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길게 와 있게 되어 어렸을 때 읽던 책들을 다시 읽다가 반쪽이네 가족일기를 꺼내 읽게 되었는데!

내가 왜 페미니즘이 광풍이기 전에 반쯤은 빨간약 먹은 사람이었는지,

왜 여성관 남성관에 대해 불편한 게 많은 사람이었는지 좀 이해가 되더라


이 만화책을 읽었을 때가 초2-3학년 쯤이었는데 그때는 딸 하예린이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

또래의 일상을 훔쳐보는 그런 느낌으로 책을 읽었었거든

지금 보니 반쪽이 아저씨가 페미니즘을 위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또 자신의 한남스러운 모순적인 부분을 이렇게 그림일기로 대중에게 까발리기까지 얼마나 쉽지 않았을까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어

이 아저씨가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여자인 나도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니

사람들 다 이렇게 배워가며 산다고 생각해


읽을 당시에는 사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어

반쪽이 부부가 결혼식장에 갔는데 다른 남자인 친구와 이야기 하며 결혼식장에 신부가 아버지 손잡고 

입장하는 건 일종의 성상납과 마찬가지라고 (정확한 디테일은 틀릴 수 있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그런 장면이었던 거 같아).


아빠 손 잡고 결혼한 사람들이 '어머 저 신부 성상납 당하나봐' 절대! 이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뇌리에 박혀서 내 결혼식 때는 남편이랑 같이 입장을 했어

뒤로 듣기로 아빠가 좀 섭섭해 했다더라


(혹시 아빠랑 결혼식 때 입장했는데 이 글 읽고 상처 받는 토리는 없었으면 좋겠다..

꼭 그렇다는 게 아니고 또 아빠랑 입장하는 거 자체가 아빠와 신부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기도 하니까)


이 책을 읽은 지 20년이 넘었는데, 한국사회는 남녀평등에 있어 이 아저씨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퇴화한 부분도 있고 (일베..)

또 어느 정도 진화한 부분도 있다 생각해. 특히 여자들이 전보다 더 주체적인 시각과 목소리를 집단적으로 가지게 된 것들.


아저씨 소식은 그림일기를 그만두고나서는 공방이나 전시회 소식 말고는 들려오는 게 없네 

그것도 십년전이라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하지만 하예린도 아저씨도 잘 지내시고 있기를 희망하게 돼

부인인 변재란 교수님은 영화평론 쪽에서 열심히 계속 일하고 계시는 거 같아서 마치 아는 사람이 잘 나가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책 서문에 박완서 선생님이 추천글을 써주셨는데 함께 읽어보면 좋을 거 같아서 타이핑 해왔어

절판된 책이라 전문 다 타이핑해도 괜찮겠지? 

혹시 안 되는 거면 댓글로 부탁해! 바로 수정할게

힘들게 타이핑한 거니까 불펌하지 않기를 바랄게




신종남자, 반쪽이

박완서


 반쪽이는 <여성신문>을 통해 알았다. 그의 정식 이름은 <반쪽이의 육아일기>가 한권의 책으로 묶여나왔을 때 처음 알았다. 그러나 외지는 못한다. 만나서 인사할 기회도 없었지만 아주 친한 사람처럼 느끼고 있다. 친한 사람 중에서도 꽤 괜찮은 사람처럼. <여성신문>이 올 때마다 뒷장부터 넘겨가는 버릇이 있는데 반쪽이를 빨리 보려고 그렇게 한다. 바쁠 때는 반쪽이만 보고 말 때도 있다. 더러 친지들에게 <여성신문>을 구독하라고 꼬실 적이 있는데 그럴 때도 볼만한 내용 중 제일 먼저 반쪽이를 예로 든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물론 만화를 통해서지만 만화가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로 좋아한다. 이런 말을 막 할 수 있으니, 나이 먹은 것도 나쁘지 않다싶다. 그러나 결코 늙은 것을 빙자해 주책을 떨려는 건 아니다.


 나도 <여성신문>에 연재소설을 쓴 일이 있다. 나중에 책으로 나와서 꽤 많이 팔린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가 그것이다. 이혼녀가 상처한 첫사랑의 동갑내기 동창을 만나 사랑하고, 새 생활을 꿈꾸고, 임심하고, 채이고 하는 그렇구 그런 얘기다. 나는 내 주변의 쌔고 쌘 평균치의 한국남자를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독자들이 그렇게 고약한 남자가 어디 있냐고 야단을 쳤다. 대게는 여성들이 그런 소리를 했다. 아마 자기 남편이 그런 남자일까 봐, 또는 앞으로 그런 남자를 만날까 봐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남자 독자들한테는 그런 남자가 어디 있냐는 소리를 한번도 못 들었다. 영동거리를 막고 물어보라. 서른다섯의 홀아비가 동갑내기에 가진 거 없는 과부하고, 지참금이 딸린 미모의 노처녀하고 어느 쪽 하고 다시 결혼식장에 서고 싶어하나. 물론 소설 속의 남자는 동갑내기에게 임신까지 시켰다. 그러니까 그나마 소설거리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그가 처녀장가 드는 건 소설거리도 안되는 것이 지금의 상식이다.


 거기까지는 누가 뭐래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전형적인 한국남성을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결말부분에서 약간의 차질이 생겼다. 혼자 아들을 낳아 기르던 이혼녀가 느닷없이 아들을 빼앗길 위기에 몰린다. 처녀장가 든 남자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그릴 것 없이 살다 보니 딸만 둔 게 서운해, 내 자식이 아니라고 부정하던 이혼녀의 사생아에게 욕심이 생긴다. 여기서 친권문제가 생기고, 그때까지 혼자서 늠름하게 아들을 키우던 이혼녀가 아들을 어떻게든 자기가 키워야 된다는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만은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땅이 여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능멸해도 된다는 그 천부의 권리로부터 자유로운 '신종남자'로 키우겠다."


