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문장이 너무 예뻐서 필사하고 싶었던 구절 모음: https://www.dmitory.com/garden/112907685


문장이 너무 예뻐서 필사하고 싶었던 구절 모음 2: https://www.dmitory.com/garden/158442138


외로움에 대한 구절들 모아보자https://www.dmitory.com/garden/113113510







[페스트 / 알베르 카뮈]

도시 자체는 솔직히 말해 볼품이 없다. 평온한 외관 때문인지 이 도시가 수많은 다른 상업 도시들과 어떻게 다른지 여러 차원에서 알아보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비둘기 없고 나무 없고 정원 없는 도시, 새들의 날갯짓 소리도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한마디로 말해서 특징이 없는 장소를 어떻게 상상하도록 한단 말인가. 이곳에서 계절의 변화는 단지 하늘에서만 나타난다. 봄은 쾌적한 공기나 노점상들이 교외에서 따 오는 꽃 바구니들로 자신의 도착을 알릴 뿐이다. 봄이란 장에다 내다 파는 것이다. 여름 내내 태양이 바싹 마른 집들을 태워 버릴 듯 내리쬐면, 집집마다 벽들은 칙칙한 재들로 뒤덮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덧문을 닫아걸고 그 그늘 안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 반면에 가을이 되면 쏟아지는 비에 진흙탕으로 온통 난리가 난다. 화창한 날은 겨울에나 비로소 찾아온다.

 

 

아픈 사람은 온정을 필요로 하고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 하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오랑에서는 극단적인 날씨, 이곳에서 사람들이 다루는 사업의 중요성, 보잘것없는 도시 환경, 짧은 석양, 오락거리들의 수준 등 모든 상황이 건강할 것을 요구한다. 아픈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자신이 정말 혼자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니 전 주민이 어음이니 뱃짐 증권이니 빚 차감 액수니 하며 카페에서 또는 전화로 떠들어 대는 바로 그 시각에, 더위로 이글거리는 수많은 벽돌들이 겹겹이 쌓인 담장 뒤로 마치 덫에 걸린 짐승인 양 죽어 가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아무리 현대적인 곳이라 할지라도 죽음이 이렇듯 메마른 장소에 갑자기 들이닥칠 때 그로 인해서 있을 수 있는 불편함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하늘의 빛깔과 대지의 내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영향을 주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더위가 전염병을 거들리라는 것을 두려움에 떨며 깨달아 가고 있었고, 동시에 여름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음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저녁 하늘을 나는 여름 제비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도시 하늘 위로 더욱 처량하게 들렸다. 그것은 우리 고장에서 지평선을 저 멀리로 물러서게 하는 6월의 석양과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시장의 꽃들도 이제는 봉오리가 아니라 활짝 핀 채 도착했고, 아침 장사가 끝나고 나면 먼지 덮인 인도 위로 꽃잎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기력을 소진해 버린 봄이 지천으로 활짝 핀 수천의 꽃들 속에서 마지막 힘을 다하다가 페스트와 무더위라는 두 배의 무게에 눌려 서서히 뭉개지려 한다는 걸 누가 봐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우리 시민들 모두에게 있어서 먼지와 권태의 색으로 빛바랜 이 거리들, 그리고 이 여름 하늘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우리 도시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고 백여 명의 사망자와 다름없는 위협적인 의미를 가졌다. 줄기차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낮잠과 휴가에 딱 어울리는 이 순간들은 이제 더 이상 바다와 육체의 향연으로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들은 폐쇄되고 침묵하는 도시에서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시간들은 행복한 계절이 만들었던 구릿빛 광채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페스트가 만든 태양은 모든 빛을 퇴색시키고, 그것이 무엇이건 기쁨이라는 것 자체를 쫓아 버렸다.

 

 

이 부분에 관해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서술자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은 옛날이야기에서나 볼 수 있는, 예를 들어 용기를 주는 영웅이나 빛나는 무훈처럼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이야기라고는 지금 여기에 소개할 내용이 전혀 없어서 유감스럽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사실 재앙만큼이나 별 볼 일 없는 것도 없고, 엄청난 불행이란 그것이 계속된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따분하기 때문이다. 그런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페스트로 인한 끔찍한 하루하루는 모두 다 집어삼켜 버릴 듯 거침없는 기세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밑에 있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릴 듯 끊임없이 계속되는 제자리걸음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이 점은 반드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 모든 일에 영웅주의가 거론될 여지는 없어요. 정직함의 문제죠. 비웃음을 살 수도 있는 생각입니다만,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정직입니다.

 

 

어두컴컴한 항구로부터 공식 축하연의 첫 불꽃이 솟아올랐다. 도시는 어렴풋이 들리는 길고 긴 함성으로 그것을 반겼다. 리유가 한때 사랑했었고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들, 코타르, 타루, 그리고 그녀, 고인이거나 죄인인 그들 모두를 사람들은 이미 잊어버리고 있었다. 노인 말이 옳았다. 사람들은 늘 똑같았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그들의 순진함이기도 하기에, 바로 이곳에서 리유는 모든 고뇌를 뒤로하고 그들과 하나 됨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 함성이 더 고조되고 더 오래 이어져 리유가 서 있는 옥상 발치까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온갖 빛깔 꽃다발 같은 불꽃들이 점점 더 그 수를 더해 가며 하늘 높이 솟아 오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의사 리유는 침묵하는 사람들 무리에 끼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페스트에 희생당한 사람들 편에서 증언하기 위해서,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억 하나만이라도 남겨 두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재앙 한가운데서 배우는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끝을 맺으려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붕대 감기 / 윤이형]

요즘은 무엇이든 그랬다. 음식점에서는 복잡하게 이것저것 골라야 하는 단품 메뉴보다 주방장이 오늘의 특선으로 정해 내주는 오마카세 메뉴가 각광받았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큐레이터가 구색을 맞춰 선별한 과일과 채소 꾸러미를 배송해주는 서비스가 인기를 끈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을 숙고하는 데 들일 시간과 집중력과 에너지가 없었다. 타인이 선택을 하고 먹기 좋게 만들어 입에 직접 떠 넣어줘야 소비를 했다.

 

 

그날 집에 가서 어떤 사람들이 결혼한 여자들을 가리켜 하는 말들을 찾아보았어. 그 말들에 대해 내가 반발심이나 슬픔이나 분노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너는 놀랐을지도 모르겠어. 그것에 대해 무엇을 느낄 만한 자리 자체가 내 삶에는 없다는 걸 네가 이해하게 되면 더 놀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실이야.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넣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 그게 내가 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생각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들어가면 그 자리는 꽉 차버리는걸.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아무튼 윤슬은 그 뒤로 일기를 쓰는 일이 두려워졌다.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흐름의 중심을 향해 헤엄쳐 갈 나이는 지났다. 뒤로 물러나 물결에 실려 간다. 퇴적된 지층의 일부가 되어.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없으니 목소리를 높여 지분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윤슬에게도 치열하던 시간이 있었고, 이제는 힘주어 살기보다는 영화처럼 삶을 볼 시간이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속에 물들고, 싸구려 감상에 젖는 일이 윤슬은 그렇게 서글프지 않았다. 하지만 진경을 볼 때면 자꾸만 미련이 생겼다. 진경과 대화하고 있으면 나이를 잊어버리곤 했다. 진경은 아직 세상의 중심 쪽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이겠지. 삶의 어떤 부분을 놓아버리면 편한데 아직 놓지 못하는 것이다. 서울을 포기하고 지방에 내려가면서 윤슬이 받아들인 주변부의 감각, 이제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감각을 진경은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세연의 고등학교 시절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새카만 터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기 드문드문 켜져 있던 작은 등불이 진경이었다.

