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꼭 한가로운 날, 편히 쉬고 싶을 때 연달아 터지는 경향이 있다. 혜준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자 머리가 살짝 아파왔다. 조 과장의 기자회견 이후, 외부적으로는 기자들에게서, 내부적으로는 윗선에서 이리저리 시달리던 혜준에게 이번 주말은 정말 단비 같은 숨 쉴 틈새였다. 정말 방해받고 싶지 않았는데. 혼자 편하게 쉬고 싶어 고모도 마리네로 보낸 차였다. ‘우리 가족’에 포함되지 않았던 상황에 심통이 좀 난 탓도 있었다. 마리가 고모와 고모부를 질책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명백히 혜준의 휴식 시간을 침해하고 있었다.
혜준의 직장과 언론이 이번 스캔들로 풍비박산 난 것을 모르는지, 토요일 이른 점심의 하늘은 맑디맑았다. 그런 맑은 하늘 아래 여우비를 맞은 채로, 빨간색 조그만 화분을 들고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유진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반갑게 제게 인사하고 있었다. 유진은 두 손으로 얌전하게 들고 있던 작은 붉은 색 화분을 한 손에 옮기면서 성큼성큼 혜준을 향해 걸어왔다.
“이혜준씨! 내려와 줬네요. 갑자기 비가 내려서 정말 당황했어요. 이렇게 맑은 하늘에 내리는 비를 한국말로 뭐라 부르더라?”
“여우비요. 유진 한씨. 무슨 용건이죠?”
혜준이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린 채 유진 한을 바라보았다. 베이지색 코트에 검정 목폴라. 며칠 전에 봤던 옷과 비슷한 차림새였다. 쏟아지는 일 때문에 잠시 묻어뒀던 기억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던 외로움, 쓸쓸함, 서늘한 밤공기와 쌉쌀한 소주의 맛. 그와, 나누어 먹던, 혜준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그, 며칠 전에 벤치에서 내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서요. 사과의 선물을 들고 왔어요.”
유진은 화분을 눈높이로 들어 올리면서, 짜잔, 과장된 몸짓을 지었다.
“그날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아서, 마지막에 소리도 지르고. 정말 미안해요.”
혜준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그럼 화분 주시고 안녕히 가세요.
“와, 저 그냥 가요? 나 비 맞으면서 열심히 기다렸는데, 저번에 이혜준씨가 연락했을 때도 나 군말 없이 바로 찾아왔잖아요-”
유진이 몸을 한껏 웅크리며 불쌍한 척했다. 아, 비를 맞았더니 너무 추워요, 감기 걸릴 것 같아. 급하게 내려오느라 미처 겉옷을 챙기지 못한 혜준이 팔을 쓸었다. 따뜻한 봄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봄바람은 오늘 조금 매섭게 살갗을 스쳤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 창밖을 쳐다보았을 때 안쓰럽게 비를 맞고 있던 유진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멀쩡히 차 타고 왔는데 왜 차에서 기다리지 않고. 혜준은 괜히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유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럼 잠시만 들어왔다 바로 가세요. 정말 잠시만입니다.”
*
이번 주는 혜준에게 너무 고된 일주일이었다. 환율전쟁과 그 뒤처리도 바빠 죽겠는데, 조 과장의 비리가 명명백백하게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에 고모와 고모부도 속을 긁었지. 회사에서 힘든 것을 집에서라도 위로받고 싶은데, 혜준이 온전히 몸을 쉴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 주말 하루만은 오롯이 나에게 투자하자, 큰맘을 먹은 혜준은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적당히 늦은 아침, 새벽에 날카롭게 울리는 알람이나 벨소리에 놀라 화들짝 깨는 것이 아닌, 혜준은 정말 간만에 편안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평화롭게 양치질을 하고 편히 쉬려고 했는데, 영 엉망인 화장실 꼴이 눈앞에 보였다. 지금은 바빠서라며 차일피일 미루던 일이 결국 터진 것이다. 고모가 청소를 도와주긴 했지만, 요즘은 간병일에 지쳐 집에 돌아오면 쓰러지기 일쑤였다. 혜준은 이를 닦다 말고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세면대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너무 짜증스럽게 도구를 다뤘는지 세면대 청소용 철사 손잡이가 그만 툭, 하고 부러졌다. 가지가지 하네. 망가진 철사를 뒤로 휙 던진 혜준이 거칠게 손을 씻었다. 이번엔 똑, 똑, 물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려 파이프를 바라보니, 연결 부위가 상해있었다.
