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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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빈세 콘퍼런스 날을 한마디로 표현해보라면, 불가역적 대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날을 중심으로 혜준의 세계는 한 번 더 바뀌었다. 중국과 굴욕적인 식사를 마친 허재와 대한민국 경제의 운명에 대해 더 고민해 볼 시간을 갖기도 전에, 혜준은 토빈세 콘퍼런스 참석자 명단과 좌석 배치를 확인해야 했다. 그 명단을 좀 더 빨리 확인했더라면,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혜준은 경찰특공대가 홀을 감싸고 있는 게 그저 평범하게 참석자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아마 총기 도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콘퍼런스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었다. 국가적 관점에서 본다면 콘퍼런스 취소보다는 약간의 사고가 있더라도 성황리에 끝마치는 상황이 더 긍정적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혜준의 입장에서는, 특히 그 사고가 아는 사람에게 일어났고, 제가 그 사건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면, 정말 인생이 덜컹거리는 그런 날이었다.


혜준은 뻔뻔한 얼굴로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오는 유진을 보면서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첫 번째, 저놈이 여길 어디라고 찾아온 거지? 명단에 분명 없었는데. 두 번째, 유진 한의 뻔뻔스러움과 토빈세 상정과정에서 온 무력감. 세 번째, 또 괜한 말을 붙이기 전에 먼저 그의 망발을 막아야겠다는 것. 저 사람은 선도 모르고 친절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일들을 마구 벌이고 다녔다. 그것도 혜준의 주변에서.


만약, 중간에 별다른 장애물 없이 그 상태에서 혜준이 유진을 만났다면, 정강이를 한 번 걷어차고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오냐고 낮게 읊조리듯 화를 내면서. 그러나 다행히 박수종 사무관이 저에게 별 시답잖은 일을 떠넘겼고, 혜준은 가까스로 유진 한에게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유진의 얼굴을 보고 떠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탈력감에서. 수많은 밤을 새우고, 국회의원들에게 통사정하고, 심지어 채이헌 국장은 무릎까지 꿇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혜준이 얼마를 노력했든지간에 결과는 실패였다. 만약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있다면 혜준과 그의 동료들 편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저 제 이익밖에 모르는 월가의 악마보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패배. 바하마 코리아는, 다시 말해 유진 한은 정인은행을 재영은행에게 손쉽게 떠넘기고 한국을 떠났다. 분명 그랬었는데, 왜 여기서.


“아이, 저기 지금 영상이 안 나온다는데, 빨리 좀 가서 한번 확인해 봐요, 아이, 지금 시간이 없어요, 뛰어요 빨리!”


아니 지금, 혜준의 반박은 박수종에게 들어먹지 않았다. 아, 빨리 뛰어! 저놈의 박수종, 혜준은 속으로 박 사무관의 성질머리를 짓씹으며 생각의 고리를 끊어냈다.


*


자박자박. 혜준은 곁눈으로 제가 걸어온 무대 뒷길을 훔쳐보았다. 익숙한 인영이 혜준의 뒤를 따라 다가왔다. 혜준은 모른 척 무대 뒤로 더 걸어갔다. 마주치면, 이야기하는 거고, 아니면, 그냥 무시하자.


*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유진 한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저를 보고 놀라 눈이 커지는 모습, 탕. 세상이 뒤집혔다. 총소리는 총소리라고 감히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컸다. 멍한 정신을 들어 옆을 보았을 땐, 붉은색. 온통 붉은색이 가득했다. 헐떡이는 신음소리가 총소리보다 더 귀를 먹먹하게 울렸다.


이 사람이 죽는다면?


또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도 총구 앞에서 나를 감싼 사람이. 혜준은 그 순간 온전히 유진에게 집중했다. 인간 유진 한이 인간 이혜준에게 한 일들만 떠올랐다. 토빈세고, 공무원의 의무고, 지금 제 앞에서 붉게 고통을 내뱉는 사람이 있는데. 그동안 유진이 혜준에게 해온 모든 말과 행동은 거짓이 아니었나? 장난이 아니었던 걸까? 유진의 손이 혜준의 팔에 내려앉았다. 검붉은 손자국이 도장처럼 혜준의 마음을 찍어 내렸다.


*


“이혜준씨? 괜찮아요?”


유진이 혜준의 팔을 살짝 잡았다. 맞아, 그때도 이렇게 잡았었어. 혜준의 시선이 유진의 손끝에 맺혔다.


“내가 이혜준이라고 저장한 게 그렇게 별로인가 봐요?”


유진이 조금 상처받은 얼굴로 혜준의 눈을 맞추려 몸을 살짝 숙였다. 아뇨, 혜준이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아뇨. 그냥 좀 예전 일이 생각나서. 무슨 일인데 그래요? 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몸이 달은 유진이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나 이거 사줄 거죠?”


“그게 뭔데요?”


“이따가 혜준씨네 가서 먹을 과자요.”


“아니, 그걸 왜 우리 집 와서 먹어요?”


누가 허락해준댔나? 혜준은 유진의 막무가내식 우기기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내가 힘이 세서 짐도 다 들어줄 거고, 이혜준 사무관이 아니라 이혜준씨라고 번호를 저장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럼 유진 한씨 돈으로 사세요.”


혜준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유진은 조금 투덜거리며 과자를 자연스럽게 카트에 담았다. 혜준도 그 모습을 모른 체하며 계산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 필요한 생필품을 유진이 미는 카트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혜준은 계산대 앞으로가 가득 찬 카트를 바라봤다. 휴지며 세제, 새 프라이팬, 작은 쌀과 찬거리. 오늘 지출이 꽤 강하게 혜준의 잔고를 치고 지나갈 예정이었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이렇게 사놓으면 한동안 장 볼 걱정은 없어도 됐다. 혜준은 카트를 뒤적거려 유진이 고른 과자 몇 개를 계산대 위에 가장 먼저 올렸다. 아, 내가 계산할게요, 유진이 카트 손잡이를 놓고 앞으로 치고 나오려 했다. 혜준은 가볍게 유진의 몸을 밀어 다시 뒤로 보냈다.