 

 

너는 가끔 사람들의 눈앞에서 문을 꽝꽝 소리 나게 닫아버리잖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말이야. 그럴 때마다 말하고 싶었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좀 기다려줄 순 없는 거니?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 잘못된 거야? 너는 그 사람들처럼, 나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왜 걱정하는 거니, 너는 자유롭고, 우리처럼 되지 않을 텐데. 너는 너의 삶을 잘 살 거고 나는 너의 삶을 응원할 거고 우린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참 이상해.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관계가 끝났을 텐데, 이상하게 세연이 너한테는 모질게 대하지 못하겠더라. 이해하고 싶었어, 너의 그 단호함을. 너의 편협함까지도.

 

 

— 옛날에는 너무 지겨웠는데. 세상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안 변할까, 대체 어떻게 해야 이게 변할까 싶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너무 빨라. 빨라서 어지럽고 울컥거릴 때가 많아. 그런 걸 보면 네가 하는 말들이 틀린 게 없는 것 같아. 우린 승객이었을 뿐, 그동안 이 버스에서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본 적이 없었던 거지.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스스로 운전을 할 기회가 주어진 거야. 그래서 이렇게 어지러운 거겠지. 방향 하나하나, 신호 하나하나, 승객들 한 명 한 명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니까. 세연이 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이 될 거잖아. 나는 아무 이름도 갖고 싶지 않고, 끼워달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단지, 표를 사는 법을 몰라서, 멀미가 너무 심해서, 집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아니면 그냥 길을 잃어서, 멍한 얼굴로 읽을 수 없는 노선표를 들여다보며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 자기 삶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고 외로워서 그 사람들이 울고 있을 때, 다가가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줄 거야. 그 사람들에게도 누군가가 필요하니까.

나도 그래 진경아, 세연이 중얼거렸다. 나 역시 무섭고 외로워. 버스? 이게 버스라면 나 역시 운전자는 아니야. 난 면허도 없고, 그러니 운전대를 잡을 일도 아마 없을 거야. 그건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이야. 하지만 우리 이제 어른이잖아. 언제까지나 무임승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소한의 공부는 하는 걸로 운임을 내고 싶을 뿐이야. 어떻게 운전을 하는 건지, 응급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정도는 배워둬야 운전자가 지쳤을 때 교대할 수 있잖아. 너는 네가 버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 그래서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아, 남자들에게는 하지 않는 기대를.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꿈에도 서로를 사랑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사람들 역시 은밀히 이어져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돕고 있음을, 돕지 않을 수 없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소설에서 대부분 여성인물들은 불안과 의심에 흔들린다. 인물들이 그런 것처럼, 작가 역시 시종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이슈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복잡성과 어려움을, 연대의 지난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결론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곳곳에서 주저하고 흔들리는 작가의 목소리는, 그럼에도 그 복잡성과 지난함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고심의 흔적을 드러내는 형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 구병모]

그러나 시미는 피트니스와 요가는 기본에다 국외 여행도 많이 다니며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스마트폰도 거침없이 쓰는 요즘 오십대 여성보다는 자신이 어느 모로나 뒤처졌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나이보다 좀 더 젊게 살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놓친 채 여기까지 흘러 떨어졌다는 자각이었다. 현장 영업 시절의 전투력이 빠져나가기 전에, 퇴근 후 화장을 지우기도 귀찮아하며 단칸방 이부자리에 쓰러져 리모컨 쥘 기운만 남아 채널 재핑이나 하는 대신 직장인 발레나 밴드, 화실 같은 데에 시간과 지출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삶에 투자하는, 능동적이고 활력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문신이라는 왠지 모를 고전적인 이름 대신, 타투라는 패셔너블한 명칭이 금방 입에 붙는 사람이었다면.

 


흘러넘친 끝에 고갈되었으나 일상의 바닥에 들러붙은 꿈의 침전물을 목격한 어느 날, 충동적으로 몸에 새긴 샐러맨더에 대해. 샐러맨더 한 마리를 몸 안에 키우면서, 잃었던 자신감과 의욕이 다시금 심장에 고이는 듯했던 날들에 대해. 저녁놀이 건드리고 지나간 것 같은 몸통의 그러데이션과, 그 무늬 아래 타래를 틀고 도사린 이야기들에 대해.


 

또한 시미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인 몸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에게 행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기미와 뾰루지와 모공 각화증이 있으며 투실하든지 깡말랐든지 하여간 평생 무대에 오르거나 경기장에 들어설 일 없는 일상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몸에 새긴 문신을. 거기서 조금만 더 가능하다면, 그 연령과 사회 인식상 실례를 구하기 쉽지 않더라도 시미 자신과 비슷한 오십대의 주름진 몸에 새겨진 문신의 양상을. 팽팽한 피부 위에 얹은 그림이 아무리 예뻐보았자, 고목 껍질처럼 갈라지거나 주름 속으로 선이 파묻혀 일그러진 훗날의 형상까지는 상상하기 어려웠으므로.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시미는 자신이 낳은 아이로부터 왜 스스로 물러나 있어야 하는지, 누구 좋으라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마침 그때는 불경기에 시미의 회사도 타격을 맞아 영업 실적이 침체기에 접어들어 지인의 소개로 이직을 고려하던 무렵이었다. 업무에 집중도가 하락하면서, 자연스레 아이에 대한 탐욕이 부풀었다. 세상에서는 모성이라는 명찰을 달아주는, 그런 마음이었다. 저 귀엽고 똑똑한 아이가오래 떨어져 생활했으므로 실제 똑똑한지는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나의 아이라고,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고,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 아이의 교복 셔츠를 다리고, 성적 고민도 들어주고, 좋아하는 가수나 싫어하는 반찬이나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이성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 자신의 경작지에서 싹텄다는 이유로 다소 늦은 물대기를 서두르고 나아가 수확까지 꿈꾼 그 마음을, 탐욕 아닌 다른 이름으로 에둘러 부를 방법은 없을 것이다.


 

가볍게 목례하고서 고개를 들어보니, 문신술사의 어깨 너머로 자리한 작업실이 낮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철저히 밤의 세계에 속한 공간. 열망과 증오와 그것의 찰나적 해소 같은 것들로 부풀어 오른, 영원히 셔터가 내려오지 않는 가게인 양.

언제든지 또 오셔도 됩니다.”

시미는 앞으로의 인생에 지금처럼 충동이 자신의 온몸을 구성 또는 대체할 정도로 부피가 커질 날이 다시 있을까 생각했다. 충동이 솟는다는 건, 태울 에너지가 생성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기를 바라는 열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미는 그것들이 몸 곳곳에 오래된 흔적처럼만 존재하여 가끔씩만 자신을 가볍게 흔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시미는 돌아서서 지나간 싸움과 현재의 공허가 앞으로의 날들에 드리울 그림자의 무게와 길이를 재어보았다.


 

처음 바늘이 들어갈 때 그 낯선 통각에 깜짝 놀라 시미는 하마터면 손을 잡아챌 뻔했으나 사장이 손을 단단히 쥐고 있어서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후로는 아픔에도 친숙해졌다. 온몸에 분포한 통점들이 긴 겨울잠에 들기라도 한 것처럼 아픔 대신 쾌감이 번져나가는 걸로 보아, 사람들이 오랜 옛날 병을 고치겠다고 이런저런 위험하기까지 한 방혈을 일삼았던 것도 이해가 갔다. 화인도, 그 작곡가나 다른 사람들도 이런 느낌이었으리라고 생각하면, 서로 인연이 없는 이들 간에도 기묘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만 같았다. 그 모든 것을 상처라고 섣불리 범주화할 수는 없겠으나, 상처와 흠집에 매혹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능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불가해였다.

