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가을의 한유진

닻 (https://www.dmitory.com/maker/116402878)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9시를 딱 10분 남긴 때였다. 한일 통화 스와프 관련 전망을 담은 간단한 페이퍼를 내일 아침까지 내놓으라는 국장의 지시가 국금과 사무실에 떨어진 것이.

  "한일 통화 스와프라니. 언제적 얘기야."

  혜준의 책상 파티션에 기대어 선 수종이 혀를 끌끌 찼다. 

  "그거는 진짜 아예 경제논리로 접근이 안 되는 이슌데. 아소 다로가 2017년에 뭐라 그랬어. 한국에 빌려준 돈은 못 받을지도 모른다, 이랬잖아. 그게 할 소리냐고. 지금도 걸핏하면 소녀상 가지고 난리, 독도 가지고 난리. 걔네는 이게, 어?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요, 우리 하고는. 말이 안 통하는 애들이야."

  손에 쥔 야구공으로 혜준의 파티션 위를 탁탁 두드리며 고개를 젓는 수종의 뒤로 김은애 주무관이 다가왔다.

  "근데, 금통위 위원들은 왜 갑자기 모인다는 거예요? 정식 회의는 아니라면서요."
  "낸들 압니까. 또 무슨 중대 발표가 있으려고 그러나……."
  "하여간에 그놈의 주 52시간 제도는 도대체 어디서 지켜지는 거야. 고용노동부?"
  "인간적으로 거기는 언급하지 맙시다. 업무강도 뻔히들 알면서." 

  스위스에서 열린 BIS 정례 회의에 참석했던 한국은행 총재가 내일 오전 귀국 예정이었다. 무슨 이야깃거리가 있는지 한은 총재와 금융위원장, 그리고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몇이 참석한다는 오찬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 두시간 가량의 식사 겸 회의를 위해 내일 아침까지 준비되어야 하는 보고서 몇 종이 기재부 몇몇 국·과에 골고루 뿌려졌고, 그 중 국금과에 떨어진 몫이 혜준의 앞으로 배당되었다. 연초 혜준이 작성해 올린 G10 통화 스와프 관련 전략 보고서가 국장의 마음에 썩 들었던 탓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국정감사 기간 동안 쏟아져 들어왔던 국회 요구자료 응대로 고스란히 밀려버린 개인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최근 야근을 밥 먹듯이 한 직원들 중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은 탓이었다.

  "하여튼 이 사무관 고생해요. 너무 막, 열심히 하지는 말고. 부질없어, 그거 다."
  "오늘은 모처럼 다같이 9시 전에 퇴근 좀 해보나 했더니, 이게 또 이렇게 되네. 내일 봐요, 혜준씨."

  네. 들어가세요. 혜준이 짧게 인사했다. 수종과 은애, 그리고 몇몇 다른 과 사람들까지 대여섯명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나자 사무실엔 3분의 1쯤이 남았다. 그 중 혜준을 포함해 다섯명이 새벽까지 숫자와 씨름할 예정이었다. 혜준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연락처를 켜면 제일 위에 고정되어 있는 한유진, 세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밤 11시를 넘겨 퇴근한 혜준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끝이 덜 마른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차게 달라붙어 왔지만 더 서 있을 기운이 없었다. 몽롱한 와중에도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저녁 무렵쯤 밥은 먹고 일을 하는 거냐고 메시지를 보냈던 그가 자신의 퇴근여부를 궁금해하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신호음이 미처 세번 울리기도 전에 '이제 들어갔어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오늘도 늦었네요.
  '이 정도면 많이 늦은 건 아니예요.'
  -맙소사. 

  한바탕 잔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혜준이 선수를 쳤다. 

  '내일은 좀 더 일찍 퇴근할 것 같아요. 일 마무리가 많이 되어 가서.'
  -그럼 내일 저녁에 잠깐 시간 낼 수 있어요?

  그리고 유진에게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보여주고 싶은 거라니. 혜준은 잠이 조금 달아났다.

  '뭔데요?'
  -아직은 비밀이예요. 피곤할텐데 얼른 자요.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은데요.'
  -오, 이런.

  혜준의 말에 유진이 가볍게 웃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기분좋게 낮은 목소리와 잔잔한 웃음소리를 더 듣다가 혜준은 잠이 들었었다. 잘자요, 이혜준씨. 내일 봐요. 하는 인사를 끝으로.