퉤. 오늘은 모든 게 말썽이었다.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편하게 있으려는 계획은 다 어그러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저 화장실은 집에 있는 도구로는 손볼 수 없었다. 가까운 마트라도 다녀와야 하나. 혜준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식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었다.
화장실에서 씨름하던 그 십몇 분 새에 전화가 5통, 문자는 10통 정도 와 있었다. 모두 유진 한이었다. 다시금 통화 표시가 떠오른 핸드폰을 받아들자, 유진 한이 지치지도 않는지 밝은 목소리로 나 지금 이혜준씨네 주차장 근처예요, 잠깐만 내려올래요? 라고 하는 헛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이 미친 새끼, 아니 정신 나간 인간은 제정신인가? 여기가 어디라고 주말 아침에? 저번에 벤치에서 만난 날, 약속장소를 주차장에서 벤치로 번복한 게 실수였다. 이 눈치 빠른 놈은 단번에 그 주차장이 누구네 어느 주차장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
어디든 거칠 것 없이 드나들던 유진이 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혜준의 집으로 들어왔다.
“와, 이혜준씨 집 정말 작.... 아니, 아담하네요. cosy 해요.”
혜준의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주변을 휘 둘러보던 유진은 생각 없이 발을 한 발짝 내디뎠다.
“유진 한씨. 신발.”
Oops, 정말 미안해요, 정신없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유진은 한 손에 화분을 쥐고 엉거주춤 몸을 굽혀 손으로 구두를 한 짝씩 벗었다. 혜준은 어물쩍거리는 유진을 지나쳐 빠르게 손을 씻고 침대 위에 널브러진 잠옷을 집어 옷장에 던져 넣었다. 그나마 고모가 시시때때로 방 정리를 해준 게 다행이었다. 식탁에 화분을 내려놓던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유진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혜준을 바라보았다. 잠옷 귀엽네요. 저놈의 주둥이, 혜준은 욕을 입안으로 삼켰다. 얼굴이 조금 뜨거웠다.
혜준은 유진에게서 빠르게 등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유진 한씨, 손부터 씻어요. 옷장 문을 다시 열고 유진의 코트를 걸만한 옷걸이가 있는지 빠르게 훑었다. 혜준이 두꺼운 옷걸이와 새 수건을 찾아들었을 때였다.
“이혜준씨,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데요?”
저놈의 입, 입, 입. 그런 치부는 좀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게 예의 아닌가?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 다 오셨군, 혜준은 투덜거리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아니, 근데 수도꼭지에서 물이 샌다고? 파이프가 아니라?
“수도꼭지에서도 물이 새요?”
“네. 저 새 수건 하나만 주시면 안 될까요?"
유진이 손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화장실 한가운데 서서 말했다. 혜준이 쓰던 수건은 예의상 차마 사용하지 못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욕실 슬리퍼를 눌러 신고 화장실을 꽉 채우고 서 있는 유진이 조금 우스워 보여서, 혜준은 기분이 살짝 나아졌다. 유진의 큰 덩치가 새삼스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자, 여기 수건이요. 머리도 좀 터시죠. 코트는 이리 주고요.”
아이참, 오늘 이혜준씨 보려고 머리에 공들였는데. 혜준은 유진이 하는 말을 반쯤 걸러 듣기로 마음먹었다.