 


부풀어 올랐던 별이 폭발하여 하늘에 산산이 흩어졌다.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고 설령 폭발음이 있었다 한들 거리를 질주하는 차량의 경적과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덮였으므로 그 모습을 시미 말고 아무도 못 본 것 같았지만, 우주가 처음 만들어질 때 저랬을까 싶을 만큼 가차 없이 부서진 별의 조각들은 하늘로 넓게 퍼져나갔다. 한 점 한 점이 신의 바늘로 놓은 흰 자수 같았다.


 

 

 

[인체모형의 밤 / 나카지마 라모]

목저택에서는 여느 때와 같은 냄새가 났다.

먼지와 곰팡이와 벌레 먹은 커튼과 엄청난 고서와 캐비닛 안에 방치된 낡은 약품. 모든 것들이 오랜 고요함 속에서 천천히 발효된 냄새. 여기밖에 없는 냄새였다.

소년은 목저택에 와서 이 향기를 맡을 때마다, 안에서 솟아오르는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감정을 느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더 이상 아무도 놀고 있지 않은 방과 후 교정. 냄새는 그때 느낀 가슴의 수런거림과 비슷한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고독은 청결하고 상쾌하다. 고독은 아무도 상처 주지 않는다. 고독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에 비하면 고독은 얼마나 따뜻한지.

 


계속 이대로 이 집에서 바다 냄새와 포푸리 향기에 둘러싸여 조용히 나이를 먹어가고 싶다. 누구도 상처 주지 않고, 그 대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고, 식물처럼 말없이. 어느 날 송진 냄새를 일순 남기고 조용히 죽어가고 싶다.

 


현대 도시에서의 아파트 생활은 프라이버시를 운운할 만큼 고상하지 않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퇴화된, 동물적인 둥지 본능에 지배되어 틀어박혀 살고 있다. 아파트의 삼중 잠금 장치 뒤는 조개껍데기 안이자 성스러운 태내이기도 하다. 이사 떡을 손에 든 타인의 갑작스런 침입을 태아인 거주인은 허락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파트에는 이라는 공간이 없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문에서 수직으로 허공을 뻗어가는 의 공간만 있을 뿐이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딸. 고깃덩이를 사더라도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수입. 가족에게 고기를 잘라서 나눠 주는 아빠. 빛나는 행복. 그것이 내게는 눈부시고 겸연쩍고 안정감이 없었다. 옛날에 텔레비전에서 하던 외국 홈드라마 속에서밖에 본 적이 없는 다른 세상의 광경이었다. 특히 나는 의지할 데 없는 고독한 청년시절을 보냈으므로 아직 이런 가정의 행복에 익숙하지 않다.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진 꿈속에 있는 듯 행복에 현실감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불행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행복에 대해서 골목대장 아이가 좋아하는 여자 아이에게 일부러 나쁜 장난을 치는 수준의 유치함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깥은 여름 / 김애란]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십여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씨앗에서 갓 돋은 뿌리 한 올이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안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안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몰려왔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는 피곤도 겹쳐 있었다. 그래도 나쁜 생각은 되도록 안 하려 했다. 세상 모든 가장이 겪는 불안 중 그나마 나은 불안을 택한 거라 믿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건 얼마간 사실이었다. 적어도 내겐 뭔가 선택할 자유라도 있었으니까.

 


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아내는 연주를 끝낸 뒤 수천 명의 기립 박수를 맞은 피아니스트마냥 울었다. 사람들이 던진 꽃에 싸인 채. 꽃에 파묻힌 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마냥 내가 붙들고 선 벽지 아래서 흐느꼈다. 미색 바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흰 꽃이 촘촘하게 박힌 종이를 이고서였다. 그러자 그 꽃이 마치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진 조화처럼 보였다.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 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에는 그 언어만큼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살아간다. 그 중 한 노파는 글을 알지 못하는데 수만 년 된 서사시를 한 줄도 틀리지 않고 끝까지 읊는다. 마치 자기 가슴에 돋을새김한 점자 하나하나를 공들여 더듬어가는 모양새다. 그녀는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로 수집의 표적이 된 아라비아오릭스의 뿔처럼 사라질 운명을 타고났다.

 


오래된 사진 속의 나는 언제나 어색한 듯 자명하게 서 있다. 정확히 어떤 색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1970년대 때깔 혹은 낙관적 파랑을 등에 인 채, 코닥산명도, 후지식채도에 안겨 있다. 어느 때는 너무 흐릿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 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 오래전, 어머니가 손에 묵직한 사진기를 든 채 나를 부른 소리, 삶에 대한 기대와 긍지를 담아 외친 정우야라는 말은,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어릴 때 산간벽촌에서 자랐다. 이웃을 만나려면 한참 걸어나가야 하고, 해가 지면 옆 사람 손도 안 보일 정도로 캄캄했다는 마을에서, 눈이 오면 아 입을 벌려 겨울을 맛보고, 비가 오면 명상에 잠긴 대지가 허밍하는 소리를 엿듣고, 가끔은 어른들로부터 귀신 비위 맞추는 법을 배우기도 하면서. 벌써 반세기 전 일이지만 그 때를 떠올리면 뭐랄까, 아버지는 다른 시대가 아닌 다른 세계에 살다 이쪽으로 넘어온 기분이 든다고 했다. 분명 다 겪은 일인데 어느 때는 자기 인생이 어디서 읽었거나 들은 얘기처럼 느껴진다고.

 


그 고생을 하고도, 막상 젖을 끊을 땐 아이에게 미안해 조금 울었다. 속이 후련한 한편 우리가 함께 보낸 한 시절이 비로소 끝났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건 아마 재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

 


이윽고 아이들은 노래했다. 아직 경험이 적은, 죽은 동물을 덜 먹어본, 축축하고 맑은 혀로. 어떤 음은 허공에 가느다란 포물선을 그리다 고꾸라지고, 어떤 음은 누군가의 단독 비행을 좇다 기꺼이 함께 낙하하고, 모두가 막 사라진 음의 행방을 신경쓸 찰나 그 소멸을 위로하듯 여러 개의 음이 다시 풍등처럼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아름다운 가교처럼 이어지던 재이의 독창. 재이 목소리는 아주 작은 충격에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알전구처럼 가늘고 투명했다. 높은음을 낼 때 성대 속 필라멘트가 노린 빛을 내며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나는 맑은 파랑을 등지고 앉은 현석의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백파이프의 깊고 단단한 소리가 아주 먼 곳까지 퍼져나갔다. 현석에게 긴 유학생활에 생기는 이지러짐, 욕망을 너무 오래 유예한 사람의 보상 심리랄까, 복수심이 자라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이십대 때 섬세함은 까다로움으로, 정의감은 울분으로, 우수는 의기소침함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염려했는데, 주제넘은 생각이었다. 변한 건 내 쪽이었다.

 

 

 


[페미니즘을 팝니다 | 앤디 자이슬러]

시장 페미니즘은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페미니즘을 누구나 소비할 수 있고 누구나 소비해야 하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브랜드화한다. 그것은 마치 복잡하고 골치 아픈 페미니즘 의제들을 구석으로 밀어두면서 모두가 배에 타면 너희를 데리러 올게라고 안심시키는 행동과 비슷하다. ‘모두를 배에 태우려면 결국 페미니즘을 단순하고 자극적인 브랜드로 포장하게 된다. 배에 탈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영합하는 셈이다. 아직 남아 있는 미완의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페미니즘이 매력을 발휘하는 순간부터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론상으로는 나쁜 일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운동의 다면성을 무시하고 가장 매력적이고 손쉬운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문제를 낳는다. 시장은 단순하고 매력적인 영역에만 페미니즘의 브랜드를 붙임으로써, 복잡하고 불편한 페미니즘의 문제들을 주변화하는 것이다.