“벼룩의 간을 빼먹으세요, 유진 한씨.”


쥐꼬리만 한 공무원 월급을. 혜준이 말을 이으며 나머지 물건을 계산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한테로 와요. 내가 연봉 진짜 잘해줄게요.”


“됐습니다.”


*


유진과 혜준 둘 다 양손에 가득 장 본 물건을 들고 유진의 차로 되돌아왔다. 이리 줘요, 뒷자리에 넣게. 무거운 짐을 나눠 들고, 손수 차에 실어주는 유진을 보자 혜준은 조금 동료애를 느꼈다. 아, 이 사람도 나랑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이 맞긴 했구나.


다시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은 차 안, 혜준은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밥, 먹고 갈 거죠?”


“네?”


유진이 웃으며 혜준을 흘끔 바라봤다가 다시 앞을 주시했다.


“배고프다면서요. 밥 먹고 가세요.”


만약 밥 안 준다고 했으면 줄 때까지 버티려고 했어요. 유진이 웃었다.


*


한 번 와봤던 곳이라고, 유진은 곧잘 적응해서 혜준의 집을 제집처럼 휘젓고 다녔다. 이건 어디에다가 놓죠? 아, 저기다가 두세요. 갈치는 냉동실에 넣을게요, 나 다음에 오면 꼭 해줘야 합니다. 유진은 어설프게 다음 약속을 확답받으려 했다. 네, 그러시든지요. 혜준은 장바구니에서 두부와 밑반찬 재료를 꺼냈다. 금세 정리를 끝낸 유진이 혜준의 옆에서 알짱거렸다. 옷이나 아까처럼 걸어두시죠, 혜준이 손을 저어 옷장 손잡이에 걸려있는 옷걸이를 가리켰다. 두부김치처럼 김치를 좀 볶아줄까? 혜준은 김치 그릇을 열어 도마 위에 김치 반포기를 내려놨다.


“아.”


“왜요, 무슨 일이에요?”


유진이 화들짝 놀라 혜준에게 달려왔다. 칼에 비었어요? 피나요? 아뇨, 그런 거 아닌데요.


“김칫국물이 옷에 튀어서요. 이거 다음 주에 입고 출근하려고 했는데,”


혜준이 잠시 집중을 흐트러뜨린 사이, 김칫소가 살짝 혜준의 소매에 튀었다. 이거, 세탁소에 맡기면 지워주려나? 오늘 세탁소가 열었나? 유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혜준의 옷을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벗어요, 이혜준씨.”


*


ㅠㅠ않이 오늘 17화 외않해?ㅠㅠㅠㅠ 오늘 원래 머겜날인데ㅠㅠ 그래서 그냥 기분내려고 짧아도 들고왔어! 내일 또 올게. 재미없어도 좀만 기다려주라!

  • tory_1 2020.03.12 00:14
    소소하게 같이 마트에서 장보고 밥해먹는게 이렇게 좋을 일인가요?ㅠㅠㅠㅠ
  • W 2020.03.13 00:06

    ㅠㅠ 본편 스케일이 넘 크고 경제적이랔ㅋㅋㅋㅋ 아니 우리애들 왜 6번밖에 못 만났냐구요!!! 일상적인 모습이 보고 싶었슴다

  • tory_2 2020.03.12 00:18

    이게 17화다,,....... 헛헛한 마음을 채워줘서 고마워ㅠㅜㅜㅠㅜㅜ 내일 또 온다니 천사야??ㅜㅜ 내일건 18화라고 생각할 게 고마워 ㅠㅜㅜ 

    재밌어 재밌어 엄청 재밌어

    마지막 대사 너모너모 한유진 같다구! ㅋㅋㅋㅋㅋㅋㅋ 

    혜준이가 미친새끼 혹은 이런씨 등등 욕하겠찌??ㅋㄷㅋㄷ

  • W 2020.03.13 00:06

    ㅋㅋㅋㅋ미친새끼 대사 넣고 왔습니닼ㅋㅋㅋ 18화 대신 짧은 글이나마 들고왔소!

  • tory_3 2020.03.12 02:54

    벗어요... 벗어요...??? 벗어요...????!!!??? 하 진짜 나.... 넘 쓰레기같고,,,,, 좋다....(?) 토리야 고마웡!!!

  • tory_4 2020.03.12 04:19
    너무 좋다 토리야ㅠㅠㅠㅠㅠㅠ또 와준다니 고마웡!!!!
  • tory_5 2020.03.12 05:22

    재밌어 ㅋㅋㅋ 좋다 토리야 

  • tory_6 2020.03.12 09:14
    버버버버벗어요. 어서 벗고 그냥 맡기고 밥 먹자.
  • tory_7 2020.03.12 10:26
    벗어요벗어요벗어요벗어요.... 나만 쓰레기 아니라고 해줘... 작가선생님 뒷이야기 기대하고 있을게 따뜻한글 넘넘 고마워
  • tory_8 2020.03.12 12:04
    세글자 본 이후로 내용따위 생각나지 않네
    ‘벗 어 요’
    끼야아어어허아어어러어어아어앙
  • tory_9 2020.03.12 15:07
    버... 벗으라그ㅡ요? 어머어며어머 선생님!!
  • W 2020.03.13 00:07

    ㅋㅋㅋㅋㅋㅋㅋㅋ벗어요! 에서 출발한 짧은 글 들고 왔슴닼ㅋㅋㅋㅋㅋ 또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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