유진의 코트를 옷장 문고리에 걸어놓았다. 코트가 너무 길어서 밑부분이 바닥에 그대로 끌렸다. 다 쓴 수건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뒤를 돌아보자 가만히 서서 방을 돌아보는 유진이 보였다. 유진은 고개를 살짝 내리고 눈을 가늘게 뜬 상태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뭐 해요? 대충 쉬었으면 얼른 나가세요.”
“저, 물이라도 한잔 얻어먹으면 안 되나요? 이혜준씨 너무 차갑다.”
유진이 재빠르게 식탁 의자에 앉아 제가 가져온 화분을 끌어안았다. 봐봐요, 나는 선물도 가져온 손님이라구.
냉수 두 잔을 떠 놓고 마주 앉은 유진과 혜준은 말이 없었다. 혜준은 빨간색 화분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다음 일정을 어떻게 하지, 우선 마트에 가서 화장실을 고칠 것을 좀 사고. 오는 길에 간단한 간식을 사 올까? 유진은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곧 혜준의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아,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 저번에 벤치에서 위로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너무 어른스럽지 못했어요, 고맙게 얘기해줬는데 화나 내고.”
혜준의 생각이 며칠 전 밤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그날 왜 유진 한에게 연락했더라. 고모가 훌쩍이면서 고모부의 문자를 보여줬고, 마리랑 고모부가 내 집으로 온다고 했었다. ‘우리 가족’이 이야기하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었지. 속이 쓰렸다. 나는 ‘가족’이 아닌 거야? 혜준의 얼굴이 더 어두워지자 유진은 도르륵 눈을 굴리다가 얼른 다른 화제로 주의를 돌렸다.
“나 좀 배고픈데.”
혜준이 눈을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보고 밥 차리라고? 혜준의 얼굴이 험악해지자 유진이 말을 더듬었다.
“어, 그러니까, 우리 밥 먹으러 나갈래요? 아직 식사 안 했죠? 저번에 왜 우리 엄마가 먹고 싶어 했던 갈치조림 말이에요-”
음, 이게 아닌데. 유진은 혜준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고 얼른 뒷말을 삼켰다.
“그, 벤치에서 만난 날, 이혜준씨도 고민이 있어 보였는데, 내가 하나도 못 들어준 것 같아서. 같이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혜준씨,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 고민이 있긴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 늘어났지. 혜준이 냉장고 문을 열어 안을 살폈다. 배고프다는데 밥 한 끼 정도는, 한국인의 예의가 아닐까. 냉장고에는 고모가 해놓은 반찬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고모가 해준 반찬을 먹기 싫었다. 유진에게는 더더욱 그 반찬을 주고 싶지 않았다. 혜준의 치부이자 약점이니까.
“안 돼요.”
유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돼요? 그냥 밥 한 끼인데?
“지금 유진 한씨랑 밥 먹는 모습이 보여져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요. 감사원이 나를 아주 잡아먹으려 들걸요."
그럼? 유진이 조금 희망에 차서 혜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바쁜데. 혜준은 유진을 흘겨보면서 냉장고 문을 쾅 닫았다. 혜준의 생각이 직장으로 넘어갔다. 당장 월요일부터 감사원에게 얼마나 시달리게 될지. 게다가 채이헌 국장은 뭐에 정신이 나갔는지 눈이 벌건 채로 혜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돌아다녔다. 고모네고 동료들이고, 직장이고 집이고 혜준의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었다. 외로웠다. 그리고 충동적이었다.
나가죠. 장 보러. 차 가져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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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유진혜준이 찐이라니ㅠㅠ 그냥 잘 수 없지!
머니게임 과몰입집착광공러는 유진혜준이 몇 달 간격으로 몇 번 만나는지 세고 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고모, 고모부, 마리가 혜준이 집을 강탈하여 유진 한을 만나게 해 준 날이 2020년 02월 26일 수요일이고,
조 과장이 기자회견하고 이헌이 허브총리의 비밀을 알게된 날은 그 다음날 2020년 02월 27일 목요일입니다.
따라서 14.5화는 대충 2020년 02월 29일 토요일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