  그렇게 잡은 약속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지키지 못 하게 되었다. 또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조금 막막해진 혜준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지난주 수요일, 갑자기 들어온 의원 요구자료로 또 예정에 없던 야근을 하게 된 혜준이 보낸 메시지에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온 유진이 볼멘소리를 했었다.

  -이혜준씨는 매일 바쁘네요. 아니면 혹시, 바쁜 척 하는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예요.'
  -이혜준씨가 일 핑계 대고 나 피하나 싶어서.
  '내가 지난 한달 동안 주말마다 만난 사람은 누구죠?'
  -주말은 원래 쉬는 날이예요.
  '평일은 원래 일하는 날이예요.'
  -맙소사. 이혜준씨 한국 정부에 세뇌당한 거예요. 이혜준씨는 평일 6시 이후로 쉴 권리가 있어요.

  한국 정부는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는게 습관인가. 주 52시간 근무라더니 이제 겨우 수요일인데 이혜준이 이번주에 일한 시간만 벌써 40시간이 다 되어 가잖아요? 

  재회한 날로부터 한달하고 일주일. 그 사이 혜준은 네번의 주말 중 꼬박 6일을 유진과 만났다. 물론 이건 주말만을 짚었을 때의 얘기였다. 출근 전, 퇴근 후 잠깐씩이라도 얼굴을 마주한 날들까지 모두 세려면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그러니까 거의 하루 걸러 한번씩 유진을 만난 셈이었다. 가을, 국정감사와 예결위의 계절. 그 바쁜 와중에.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유진과의 만남이 혜준을 육체적으로 힘들게 했느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었다. 주말은 원래 쉬는 날이고 평일 역시 6시 이후로 이혜준은 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한유진에게 '그럼 내가 한유진씨를 만나는 게 휴식인가요?' 라고 묻지 않은 건 실제로 그런 그와의 시간들이 강도높은 격무에 지친 혜준을 꽤나 리프레시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피아노 위의 새 악보. 식탁 위의 꽃. 책상 위의 뮤지컬 프로그램북. 냉장고 안의 잘 밀봉된 신선한 샐러드나 유기농 밀프렙들은 모두 한유진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살뜰하기 그지없는 것들 사이에서 혜준은 편안함과 물설음을 동시에 느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새벽까지 이어진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날이었다. 지금 집에 돌아가 바로 잠들어도 출근 시간을 맞추려면 잘 수 있는 시간이 4시간, 아니 3시간쯤 되나. 그럼 운전을 하지 말고 택시를 타고 갔다가 택시를 타고 오는 게 낫지 않을까. 혜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청사 건물을 나서자마자 보인 건 그런 혜준을 기다리고 있던 한유진이었다. 30분전 쯤까지 메시지를 주고 받은 게 떠올랐다. 대체 언제 들어가냐는 말에 이제 곧 들어가요. 정말이예요. 하고 답했던 것도.

  눈 좀 붙이고 있어요. 도착하면 얘기할게요. 다소 놀란 얼굴의 혜준을 제 차에 태워 자연스럽게 혜준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한 유진이 혜준에게 말했다.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시트에 순식간에 몸이 노곤해져 가는 와중에 혜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내려감는 대신 무언가에 골몰한 얼굴로 유진에게 말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뭐가요?'
  '이런 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왜요?'

  혜준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문이어서 혜준은 순간 당황했다. 그야…

  불공평하니까요. 라고 답하려던 혜준은 그 대답을 입 안으로 삼켰다. 적색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유진이 고개를 돌려 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보며 혜준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로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불빛이 잠에 든 이 시간에, 오로지 자신 하나를 위해 운전기사를 자처한 이 남자의 앞에서 공평과 불공평을 논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이혜준씨?'
  '…아니예요.'

  대답이 없는 혜준에게 유진이 되물음과 동시에 신호등이 색을 바꿨다. 유진이 다시 핸들을 잡았고 혜준은 덕분에 답을 피할 수 있었다. 좌석 깊숙이 몸을 묻은 혜준이 유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뮤지컬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아침이면 일어났냐는 인사를, 저녁이면 퇴근했냐는 인사를 주고 받는 남자. 불과 한달 남짓 전까지만 해도 소식을 몰랐던, 그리고 그보다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언젠가 제 멱살을 쥐어잡았던, 그래놓고는 또 불쑥 저 대신 총을 맞았던, 한유진.