 


어떤 집단에서 여성의 비율이 17퍼센트쯤 되면 그 집단의 남자들은 50 50이라고 느낍니다.” 데이비스가 NPR 라디오의 <더 프레임The Frame>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여성의 비율이 17퍼센트 이상이 되면 남성들은 무슨 모계사회에 온 것처럼 생각한다. 데이비스의 분석에 따르면 33퍼센트가 여성인 집단에서 남성들은 자신이 소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연예인 페미니즘에서 강조되는 것은 평등과 자유의 권리가 아니라, 페미니즘 자체의 존재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을 권리에 국한된다. 기업이 지배하는 미디어는 성불평등을 온존시키는 체제의 여러 문제들을 집중 조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미디어 자신도 그 체제의 일부와 공모 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진부하고 매력 없는 페미니스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세련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연예인들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지지 않고 격려만 해주는 안전한 방법이다. 그래서 대중매체의 논의는 대부분 당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무엇입니까, 유명하신 분?”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런 질문은 페미니즘에 대한 연예인들의 정의가 기존에 있던 페미니즘의 아주 명석한 정의와 대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한다.

 


여권 신장은 선택 페미니즘(페미니스트가 뭔가를 선택하면 그것은 모두 페미니즘적 선택이다)의 한 측면인 동시에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회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여권 신장이란 무엇이며, 그것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에서 답은 내가 해방이라고 정한 것주로 내가 이익을 본다였다.

 


그리고 여권 신장은 남용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뭐든지 좋아할 권리가 있고, 사회가 하지 말라는 일들에 대해 좋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권 신장을 오직 여성과 페미니즘 운동에만 연결시킨다면 앞으로 나아갈 길은 흐릿해진다. 생각해보라. 모든 것이 여권 신장이라면, 사실은 아무것도 여권 신장이 못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말해보라고 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든가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답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때때로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페미니즘이란 선택권을 가지는 거예요!”라고 소리칠 때마다 나는 혀를 깨물어가며 참는다. 페미니즘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선택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호통을 쳐서 그들이 페미니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고 싶지 않다.

평등은 자유롭고 신중한 선택의 가짓수를 늘려준다. 그리고 선택의 기회를 얻는 사람의 수도 늘려준다. 그러나 선택 자체가 평등은 아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페미니즘 역시 어떤 가치들(사회적정치적 평등, 신체의 자율성)이 다른 가치들(불평등, 가정폭력, 성폭력, 남녀의 종속적인 관계)보다 낫다는 입장을 취한다. 여성 개개인이 뭔가를 선택하기만 한다면 모든 선택이 똑같이 좋은 것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록산 게이는 이렇게 말한다. “안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안전을 폄하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안전은 다른 모든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안전이라는 사치를 이미 누리고 있는데 더 많은 것을 바란다고 오해했다.”

 


만약 페미니즘이 우리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바꿔놓았다면, 대체 왜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아직도 어느 여성의 수영복 몸매가 제일인가를 탐구하거나 제니퍼 애니스턴의 외로운 자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신경을 쓸까? 만약 여자들의 목소리가 남자들의 목소리와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왜 여자들이 스포츠나 비디오게임에 관한 의견을 표현하기만 해도 트위터에서 강간과 살해 위협을 당할까? 똑같은 의견을 표현한 수많은 남자들 중 누구도 바보 같은 창녀라는 욕을 듣거나 전화를 해킹하겠다, 살해 후 강간하겠다는 협박을 당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진정으로 페미니즘에 동참하고 있다면, 대체 왜 페미니즘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구조적인 불평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때마다 최초의 반응이 그런 일은 남자들에게도 일어나는데라든가 남자들만 그러는 건 아니에요!”일까?


 

문제는 페미니즘이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있는 문제였다. 페미니즘은 원래 재미있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복잡하고 딱딱하며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페미니즘은 심각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주로 다루는 문제들(임금 불평등, 노동의 성별 분업, 제도적인 인종차별과 성차별, 구조적 폭력, 그리고 당연히 신체의 자유도 포함된다)은 하나도 섹시하지 않다. 온라인 공간의 클릭과 소비자들의 반응에 의존하며 수익성을 목표로 신속하게 변화하는 콘텐츠들에 비하면 페미니즘은 매력이 덜하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본질상 힘의 균형을 다시 맞추려 하고, 그래서 현재 힘을 가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페미니즘이 유효한 것이 되려면 그래야 한다. 페미니즘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권리를 주장할 때 부드럽게 부탁해야 한다, 분노와 공격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실제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어준다) 사회의 거시적인 변화는 정중한 요청과 듣기 좋은 언어로 달성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되새기자.

페미니즘을 욕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장소에서 당신들에게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시장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은 진화해야 하며, 이데올로기를 자산으로 활용하면서도 진화의 과정을 방해하는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미리 정해놓은 목표들 안에서만 가능한 해방일지도 모른다. “여권 신장패션 상품의 소비가 늘어난다고 해서 패션업계가 제품 생산의 전 과정에서 여성에게 가시적인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어느 남성 포르노 배우가 어느 날 즉흥적인 친여성적 발언을 해서 페미니스트라는 격찬을 받더라도, 성매매업계의 착취적 관행이 마법처럼 바뀌지는 않는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여성 작가 2명을 채용한 다음에 이제 우리에게 여성 작가는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시스템이라면 설령 여성 작가가 더 많아지더라도 방송업계에서 다양성이 승리했다고 볼 수 없다. 2015년 흑인 여성 3명이 에미상을 수상했어도 흑인 여성을 인종차별적으로 묘사하는 과거의 악습이 할리우드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상황을 덜 나쁘게 만드는 것과 상황을 좋게 만드는 것은 다르다. 대중문화에서 여성혐오를 삭제하는 것과 대중문화에 페미니즘을 첨가하는 것은 다르다.

 

 

 


[핑거스미스 / 세라 워터스]

그 시절, 내 이름은 수전 트린더였다. 사람들은 날 라고 불렀다. 나는 태어난 해는 알지만 태어난 날짜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기에 크리스마스를 생일로 삼았다. 나는 내가 고아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어머니는 죽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어머니는 내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나는 석스비 부인의 아이였다. 그리고 아버지 역으로는 템스 강 근처 버러에 있는 랜트 스트리트에서 자물쇠점을 하는 입스 씨가 있었다.

 


게다가, 브라이어에서는 하루 일과가 어찌나 딱 짜여 있는지, 흡사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쇼와도 같아, 절대로 그 과정을 바꿀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시계 종이 우리를 잠에서 깨웠고, 그 뒤로 우리는 이 방 저 방으로 옮겨 다니며 저녁 종이 울려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각자 맡은 일을 했다. 마룻바닥에 우리가 갈 길이 홈으로 파여 있는 듯했다. 활대를 미끄러져 다니는 것 같았다. 집 한 간에 커다란 조종간이 있고, 커다란 손이 그 조종간을 돌리는 듯했다. 창밖이 어둡거나 안개가 짙어 회색일 때면, 머릿속에 조종간이 떠올랐고 조종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조종간 회전이 멈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점차 두려워졌다.

시골에서 살다 보면 그렇게 변하게 된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모드에 대한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게 모드는 내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야라고 말을 하면 할수록, 모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날이 밝은 동안엔 내내 모드와 함께 앉아 있거나 걸었으며, 내가 모드를 끌어가고 있는 운명 때문에 모드를 만지거나 시선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날이 지면 나는 모드의 한숨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밤새도록 담요를 머리끝까지 올리고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모드가 자기 삼촌에게 가 있는 동안, 나는 모드를 느낄 수 있었다. 눈먼 사기꾼은 촉감으로 자신이 만지는 것이 금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말처럼, 나는 집 벽을 통해 모드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둘 사이에 실이 연결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모드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실이 나를 모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건 흡사.

