며 안은 팔을 떼어냈다.

 


“나 진짜 가요.”

“공항 도착하는 내내 그 말 했잖아요. 잘 가요. 밥 꼭 잘 챙겨먹고.”

“응 그럴게요. 아 생일 선물은 나라고 했지만 그래도 준비한 거 있어요. 이것도 선물이긴 한데 지금 열지 말고 이따가 열어봐요.”

“궁금한데...... 이것도 열지 말라고요?”

 


준영은 상자를 건넸고, 그 상자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송아를 다시금 준영은 안았다

 


“물어보니까 왜 또 안아요. 설마 이 포옹이 선물은 아니죠?”

“아니에요. 오늘 동아리 친구들 만난다고 했죠? 부탁해놨으니 줄 거예요. 직접 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준영씨 가고 준영씨 생일 선물 받으면 또 준영씨를 생각할 거니까 좋죠. 비행기 타면 연락도 못하는데.”

“응 이제 나 진짜로 갈게요. 생일 축하해요.”

 


준영의 가벼운 버드키스로 연인은 헤어짐의 인사를 마무리 지었다, 떠나는 날이 송아의 생일인 것은 연인이 되고나서 첫 출국이 송아의 생일 전이었던 것보다는 낫지만, 생일 하루를 온전히 축하해주지 못하는 아쉬움은 준영에게 미안함으로 남았다.

 

 

 

 

 

 

 

 

8.

 

동아리 생일파티에 모인 친구들은 자신들이 항상 찾아온 식당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 새롭게 시작했고 동윤이 마지막으로 들어온 후 송아의 생일파티가 시작됐다. 소원을 빌고 초를 분 송아에게 친구들이 하나둘 선물을 건넸고, 동윤은 생각보다 큰 상자를 가져와 송아에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바이올린이 들어있었다.

 


자신의 바이올린이었다. 자신의 손때가 탄 곳을 바로 알아본 송아는 동윤을 바라보았다.

 


“준영이가 나한테 너가 팔아달라고 한 바이올린 자기가 사겠다고 했었어. 그리고 주기적으로 바이올린 켜서 낡지 않게 부탁한다고. 너가 다시금 행복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을 거 같을 때 자신이 선물할 거라고 하더라.”

“준영씨가?”

“조율이랑 마치고 가져왔는데 한 번 켜줄 수 있어? 나도 1년간 열심히 관리했는데.”

“아 나 너무 오랜만이라......”

“우리 앞인데 뭐 어때! 어떻게 생일축하 노래라도 할까? 너가 켜면 우리가 불러줄게. 셀프 생일축하노래이긴 하지만!”

 


민성의 말에 다들 웃으며 송아를 바라보았다. 송아는 자신의 흉터가 옅게 내린 상처를 만지면서 눈을 굴렸다. 짧은 곡이겠지만 이 흉터에 다시 바이올린이 닿는 게 무서워진 송아는 준영이 출국 전 건넨 선물이 생각났다.

 


“아, 잠시만.”

 


선물을 열어보니 옅은 연보라색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 위의 카드에는 ‘생일 축하해요, 바이올리니스트 채송아님.’ 라고 쓰여있었다. 그는 이제 노래로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지 않았다. 노래 이외에도 충분히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알았다. 송아는 울컥 차오른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이올린에 손수건을 덧댄 후 짧게 소리를 맞추더니 금세 생일축하노래를 연주했다. 비행기에 타 태평양을 건너고 있을 연인을 생각하며 송아는 미소지었다. 준영과 알게 된 이후 첫 생일엔 월광과 친구라는 선물을, 두 번째 생일엔 헌정의 연주를 주었던 준영은 세 번째 생일날 송아가 사랑한 것을 선물로 주었다. 바이올린 그리고 송아의 흉터를 감싸주는 준영의 마음.

 


송아와 준영은 서로를 만나 눈물과 웃음이 교차했던 스물아홉의 때와 같이 서른하나의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동안 알게 된 것은 태도와 마음을 넘겨짚거나 오해하지 않고 현재의 준영과 송아를 사랑하고 믿는 것, 그것으로도 송아와 준영은 한걸음 내딛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행복한 것은 행복한 대로, 흘려보내며 현재를 살아가는 송아와 준영이길 바란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방영 1주년을 축하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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