  편안한과 낯섦이 공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모순적이 표현이 아닐 수 없었으나, 그것 외에는 유진에 대한 혜준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혜준이 유진에게서 느끼는 편안함의 8할은 한유진 자체로부터 나왔다. 유진은 처음부터 혜준의 앞에서 자신의 사적 영역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재회 후에도 그런 점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으므로 혜준은 빠르게 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부모의 부재, 궁핍했던 소년기, 그틈에서 놓을 수 밖에 없었던 것들, 얼핏 그들의 편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사람들 틈에서 느껴야했던 고독까지.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 혜준이 속으로 놀랄 정도로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았고 그래서 한유진은 신기할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혜준과 유대를 형성했다. 가장 처음 만났던 날부터 사라지기 전까지, 정인은행 문제와 그 외 일련의 사건들에서 늘 혜준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던 유진 한과는 아예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준이 그런 유진과의 관계를 마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 하고 시시때때로 물설음을 느끼는 것은 전적으로 혜준 자신 때문이었다. 

  돌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엄마, 혜준의 나이 고작 열살에 그를 등져버린 아버지,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도 끝내 혜준을 진짜 식구의 범주에는 포함시켜 주지 않았던 고모네. 열살 이후로 혜준의 삶에는 단 한순간도 무언가가 풍족했던 적이 없었다. 돈이 부족했고, 사랑과 보살핌은 얕았으며, 시간이 없었다. 물질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혜준에게 여유는 사치였다. 그래서 혜준은 살면서 한번도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본 적이 없었다. 

  옳고 그름에 상대적인 것이 없다 믿었고 변화와 개혁을 겁내본 적도 없었지만 어떤 이유로든 과거의 아버지처럼 스스로를 무너뜨릴 무언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늘 두렵고 조심스러웠던 혜준에게 한유진은 예외 그 자체였다. 

  '아니 그냥 거기에 사람이 있다. 그런 인식까지는 해 줘야 적어도 한 인간에 대한 예의인거지.'
  '사람의 감정이야. 감정이 움직이고, 안 움직이는 게, 꼭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런 판단에 따르는 게 아니라고.'

  혜준은 이따금씩 마리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곤 했다. 함께 보낸 시간의 힘이었을까. 동갑내기 사촌은 흔들리던 제 마음을 제일 먼저 눈치챈 사람이었다.

  그 밤, 걸려온 익명의 전화가 유진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전화를 받은 건 한유진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걸 혜준이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유진씨, 하고 이름을 부르던 순간에는, 혜준은 유진이 서 있는 자리가 제 마음 귀퉁이 한 곳이라는 것 또한 받아들였다. 1년이 넘는 짧지 않은 기다림 속에 그 감정은 한뼘어치만큼 자랐고 그래서 한유진을 다시 만났을 때, 혜준은 기뻤다. 

  다만 혜준은 시시때때로 제 안에서 고개를 드는 이 간지럽고 애틋한 낯선 감정에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첫발을 내딛은지 고작 한달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혜준의 얼굴에 유진이 예매해둔 영화표를 취소하고 혜준의 집에서 함께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던 어느 일요일. 유진이 자신의 얼굴에 붉은 와인잔을 비춰보던, 다소 무례했던 그 첫만남 뒤에 비창 3악장에 맺힌 축축하고 눈물 냄새가 나는 아픈 기억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된 날. 무어라 위로할 말을 찾던 그녀의 흰 손가락 위로 그의 손이 겹쳐지고,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그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만 것은 그런 어색함 때문이었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어질어질하고 뱃 속이 간지러웠다. 짧게 정적이 흘렀고, 한유진은 이내 어색하지 않게 웃었지만 혜준은 금세 미안해졌다. 저울에 달아본 것도 아닌데 자명해보이는 감정의 무게 차이. 미묘하게 느린,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자신이.

  유진은 그런 혜준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있는 듯 했다. 재회한 첫날 키스해도 되냐고 물었던 남자는 조급해하지 않고 혜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혜준은 재촉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더더욱 부채감을 느꼈다. 이 불공평한 만남, 자신 쪽으로 한뼘쯤 더 기울어 있는 불공평한 관계에.

  '고마워요.'

  아파트 입구 바로 앞에 세워진 차에서 내린 혜준이 운전석에 앉은 유진에게 말했다. 따라 내리려다 혜준의 만류로 자리를 지킨 유진이 차창을 내린 채 그런 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혜준씨 차 두고 왔으니까, 내일 아침에 내가 다시,'
  '아침엔 택시 탈게요. 오지 말아요. 피곤하잖아요.'