그건 흡사 내가 모드를 사랑한다는 말 같잖아.나는 생각했다.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을 보았다. 평소보다 별이 더 많아 보였다. 모드를 보았다. 모드는 얼굴 주위로 망토를 잡고 있다가 내가 자기를 돌아보는 모습을 보고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모드가 내 손을 잡은 것은 내게 방향을 이끌어 달라는 것도, 내게 위안을 구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단지 그 손이 내 손이기 때문에 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걸 수업이라 부른다. 하지만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다른 가르침을 받는다. 나는 부드럽고 명확한 발음으로 낭송하는 법을 배운다. 노래하는 법을 배운 적은 한 번도 없다. 꽃과 새의 이름을 배우는 대신, 책을 장정하는 가죽에 대해 훈련받는다. 예컨대, 모로코 가죽, 러시아 가죽, 송아지 가죽, 샤그랭 같은 걸 배운다. 그리고 종이에 대해서도 훈련받는다. 네덜란드 종이, 당지, 색동지, 실크지 따위이다. 잉크도 배운다. 펜의 촉 날에 대한 것도, 잉크 번짐 방지 가루의 사용법도, 활자의 모양과 크기에 대해서도 배운다. 산세리프 , 앤티크체, 이집트체, 파이카체, 브러비어체, 에메랄드체, 루비체, 펄체보석에서 이름을 따왔다. 사기다. 벽난로의 석탄재처럼 딱딱하고 둔탁하기 때문이다.


 

전 그저.

하지만 그저 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놀라며 깨어났을 때 수가 가슴에 내 머리를 안고 있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입김을 불어 내 발을 따뜻하게 덥혀 준 적이 있다고. 뾰족한 이를 은골무로 갈아 준 적이 있다고. 나에게 수프를, 맑은 수프를 달걀 대신에 먹으라고 가져다주고는 내가 마시는 걸 보고 싱긋 웃어 준 적이 있다고. 수의 눈에는 좀 더 어두운 갈색 점이 박혀 있다고. 수는 내가 착하다고 생각한다고.

 

 

 


[유리고코로 / 누마타 마호카루]

나는 병실로 돌아가 세면대에 기대 위액을 토해냈다. 그리고 텅 빈 침대에 앉아 이걸로 끝났다, 그 이상하고 형편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 첫날 밤, 공원에서 느닷없이 시간을 물어보던 그 사람의 빼빼 마르고 더러웠던 모습이 머리에 떠올라 어쩔 줄 몰랐다.

이제부터 앞으로 내가 얼마를 살든, 그런 형편없는 여자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앞에 나타나는 어떤 괜찮은 여자에 대해서도 그 형편없는 여자에게 가졌던 애정은 품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다.

 

 

 


[개미 2 /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는 어떤 것에도 상처를 입지 않고 폭풍이 불면 입을 꼭 다물고 견딜 줄 아는 강한 사람이 아니란다. 폭풍이 몰아쳐 오면 나는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낙엽처럼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 네이딘 버크 해리스]

세상의 모든 자원을 갖춘 부유한 도시 내부에 숨어 있는, 자원이 매우 부족한 저소득층 유색인들의 동네였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베이뷰 헌터스 포인트 마을에 소아과 진료소를 열었다. 그리고 매일 나의 어린 환자들이 압도적인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모습들을 목격했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모습에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과학자이자 의사로서 그 절망을 딛고 일어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곳에 진료소를 연 것은 베이뷰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 시치미 뗀 채로는 두 발 뻗고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이뷰의 아기들도 로럴 하이츠에서 태어난 아기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 왔다. 그러나 베이뷰의 신생아들을 검진할 때, 나는 통계상 이들의 기대 수명이 로럴 하이츠 아이들에 비해 12년 짧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심장이 다르게 만들어졌거나 신장이 다른 방식으로 기능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의 언젠가 그들 몸속에서 일어날 어떤 변화 때문이며, 그 변화가 남은 삶 동안 그들의 건강 궤도를 바꿔놓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아기들은 모두 똑같이 아름다운 잠재력의 꾸러미들이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렇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큼 가슴 저리는 일은 없다.


 

살기가 녹록하지 않을 때면 신체는 영양부족을 감지하고 연쇄적인 스트레스 반응을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하나가 코르티솔 생산의 증가로, 코르티솔의 주요 효과는 혈당을 높이는 것이다. 뇌가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려면 충분한 혈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추가로 쏟아지는 코르티솔은 사슴 고기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혈당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끔 도와주었다. 정맥 속에서 안정적으로 꾸준히 흐르는 혈당은 근육에도 연료를 제공하므로마침내 사슴을 발견했을 때도 녀석을 잡으러 쫓아갈 충분한 에너지를 내게 해준다. 그뿐 아니라 코르티솔은 체내의 수분과 염분 수준을 조절함으로써 정상 혈압을 유지하며, 성장과 생식을 억제하기도 한다. 식량 위기가 닥치면 자녀를 더 낳기 보다는 모든 가용 에너지를 당면 문제 해결에 쏟아붓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뇌와 몸은 효율적 정보 처리 방식을 갖춰야 했고, 스트레스 반응 체계도 그중 하나다. 어린아이가 버너를 만지면 아이의 몸이 그 일을 기억한다. 버너에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자극에) 위험하다는 생화학적 꼬리표를 붙이거나 책갈피를 끼워두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 누군가 버너에 불을 붙이는 걸 볼 때 아이의 몸은 생생한 기억과 함께 근육 긴장, 빠른 맥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에게 경고신호를 보낸다. 대개 이 정도면 아이가 전과 같이 행동을 하는 걸 막을 수 있다. 우리 몸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보호하려 노력하고, 이는 아주 합리적인 과정이다. 진화를 통해 그러한 기제를 만들어내지 못한 선사시대의 생물들은 번식하지도, 살아남지도 못했다.

그런데 스트레스 반응이 이따금 맡은 일을 지나치게 잘할 때가 있다. 이런 일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적응적이고 목숨을 구하는 방향에서, 부적응적이고 건강에 해로운 방향으로 바뀔 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우리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 가운데 많은 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몸이 너무 많은 걸 기억하는 극단적인 사례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기면 스트레스 반응은 현재의 자극과 과거의 자극을 반복적으로 혼동한다. 참전 용사들이 현재의 삶을 몹시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늘에 떠 있는 것이 B-52 폭격기든 관광객들을 하와이로 데려가는 상업 항공기든, 몸은 똑같이 치명적인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문제는 그것이 깊이 새겨져 고착되는 것, 즉 과거에 붙잡힌 스트레스 반응이 반복 모드로 고정되는 것이다.


 

내가 억척스러운 과학자보다 더 좋아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억척스러운 여성 과학자다.


