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거는 두렵지 않아요. 다른 거하고 마찬가지로 제 스타일대로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엄마라는 게 참 그렇더라고요. 선생님은 남자라서 잘 모르시겠지만. 어린 자식을 두고 차마 죽을 수 없는 게 엄마더라고요. 선생님, 제가 자식이 셋인데.. 둘은 정상적으로 자라서 성인이 됐는데, 얘 하나만 딱 여덟살에서 안 크고 그대로예요. 제 마음속에서는.
선생님 자랄 때 부모님 두 분 다 계셨나요. 두 분 다 좋은 분이셨죠? 학교 다닐 때 친구는 많았나요. 가출한 적 있어요? 밥은 잘 먹었나요. 밥을 먹을 때마다 누군가에게 미안하단 마음이 든 적 있나요. 포근한 침대에서 자는 내내 꿈 속에서 엉엉 운 적은요? 저는 입양아예요. 여섯살 때 버려졌고, 여덟살 때 입양 됐어요. 친엄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어차피 저는 그 사람의 아이가 아니고, 그 사람도 제 엄마가 아니니까요. 가난했을 거야, 불행했을 거야,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나에게 생명을 준 그 사람이 어딘가에서 굶고 있을 거란 생각. 아마 난 불쌍하다고 생각했나봐요. 자기 자식을 나무 밑에 묶어놓고 도망가버린 그 사람이. 근데 오늘 만났어요. 실체를 보니까 밉더라고요. '어떻게 자기 자식을 버리고 도망가니, 이 여자야.' 그렇게 소리 지르고 때리고 싶어서 도망쳤어요.
확실히 기억나는 건, 단팥빵. 천천히 먹으면 엄마가 올 거라 그래서 아주 아주 천천히 먹었어요. 반도 넘게 먹었는데 엄마가 안 와서 될 수 있는 한 더 작게 먹으려고 노력했죠. 그 때쯤엔 나도 알았던 것 같아요. 엄마가 안 온다는 거. 어쩌면 처음부터 알았던 것 같기도 해요. 자물쇠를 잠그는 순간, 오늘은 다른 날하고 다르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팥빵을 천천히 먹는 것 밖에 없어서 작게, 더 작게 먹으려고 노력했는데... 더 이상 작게 쪼갤 수가 없어서 그 때부터 울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내가 더 작게 쪼개야 엄마를 더 기다릴 수가 있는데. 근데 오늘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내가 그렇게 기다렸던 엄마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장면. 화가 나요. 너무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나를 숨막히게 사랑해주셨던 분은 내 앞에서 죽어가고, 내 아이 그 아이를 데리고 빨리 떠나야 하는데! ...
제가 왜 수진씨를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저희 아버지는 너무 너무 바쁜 동네 소아과 의사셨는데, 누가 부르면 왕진까지 다니시고 급하면 휴일에 문 열고. 그리고 저희 집이 병원 꼭대기에 있어서 매 끼니를 집에서 드셨어요. 아버지는 행복하셨죠. 천직이셨으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불행하셨어요. 어머니는 여행 좋아하시고 모험을 하고 싶어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끝내 소원이었던 세계여행을 못하셨어요. 암 진단 받으시고 너무 억울해서 이혼하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여자를 좋아하봐요. 살아온 나이가 있고, 가난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자기 인생이 있는 여자. 제가 절대 불행하게 만들 수 없는 여자.
나는 사람을 죽였어. 짐승같은 남자를 죽였어. 왜 너를 낳았을까. 나는 겨우 열아홉이었는데. 아버지 할머니 고모 다 낳지 말라고 그랬는데. 네가 뱃속에 있는 느낌이 좋았어. 네가 생긴 후론 한 번도 외롭다고 느낀 적이 없지. 집에 있으면 아버지가 하도 잔소리를 해대서 백일이 지나 집을 나왔어. 친구 집에도 있다가, 시설에도 갔다가, 비닐하우스에서도 살고. 솔직히 진짜 힘들더라. 애기는 어떻게 키우는 건지 뭘 알아야지. 그냥 어딜 가든 널 데리고 다녔어. 그래서 평범하게 TV를 보면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준 그 인간이 눈물나게 고마웠어. 세상에 우리한테 그런 걸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술을 마시면 때리긴 했지만 세상에 공짜밥은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그 놈한테 맞아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 눈이 돌아갔어. 널 데리고 곧바로 집을 나왔는데 붙잡혀서 어마어마하게 맞았지.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다시는 나가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고. 결심했어. 이제 끝이다. 다시는 이런 꼴 당하지 않겠다. 그 남자 죽인 거 후회하지 않아. 안 그랬으면 다음 번엔 너랑 내가 죽었을 테니까. 한 가지 후회되는 게 있다면 좀 더 빨리 죽이지 못한 거. 그랬더라면 내가 너한테 그런 꼴을 보이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나선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어. 붙잡히지 않을리가 없지. 되는 대로 죽이고 나왔으니까. 차라리 너를 꼬옥 껴안고 바다로 들어갈까 너랑 함께라면 난 무서울 것 같지도 않았어. 널 두고 가는 거라면 몰라도. 나는 그 날 죽었어. 한 발짝, 한 발짝. 하지만 너는 살아야지. 널 버린 게 아니야. 부끄러운 내 삶에서 널 내보낸 거야. 내 아이를 다른 삶으로 날아가게 하고 싶어서... TV에서 너를 본 순간, 갑자기 누가 막 뒤에서 떠미는 것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밥도 막 먹고 운동도 하고 일도 하고. 어쩌면 다시 엄마가 되어야 할지 모르니까. 혹시 내가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런 마음으로 27년간 여기서 머리를 잘랐는데.. 어느날 네가 윤복이 손을 잡고 나타난 거야. 너랑 네 아이 내 품에서 그렇게 몇 밤을 따뜻하게 먹이고 재우려고 내가 여기 살았나보다. 난 여한이 없다. 이제 떠나도 되겠지. 나도 다른 삶으로 건너 가도 되겠지?
으아니 볼 땐 몰랐는데 수진맘 대사 엄청 길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