  내일 아침에 다시 와서 출근길을 책임지겠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유진의 말을 혜준이 가로막았다. 유진이 그런 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심히 들어가요.'

  인사를 건네고 단지 입구를 향해 돌아서려는 혜준을 유진의 부름이 멈춰세웠다.

  '이혜준씨.'

  돌아서자 차에서 내린 유진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왜…'

  왜 그러느냐는 혜준의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코 앞으로 성큼 다가선 유진이 제 목에 걸려있던 머플러를 들어 혜준의 목에 둘렀다. 

  '늦게 다니니까, 따뜻하게 하고 다녀요.'

  덧붙여진 목소리가 체온이 묻어나는 목도리만큼이나 따뜻해 혜준은 어쩐지 목이 메였다. 

  '…고마워요.'

  그녀의 대답에 유진이 또 말없이 혜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혜준씨.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이름을 불렀다. 혜준이 대답 대신 그와 눈을 맞추자 가볍게 웃은 유진이 물었다.

  '이혜준씨는 우리가 어떤 사이라고 생각해요?'

  …네?

  혜준의 움직임이 그대로 멎었다. 청사에서 집으로 오기까지, 차 속에서 내가 생각을 너무 깊이 한 나머지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라도 한 걸까. 혜준이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사이 그런 혜준의 표정을 살핀 유진이 다시 손을 들어 혜준의 목에 둘러준 목도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여몄다.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유진은 한 걸음만 더 가까워지면 혜준의 날숨이 그의 목 언저리에 스칠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 했다.

  '나는 이혜준씨보다 시간이 많으니까.'

  마치 꿈결처럼.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말아요.'  

  한유진이 웃었다. 그날밤, 혜준은 결국 잠을 설쳤다.





  "이혜준 사무관."

  크게 한숨을 한번 내쉰 혜준이 막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참이었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금융협력과의 안혜진 서기관이 혜준을 찾았다. 

  "국금과 페이퍼 담당이죠? 잠깐 회의 좀 할까요."
  "아, 네."

  안 서기관이 사무실 끝의 회의실로 고갯짓을 했다. 이미 몇몇 직원들이 그리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미안해요. 급한 보고서가 생겨서 늦어요. 오늘 보기 힘들 것 같아요. 내일 연락할게요.]

  오타가 나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할만큼 빠르게 메시지를 입력한 혜준이 업무수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부터 어깨가 뻐근해왔다.



*



  다 됐다.

  완료된 보고서를 이메일로 보내고 시계를 확인하자 1시 반이 조금 넘은 참이었다. 20분 전쯤 먼저 가보겠단 인사와 함께 사무실을 나선 김 사무관이 혜준을 제외한 마지막 퇴근자였으니, 본의 아니게 또 국제금융국의 마지막 불을 끄게 된 혜준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뒷목이 결리는 느낌에 몇번 힘주어 주무른 혜준이 곧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 타야지. 이 정신으로 운전은 도저히 안 되겠다. 가방을 멘 혜준이 마지막으로 책상 구석에 방치해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보니 휴대폰이 여태 조용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진작 전화가 오고도 남았을텐데. 혹시 갑자기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해서 화라도 난 걸까. 혜준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대기 화면을 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상단에 보이는 부재중 전화 아이콘이.

  어?

  언제였지. 사무실을 나서서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한 혜준이 잠금화면을 해제했다. 부재중 전화가 7통. 메시지가 6개. 발신인은 전부 유진이었다. 뭐지? 혜준은 제가 탄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것도 잊은 채 우뚝 멈추었다. 

  아무리 집중을 했다 쳐도 어떻게 이걸 몰랐을까 생각하다가 혜준은 뒤늦게 통신사 아이콘 옆에 자리잡은 방해금지 표시를 발견했다. 3시 무렵에 있었던 보고회에 들어가면서 눌러둔 걸 해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혜준이 1층 버튼을 누르고 메신저를 열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혜준은 조금 전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전화 안 받네요. 바쁜가요?]
  [오늘 보기 힘든 거죠? 저녁은 챙겨먹고 일해요.]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확인하면 전화줘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이혜준씨]
  [많이 바쁜가 봐요. 끝나면 전화줘요.]

  [미안해요. 급한 보고서가 생겨서 늦어요. 오늘 보기 힘들 것 같아요. 내일 연락할게요.]