 

돌이켜보면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주파수를 더 세밀하게 맞춤으로써 엄마의 병에 적응했던 것 같다. 나에게는 하교 후 만난 엄마가 어느 엄마인지 재빨리 파악하는 것이 집안에서 잘 적응하는 열쇠였다.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다양한 비언어적 신호들을 통해 쉽게 그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육감 같은 것이다. 유년기의 혼란스럽고 예측할 수 없었던 순간들을 결코 반복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시간들을 지워버리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 시간들은 나를 현재의 나로 만든 것 가운데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 때로 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주파수를 잘 맞추는 능력이 나만의 작은 초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의사로서 그 능력은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다음 질문이 뭔지 잘 알고 부드럽게 질문하게 도와주며 상황의 핵심을 재빨리 파악하게 해주어 내가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엄마의 병에 적응해온 경험은 의대생 시절과 레지던트 시절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나는 다량의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의학이 적성에 맞는다는 걸 깨달은 동료들이 많은데 나에게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가 질리거나 허둥댈 만한 상황이라 해도, 내 뇌와 몸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환경에서 일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어린 시절에 부정적 경험을 하며 자란 사람들이 자신의 유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경을 잊어버리거나 탓하는 것이 쓸모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첫걸음은 그것의 상태를 평가해 파악하고, 그 영향과 위험을 비극도 동화도 아닌, 의미 있는 현실로서 명료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몸과 뇌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끔 맞추어져 있는지 이해하고 나면, 자신의 반응을 미리 예측해 조정하는 방식으로 매사를 처리할 수 있다. 반응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무엇인지 알면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도 알 수 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옌롄커]

소설은 결코 칼도 아니고 총이나 수류탄도 아닙니다. 오히려 노래이거나 인간 정신의 교향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술에는 적이 없는 셈이지요. 노래나 교향곡에 적이 없는 것은, 햇볕이 한여름 따가운 햇살이 되고 땅을 마르게 하며 인간을 혹독한 기근에 빠지게 하지만 인간의 적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문학은 영원히 우리의 삶 속 햇빛이자 달빛이고 가뭄에 내리는 단비이자 장마 끝에 비치는 햇살입니다. 우리는 문학의 존재를 위해 노래합니다. 문학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자 노래입니다. 문학의 유일한 적은 시간입니다. 시간은 문학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장수하게도 하고 단명하게도 합니다. 따라서 문학의 호흡을 멈추게 하려는 모든 행위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궤도를 바꾸고 물 항아리나 우물 안에 달빛을 가둬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

 


소설은 삶의 많은 진실을 유일하게 대변한다. 그렇다면 소설의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기로 하자. 어떤 진실한 삶의 모습은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실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입을 열어 몇 마디 하려는 찰나, 이런 말은 글을 통해 읽어야지 입을 통해 일상 언어로 얘기하는 순간 풋과일처럼 조금은 시큼한 맛이 나고 설익은 밥이나 쉰 쌀죽처럼 온전치 못하며 심지어 잘못 말했다가는 정신병자라는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순간에 그런 상투적이고 거창한 문구를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반드시 가장 질박하고 돈후하며 가장 감동적인, 황금과도 같고 다이아몬드와도 같은 말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벽에 쓰여 있거나 신문에 게재되거나 책에 인쇄되거나 확성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방송 같은 말들에서 벗어나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마치 드넓은 광장이 아무런 시설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우다왕은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해 한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쌓여 입술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다왕의 눈물이 응접실 바닥에 진주처럼 떨어지자 류롄은 그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몹시 수척하고 참담한 웃음이었다. 그의 고향 척박한 산언덕에 피어난 들풀과 들꽃 같은 웃음이었다.


 

그녀는 포도 시렁 아래에 서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시든 들국화처럼 쓸쓸하면서도 찬란하게 그의 가슴 속에 각인되었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 실레스트 잉]

부모에게 자식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장소, 일종의 나니아 왕국처럼 지금 사는 현재와 기억 속의 과거와 갈망하는 미래가 한꺼번에 존재하는 광활하고 영원한 장소였다. 부모는 자식을 볼 때마다 그런 곳을 볼 수 있었다. 3차원 입체 영상처럼 자식의 얼굴에 겹쳐지는 아기 적 모습과 어린아이가 되었을 때의 모습과 다 커서 어른이 될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자식은 부모를 눈앞이 빙빙 돌 정도로 압도했다. 들어가는 법을 알면 부모에게 자식은 피신할 수 있는 장소였다. 자식 곁을 떠날 때마다, 자식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부모는 그 장소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까봐 두려워한다.

 


평생을 두고 엘리나는 그처럼 불같은 열정이 위험하다는 것을 배웠다. 열정은 통제에서 쉽게 벗어나버렸다. 벽을 타고 올라가 참호를 뛰어넘었다. 불꽃은 벼룩처럼 뛰어올라 빠르게 번져나갔다. 산들바람에도 불씨는 수 킬로미터를 날아갈 수 있었다. 올림픽 성화처럼 그 불꽃을 통제하여 조심스럽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건네주는 편이 나았다. 혹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처럼 신중하게 불꽃을 돌보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빛과 선은 절대 아무것도 불타오르게 하지 않는다는절대 그럴 수 없다는것을 상기시키도록. 조심스럽게 통제되고, 길들여지고, 갇힌 상태에서도 행복하게. 핵심은 큰불을 피하는 것이라고 엘리나는 생각했다.

 


날 신뢰한 덕분에 넌 남편과 자식을 얻었어. 다시 말해 전에도 매번 내 판단을 믿어서 네 일이 모두 잘 풀렸다는 말이지.”

엘리자베스가 오랫동안 의심해왔던 무언가가 확인되었다. 예전부터 엘리나는 공덕을 쌓아온 것이다. 정말로 도움을 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고 친절한 마음이 동기를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엘리나는 또한 자신이 엘리자베스를 위해 한 모든 일, 엘리자베스에게 준 모든 도움을 낱낱이 기록했고 이제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했다. 엘리자베스는 문득 엘리나가 이 일을 자신이 받아내야 하는 빚으로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나가 이 일을 공정성의 문제, 규칙에 따라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아내는 일에 대한 문제로 여긴다는 것을.


 

"라이언 부부는 부유해요. 아이를 아주 절실히 원했고요. 그들은 아이에게 멋진 삶을 줬을 거예요. 펄이 선택할 수 있었다면 당신과 사는 쪽을 택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방랑자 같은 삶을?”

미아가 불쑥 말했다.

그게 신경 쓰이는 거군요, 그렇죠? 당신은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네요. 왜 누군가는 당신과 다른 삶을 선택하는지. 왜 누군가는 넓은 잔디밭이 딸린 큰 집과 멋진 차와 사무직 말고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지, 왜 누군가는 당신이 선택한 것과 다른 것을 선택하는지."

 


이지는 예전 삶으로 되돌아간다고 상상해보았다. 아름답고 완벽하게 정돈되고 모든 것이 풍부하게 채워진 집, 잔디는 늘 깎여 있고 낙엽들은 늘 갈퀴질되어 있고 쓰레기는 절대로 눈에 띄지 않는 집에서 사는 것. 아름다고 완벽하게 정돈된 지역, 모든 잔디밭에 나무가 한 그루씩 있고 누구도 과속할 수 없도록 도로가 곡선으로 나 있고 모든 집이 다음 집과 조화를 이루는 지역에서 사는 것. 아름답고 완벽하게 정돈된 도시, 모든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며 규칙을 따르고 내부가 아무리 엉망이어도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완벽해야 하는 도시에서 산다고 상상해보았다. 이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할 수 없었다. 미아가 이지의 마음속에 열어놓은 문은 다시 닫힐 수 없었다.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얼마 전 그런 생각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그날 밤을 버티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지 못했나. 말했다면 그 밤이 그렇게까지 깊고 위태로웠을까.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아무리 덜떨어져도 인사 잘하고 성실하면 중간은 간다. 정작 어릴 때 들었을 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가 삶을 통해 신뢰하게 된 명제다. 대개 인사성과 성실함은 관료적이고 수직적인 사회에서나 빛을 발하는 덕목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건 가장 끔찍한 오해들 가운데 하나다. 가진 것이 없을 때 저 두 가지는 가장 믿을 만한 칼과 방패가 된다. 타인을 가늠하는 데도, 나를 무장하는 데도 좋은 요령이다.