  혜준은 유진에게서 온 여섯개의 메시지와, 발송 버튼이 눌리지 않아 작성창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제 메시지를 발견했다. 맙소사. 아득한 기분에 혜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혜준이 뛰듯이 내렸다. 귓가에 가져다댄 휴대폰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한번. 두번. 3초도 채 되지 않을 그 시간이 지난 3시간 처럼 느껴졌다. 

  -여보세요?

  세번째 신호음이 끝나기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숨이 탁 트인 혜준이 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유진씨, 미안해요. 그게…"

  그리고 서둘러 이유를 설명하려던 혜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걸음도. 입술도.

  청사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 때문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아서는, 어느새 이혜준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남자. 한유진.

  혜준이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을 떨구는 사이 그를 발견한 유진이 성큼 다가왔다.

  "늦었네요."

  그가 인사를 건네며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얼굴에 혜준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왜 여기 있어요?"
  "전화를 하도 안 받길래. 미안한데, 사무실로 전화 했었어요. 아, 누군지는 말 안 했으니까 괜한 걱정은 안 해도 되고. 전화 받은 사람이 이혜준씨가 회의중이라고 해서. 오늘도 늦는구나, 했죠."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화났어요?"
  "내가요?"
  "지금 이혜준씨 얼굴, 화난 사람 같은데."

  유진의 말에 혜준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속이 끓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휴대폰이… 알림이 꺼져 있는 걸 몰랐어요. 메시지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내가 회의에 들어가면서 급하게 하다가 미처 버튼을 다 안 눌렀는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다다다 말을 쏟아내던 혜준의 입술이 천천히 멎었다. 빨갛게 얼어있는 유진의 귀끝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11월 중순의 밤 공기는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차가워진지 오래였다. 제 뺨에 닿는 바람이 차갑고 따가워서, 혜준은 순식간에 속상해졌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혜준이 물었다. 조금 전보다 누그러진 목소리에 유진이 조금 긴장이 풀린 얼굴을 했다. 한… 두시간 정도 됐나. 언제 나올지를 몰라서. 전화도… 안 받고. 그의 대답을 듣는 중에도 여전히 그의 귓가에 시선을 두고 있던 혜준이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하얀 손끝이 빨갛게 얼어있는 유진의 귓가로 향했다. 그런 혜준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유진이 조금 몸을 숙였다.

  "추웠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오는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손끝에 닿은 피부가 얼음처럼 차디찬 탓에 혜준의 눈썹 사이로 얇게 주름이 잡혔다. 높이를 맞춰주느라 조금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 유진이 그런 혜준의 얼굴을 홀린듯이 바라보고 있는 걸, 혜준은 몰랐다.

  혜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유진이 그런 혜준의 손을 감싸쥐었다. 마디 하나는 족히 차이가 날 것 같은 커다란 손에 혜준의 작은 손이 폭 감싸였다.

  "이혜준씨."
  "미안해요. 한번만 확인했어도 됐을텐데. 내일 회의에 들어갈 걸 오늘 갑자기 내놓으라고 하는 바람에,"
  "지금 어떤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지 알아요?"

  뭐라구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혜준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혜준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는 유진의 얼굴에 미소가 완연했다. 혜준이 멍한 얼굴로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이혜준."

  유진이 혜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혜준의 손끝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 잡고 있던 그의 살갗을 놓고 내려가려는 걸 유진이 다시 그러쥐었다. 작은 손을 당겨 제 뺨에 닿게 만든 한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대답 안 했던 질문,"

  손바닥의 여린 살갗에 닿은 남자의 뺨이 차가웠다. 그러나 혜준은 손끝에서 확확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다시 물을게요."

  유진의 입술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뺨이나 턱의 움직임이 손 안에 생생했다. 

  "우리가 어떤 사이라고 생각해요?"

  유진이 웃으며 물었다. 아. 익숙한 질문에 혜준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그러나 선뜻 답을 내놓지는 못 했다.

  "아직도 대답하기 어려운가요?"

  그리고 이제 한유진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그럼 다른 걸로."

  유진이 잡고 있던 혜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천천히 거두어진 혜준의 손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전에, 한유진의 두 손이 혜준의 양 팔을 잡고 살며시 당겼다. 한 걸음만큼이 더 가까워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제 겨우 한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혜준씨."

  그가 혜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두 사람의 시선은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혜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키스해도 되나요?"

  작게 달싹인 혜준의 입술 새로 참았던 한숨이 터졌다. 재촉하는 법 없이 혜준을 기다렸던 한유진은 이번에도 가만히 혜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폐부를 가득 채운 이 마음이 지금 이 순간에 갑자기 자라난 건지, 아니면 벌써 자라있던 것을 여태 몰랐던 건지 혜준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어차피 그런 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혜준이 대답 대신 두 손으로 그의 코트 자락을 말아쥐었다. 발꿈치가 들리는 것을 신호로 그의 단단한 두 팔이 혜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서로를 담아내느라 한 틈도 쉬지 못 하고 있던 눈꺼풀이 사르륵 내려감겼다. 마침내 부딪힌 입술이 뜨거워, 11월의 찬 바람 같은 건 순식간에 잊혀졌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오가는 서로의 호흡을 삼키며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이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 tory_1 2020.03.15 19:32

    선생님..어느 방향에 계시는 지 알려주셔야 절을 올리죠...ㅠㅠ 저는 다 이루었습니다. 하..여한이 없네요.

  • tory_2 2020.03.15 19:37
    와이씨 ㅜㅜ 혜준아 ㅜㅜ 행복해 ㅜㅜㅠ 고민말고 연애해 ㅜㅠ 그리고 결혼해 ㅜㅜㅜ 작까님 계속 유진혜준이야기 써주세여 ㅠㅠㅠ 넘 섬세해요 ㅜㅜ
  • tory_3 2020.03.15 20:05

    와 뭐지뭐지 너무너무 좋아서 숨 참고 봤어요!!!!!!! 

    다음편도 계속 써주면 안될까요?ㅠㅠㅠㅠ 엉엉ㅠㅠㅠ 질척ㅠ

  • tory_4 2020.03.15 20:05
    키스해(짝) 키스해(짝) ㅠㅠㅠㅠㅠㅠ 야근은 극혐인데 혜준이 기다리는 유진이 너무 좋잖아ㅠㅠㅠㅠㅠㅠㅠ
  • tory_18 2020.03.16 21:17
    키스해짝 키스해짝222222
  • tory_5 2020.03.15 20:07

    너무너무 예뻐요 유진혜준ㅜㅠ 선생님 글이 정말 대박이네요... 행복합니다

  • tory_6 2020.03.15 20:17
    동서남북으로 절 올립니다 선생님
  • tory_7 2020.03.15 20:19

    중간중간 나오는 용어들이 예사롭지 않네요. 혹시 공무원 선생님이신가요? 뭐가 됐든, 감사합니다ㅠ

  • tory_8 2020.03.15 20:23
    미쳤슴다... 생님.....너무나....완벽해여.....
  • tory_9 2020.03.15 20:27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04/03 20:46:14)
  • tory_10 2020.03.15 21:41
    너무너무 좋아요ㅎㅎ 딱 제가 생각하던 유진혜준 결말이에요ㅎㅎ
  • tory_11 2020.03.15 22:16
    여기 계속 누워있어야겠어요ㅠㅠ 슨생님 감사합니다
  • tory_12 2020.03.15 23:19
    아아아 선생님.
    키스는 모든 것의 시작이니까요.. ㅠㅠㅠ
    유진의 빨간 귀만큼 제 맘도 붉게 물들고 있네요.
    그럼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tory_13 2020.03.16 00:47
    혜준이의 환경과 성격으로 인해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는 거랑 그에 따른 갈등이 드라마 속 혜준이 라면 진짜 이렇겠구나 싶어서 좋았어. 빨리 읽어 내려가는 게 아쉬워서 차근차근 읽었네. 선생님 다음편도 읽고 싶습니다 ㅠㅠ
  • tory_14 2020.03.16 01:43
    ㅠㅠ너무좋아요
  • tory_15 2020.03.16 08:37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와 진짜ㅠㅠㅠ 내가 맘졸이면서 봤자나여ㅠㅠㅠㅠㅠ
  • tory_16 2020.03.16 09:18
    하..선생님...어떻게 이렇게 글을 쓰세요 진짜 유진은 유진 혜준은 혜준스럽고 한문장 한문장 제가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바람도 부는것 같고 엉엉 선생님 선생님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 tory_17 2020.03.16 11:03
    오늘행복한하루가되려나보다.... 아침부터 좋은글읽고갑니댜..
  • tory_19 2020.03.17 23:56
    ㅠㅠㅠㅠㅠㅠㅠㅠㅠ
  • tory_20 2020.03.19 16:52
    선생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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