 


이들은 대개 자신이 한 특정한 행동 때문에 상대가 결별을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그 특정한 행동을 바꿀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와 같은 생각에 몰두한다. 그래서 집 앞에 찾아가기도 하고 새벽 두 시에 전화를 걸기도 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문제의 특정한 행동은 말 그대로 특정한 행동일 뿐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이며, 이것만 수정되면 상대가 이별을 철회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창조한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개인사에서도 그렇고 국제정치에서도 그렇다. 스스로를 변치 않는 피해자로 설정하고 그러므로 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정치의 근성은 이 시대의 가장 비뚤어진 풍경 가운데 하나다. 당장 이기기 좋은 전략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사람을 망친다.


 

오늘 밤도 똑같이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장에 맞서 분투할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내일은 차를 수리해야겠다.

 


그러나 인생은 대개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일의 연속이다. 우리는 이별에 특정한 계기가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되돌리지 못해 있는 힘껏 자책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 헤어지는 건 그냥헤어지는 거다. 만약에, 를 여러 번 곱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고, 그들이 가장 행복했을 것 같은 버전의 만약에가 화면을 채운다. 즐겁고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그럴 리가 없다. 주인공의 가정은 완전무결한 환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논리도 없고 앞뒤도 맞지 않으며 등장인물들은 상황에 맞지 않게 행동하고 시공간은 수시로 허물어져 뮤지컬 스코어와 함께 어우러진다. 말 그대로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다. 모든 선택의 순간 가장 최상의 결과만이 존재했다면, 이라는 가정 아래 만들어진 판타지다.

그럼에도 이 아무 의미 없는 상상은 관객을 무너뜨린다. 우리 모두가 그런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잔인무도함을 이기기 위해 만약에, 라고 만 번쯤 상상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매번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아름답고 아련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우리는 행복했을까. 그럴 리 없다는 자괴감과 행복을 빌어주는 선의가 섞여 한숨이 나온다. 그 한숨의 힘을 빌려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듯 하루를 살아간다. 라이언 고슬링의 마지막 모습처럼 말이다. 하나, , , . 숫자를 세고 다시 건반을 치자.

 


선한 마음으로부터 악한 행동이 나올 수 있는가. 그렇다. ‘공동의 선이나 대의라는 것은 어느 언덕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역사 속 각기 다른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가장 나쁜 일들과 애국 애족의 이름으로 촉발되었던 크고 작은 전쟁은 대개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네 이웃과 공동체를 해롭게 하라 가르치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의를 이해하되, 우리는 그 선의가 이끌 수도 있는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도 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말씀을 따르는 삶이란 그렇게 어렵다.

 


청년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여성이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언제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꾸고 싶다. 그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쓸 줄 아는 건 소중한 능력이다. (...)

확실히 말한다. 너 혼자서는 세상 못 바꾼다. 청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근사한 수사에 현혹되지 말아라. 마케팅이다. 하나의 의견이 공론화의 과정을 밟고 생각이 전혀 다른 집단 사이에 합의를 거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따른다. 그마저도 합의안이라는 것이 누더기일 가능성이 크고, 누더기에 다른 누더기를 보태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까 그 가면을 버려서는 안 된다. 때와 장소에 알맞은 가면을 가려 쓸 줄 안다는 건 돈을 주고도 배우기 어려운 능력이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본연의 있는 그대로를 강박적으로 드러내서 오해와 구설수를 살 필요가 없다. 별난 사람 취급을 받을 이유도 없다.

가면을 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가면 쓰고 살아가는 다른 이들이 부조리하고 부패해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더 오래 버티기 위해 그러는 거다. 한국은 청년이 청년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공간이다. 지금만 그런 게 아니다. 원래 그랬다. 어제까지 청년이었던 사람들이 지킬 것이 생기면 돌변한다.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할 것들과 알아야 할 것들, 거쳐야 할 것들을 알려주는 대신 자신이 겪었던 가장 무의미한 형태의 부조리를 요즘 청년들은 피하고 싶어 한다고 타박한다.

한국만큼 청년의 치기 어림이 쉽게 공격당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만큼 청년의 시행착오가 용서받지 못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만큼 청년이라는 말이 염가로 거래되는 나라는 없다. 밥벌이를 하며 살아남아 세상을 바꿀 주체가 되려면 끝까지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가면을 써라.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순결 판타지에 의하면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피해자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한다. (...) 

요컨대 트집을 잡고 깎아내려 나쁜 피해자를 만들어내려는 욕망만큼이나, 그 반대 지점에서 착하고 선량하기만 한 피해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도 또한 불쾌하고 해롭다는 것이다. 그들이 옳고 그름을 논하며 피해자의 진짜 얼굴은 천사라고, 아니 악마라고 다투는 동안 정작 현실의 피해자는 유기된다.

다시 말하지만,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걸 측정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미후네 도시로의 일갈에 다른 사무라이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건 정의롭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던 자신들의 동기가 얼마나 얇고 편협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쌍한농민들을 돕기 위해 호기롭게 뭉쳤다. 그런데 선녀 같고 부처 같은 줄 알았던 농민들의 표정이 알고 보니 제각기 모두 다르다. 그들은 사람이다. 왜 선녀가 아니고 부처가 아니고 사람이냐며 난동을 부리려던 사무라이들은 미후네 도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며 피해자에게 어울리는 표정을 찾고 있었던 사무라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함께 싸워 이긴다. 7인의 사무라이는 그래서 공정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최은영]

그 글을 읽고 당신은 과거의 자신을 바라봤다. 남자 선배들이 이 사건을 영웅담으로, 농담으로 이야기할 때 그저 미친놈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그저 듣기 싫고, 피하고만 싶어서 못 들은 척했던 그때의 자신을. 정윤의 글을 읽은 당신은 그 글을 읽기 전의 당신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 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희영이 지녔던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한 깊은 수준의 공감을 했고, 상처의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나서, 정말로 글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쓸 줄 모르는 당신만 남아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 나날이 길었다.


 

종이에 그 여자들의 이야기를 적다가 당신은 땀처럼 솟는 눈물을 몇 번이나 닦아 내야 했다. 당신은 울면서 글을 썼다. 마음이, 당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붙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그때 알았다.

 


편집부를 2년 넘게 하면서 당신은 예전처럼 더디게 글을 쓰지 않았다. 막연한 덩어리 같은 생각을 언어로 풀어낼 때, 어렴풋하게 떠오른 문장들을 당신의 목소리로 종이 위에 적어 나갈 때, 당신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골똘한 생각을 써내려 간 글 속에서 당신은 당신 나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다 만나는 그런 순간들이 줬던 경이와 행복을 당신의 삶에서 계속해서 경험하고 싶었다. 그토록 나약해 보이는 당신 안에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글로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신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이는 당신도,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증명하고 싶었다.

글 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제대로 쓰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 시기를 쓰는 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어갈 수 있다는 행복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당신은 돌아갈 수 없었다.

 


 

 

[워터 댄서 / 타네히시 코츠]

나는 울타리를 따라 선 유색인 남자들이 그때까지도 마구간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과 소리치며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을 언제나 그랬듯 조용히 지켜보면서 우리 사이의 연대에 경이감을 느꼈다. 우리는 우리만의 줄임말을 썼고, 가끔은 아예 한마디도 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옥수수 껍질 벗기기나 허리케인에 관한 같은 기억에 대해서, 책에는 안 나오지만 우리의 이야기 속에는 살아 있는 영웅들에 대해서. 그건 그들에게는 감추어진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상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내 안에 있는 어떤 비밀에 가담한다는 것임을 그때 이미 느끼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상급자도 하류층도 없었고 쫓겨날 경마 클럽도 없었다. 우리 세계 자체가 또 하나의 미국, 그 나름의 장엄함이었다. 메이너드를 거부하는 미국.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자신이 차지한 위치에 대해 끊임없이 투덜댈 수밖에 없는 메이너드를 거역하는 미국이었다.

 


나는 그 순간 뭔가 비천하고도 아름다운 것을 느꼈다. 이곳 스트리트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의 모든 스트리트에서 태어난 무언가. 토끼굴에서 태어나고 키워진 무언가. 그것은 진창의 온기였다. 비천하게 태어난 자의 안도감이었다. 상급자들과 그들이 누리는 고급스러움에서 도망쳐 현실을 직면할 때, 우리 모두가 사는 진짜 세계의 무거운 짐과 배설물을 마주 볼 때 느껴지는 안도감 말이다.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네코지마 하우스의 소동 / 와카타케 나나미]

그래, 툇마루를 만들면 어떨까. 복도의 폭을 넓히고 창을 좀 더 크게 만드는 거야. 맑은 날에는 방석과 상을 내놓고 거기서 차를 마시는 거야. 할머니의 보라색 기모노를 뜯어 작은 방석을 몇 개 만들어도 좋겠다.

물휴지로 손을 닦고 스케치북에 대충 완성된 툇마루를 그려봤다. 처마 끝에는 양치류를 놓고 오래된 화로를 수반으로 쓰자. 동향이니까 오후에는 그늘이 져서 서늘하고 좋을 거야.

 

 

 

 

대한민국은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 없고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않겠는가. - 백범 김구

 

 

"They say every atom in your bodies was once part of a star. Maybe I'm not leaving. Maybe I'm going home."

"몸속의 원소도 한때는 별의 일부였다고들 한다. 어쩌면 나는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 가타카

 

 




'글을 어떻게 이렇게 쓰지?' 하고 감탄했던 구절이나, 너무 이뻐서 직접 손으로 써보고 싶었던 구절 있으면 써주고 가줘!

소설뿐만 아니라 노래가사, 영화대사, 시 등등 다 상관없어~


  • tory_1 2021.06.15 12:54
    토리야 좋은 말 엄청 많다 ㅜㅜ 나는 구병모 작가 아가미 문장들 좋아해! 지금 책을 가지고 나온 상태가 아니라서 마침 소장하고 있는 아가미 이북 발췌 이미지로 놓고 가!

    https://img.dmitory.com/img/202106/4nr/7KF/4nr7KFaCZOAiQAsmSuSmYk.png
  • tory_2 2021.06.15 13:43
    늘 좋은 구절 모아줘서 고마워🥺🖤

    스크랩 해갈게 !!!!! 좋은 날들 되렴 !!!!
  • tory_3 2021.06.15 14:03
    잘 읽었어 토리야! 스크랩해간다~#
  • tory_4 2021.06.15 14:08
    글들이 각자 다양한 매력이 있다! 잘 보고 가 정성글 고마워❤️
  • tory_5 2021.06.15 14:47
    너무 좋다.... ㅠㅠ 눈물날거같애
  • tory_6 2021.06.15 17:02
    좋은 구절 알려줘서 너무 고마워!
  • tory_7 2021.06.15 17:18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1/12/27 17:54:51)
  • tory_8 2021.06.15 18:26
    붕대 감기 다시 읽어도 정말 좋다 ㅠㅠ 여기 있는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어 고마워!
  • tory_9 2021.06.15 20:23
    잘 보고가! 내가 좋아하는 문장도 남기고 갈게.
  • tory_9 2021.06.15 20:29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너를 어떤 느낌으로 적시는지를 모른다. 너를 관통하는 그 모든 느낌들을 나는 장악하지 못한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전부일지 모를 그 느낌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일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에게 필요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느낌을 너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능력이다.

    -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 tory_9 2021.06.15 20:29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 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 덧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해야할' 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하는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테지요.

    오,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었어요.

    다시 한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 이성복 <남해 금산> 뒷표지글 (1986)
  • tory_9 2021.06.15 20:30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떨림이나 울음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여자의 보이지 않는 둘레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나갔다 하는 것을 
둥그런 무늬가 일그러지거나 또 다른 고리를 만드는 것을
만약 당신이 선택하는 자라면 옆에 있거나 떠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그 여자는 울거나 웃었거나가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는 것을

    - 하재연, 이동
  • tory_10 2021.06.16 10:53
    고마워~~~ 너무 좋당
  • tory_11 2021.06.16 14:58

    글써줘서 고마워!!  읽었던 책들도 몇개 보이는데... 이 글을 통해 다시 읽으니 또  좋다.  

  • tory_12 2021.06.16 14:59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1/12/10 01:05:00)
  • tory_13 2021.06.16 16:30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1/09/17 19:35:40)
  • tory_14 2021.06.16 16:56

    요새 필사해볼까 관심생겨서 검색해보다가 찾았는데 스크랩할게!

  • tory_15 2021.06.16 16:59

    붕대감기 넘 조하ㅠㅠㅠ

  • tory_16 2021.06.16 21:28

    잘봤어 고마워! 글 올려줘서 ㅠㅠ

  • tory_17 2021.06.16 21:38
    필사할때 쓸 글 찾고있었는데 고마와 톨아!! 추천땅땅
  • tory_18 2021.06.16 23:27
    고마워!
  • tory_19 2021.06.17 00:57
    토리야 고마워 댓글도 전부 다 고마워
    오늘 많이 힘들었는데 기운 얻고 가 정말 고마워
  • tory_20 2021.06.17 11:22

    이따 찬찬히 읽어봐야지


  • tory_21 2021.06.17 13:28
    와 너무 좋아 글씨 연습해야지
  • tory_22 2021.06.17 15:48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3/22 15:26:46)
  • tory_23 2021.06.17 16:51
    와 붕대감기 읽어보고싶아졋어! 토리야 고마웤ㅋㅌ
  • tory_24 2021.06.17 20:18
    정성글 고마워! 톨 덕분에 바깥은 여름 읽어보고 싶어졌어
  • tory_25 2021.06.17 21:40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03/13 16:59:07)
  • tory_26 2021.06.17 22:21
    고마워~
  • tory_27 2021.06.19 11:46
    너무좋다 고마워♡
  • tory_28 2021.06.20 11:27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8/21 12:29:38)
  • tory_29 2021.06.27 16:10
    고마워!!! 전혀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필사해보고 싶어졌당
  • tory_30 2021.06.28 15:35

    좋은글 정말 고마워 토리야... 계속 읽고 또 읽고프다...!

  • tory_31 2021.06.29 19:57
    고마워
  • tory_32 2021.07.11 18:25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1/01 19:04:54)
  • tory_33 2021.07.29 20:45
    최고다 고마워!!
  • tory_34 2021.12.27 22:08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02/11 15:31:54)
  • tory_35 2022.06.09 03:23
    와 고마워!
  • tory_36 2022.06.22 10:18
    스크랩할께~
  • tory_37 2022.07.13 02:05

    스크랩.

  • tory_38 2022.07.17 19:47
    고마워 톨아!!
  • tory_39 2022.07.21 08:34
    어떤거 읽을까 찾고있었는데. 스크랩할게 고마워
  • tory_40 2022.09.25 01:39
    너무 좋다 ㅠㅠ
  • tory_41 2022.09.27 15:53

    고마워 스크랩!

  • tory_42 2022.09.29 08:46
    고마워 ㅎㅎㅎ
  • tory_43 2022.11.24 12:48

    너무 좋은걸

  • tory_44 2023.03.21 19:23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10/26 22:52:57)
  • tory_45 2023.09.25 14:01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11/11 17: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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