 신종남자가 도대체 어떤 남자냐, 결말부분이 너무 안이하고 감정적이다 등등 말이 많았다. 거기 대해선 나도 할말이 없다. 남자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신종남자로 표현했을 뿐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는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고약한 남자의 모델은 쌔고 쌨지만 이상적인 남자의 모델은 현실적으로 구해지지가 않더라는 얘기도 된다.


 내 소설 이야기가 길어지고 말았는데 내가 별로 자신없이 구름잡는 것처럼 만들어낸 신종남자가 반쪽이를 보면서 비로소 생생한 구체성을 띠는 걸 느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내가 남자의 사람노릇도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바라는 신종남자는 반쪽이 정도만 되면 족하다. 어디서 백마 타고 나타나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미남도, 왕자도, 더군다나 공처가도 아니다.


 그럼 신종남자는 다 집 안에서 하는 일을 가져야 하느냐는 속 좁은 항의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반쪽이가 뭐 해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그의 직업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의 아내와 자식과 친척, 그리고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마음 씀씀이를 말하려는 것뿐이다. 그가 아직도 거의 다 구식남자인 친구나 가족들에게 느끼는 갈등이나 계면쩍음까지도 결코 신종남자의 결격사유가 아니다. 반쪽이를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그의 세상에 대해 마음 씀씀이도 여간 귀한 게 아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집에 가본 적이 있을 리 없지만 결코 휘번드르르하게 차리고 살 것 같지 않다. 이 세상에 쓰레기를 덜 버리고 살고 있으리란 믿음이 가는 흔치 않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 쓰레기를 덜 버릴 뿐 아니라 남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솜씨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그것도 물론 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반쪽이가 돋보이는 것은 앞으로 달라져야 할 새로운 남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회복해야 할 소박한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 과찬이 되었더라도 용서해주길 바란다. 의례적인 칭찬은 성미에 안 맞고, 아부를 해야 할 까닭은 더군다나 없고,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뿐이니까.

  • tory_1 2021.04.13 22:33
    헐 이 책 파나? 읽어보고싶다
    헉ㅜㅜ다시 보니 절판....타이핑 해줘서고마워ㅜㅜ서문도좋다.두고두고읽을게 중고서점좀뒤져야할듯ㅋㅋㅋ
  • tory_2 2021.04.13 22:47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1/12/16 14:59:40)
  • tory_3 2021.04.13 23:59
    와..몰랐던 책 알고 간다
    박완서 서문도 꽤 솔직하네 너무 잘 읽었어
  • tory_4 2021.04.14 01:33

    '내가 별로 자신없이 구름잡는 것처럼 만들어낸 신종남자가 반쪽이를 보면서 비로소 생생한 구체성을 띠는 걸 느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내가 남자의 사람노릇도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바라는 신종남자는 반쪽이 정도만 되면 족하다. 어디서 백마 타고 나타나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미남도, 왕자도, 더군다나 공처가도 아니다.'


    이 부분, 두개골이 둥 하고 울렸다는 표현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네

    박완서 작가님은 할머니 집에 있는 책 '친절한 복희씨'로 알았는데 어렸을 때 읽어서 그런가 본문내용이 깊이 와 닿지 않았었거든

    근데 서문을 정독하니 이 분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져

    혹시 도서관에 책이 비치되어 있는지 알아봐야 겠어

    멋진 글 소개해줘서 고마워!

  • tory_5 2021.04.14 08:07

    오 나도 이 책 정말 좋아했는데, 빨간약 먹기 한참 전인 중학생때 봤을 때도 충격이 컸었어. 기억에 나는 장면이, 맞벌이 부부인데 아내가 일이 바빠서 집안일을 못한 날이 있었단 말야. 그래서 부부가 서로 싸우는데, 남편이 거기서 그냥 한남처럼(그 시대가 90년대였음을 감안해야 함) 여자가 집안일도 하는게 맞지 않냐는 식으로 화내거든. 아내는 거기서 "그래 나 남 집안일 해주려고 남자랑 결혼했다"하면서 받아치고. 어린 마음에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이 작가가 자신의 그런 부끄럽고 모자란 부분을 여과없이 작품에 그려냈다는 점이었어. 반성하는 뜻에서 이 에피소드를 내용에 넣은 것 같았음. 정말 시대를 앞서간 사상인 점에 놀랍고, 또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솔직히 드러냈다는 점이 놀랍지.

  • tory_6 2021.04.14 09:13

    나는 내 주변의 쌔고 쌘 평균치의 한국남자를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독자들이 그렇게 고약한 남자가 어디 있냐고 야단을 쳤다. 


    ㅋㅋㅋ 글도 흥미진진하다.

    반쪽이의 육아일기도, 박완서 선생님의 이 소설도 안 읽었는데 둘 다 읽어보고 싶다.

    근데 진짜... 페미니즘에 대해 알기 전 나는 뭔가 반푼이었다는 느낌이야.

    세상을 보는 눈에 뭔가 안개가 끼어 있었달까.

    그때는 아마 박완서 선생님의 추천사 같은 글을 봐도 그냥 응~ 하고 넘겼을 것 같아.

    깨인 사람들이 당시에 동지들이 정말 없던 그 시절에 얼마나 막막했을지, 요새는 많이 생각해.


    반쪽이, 저 사람이 한때 인기였다는 사실만 알고 있고 본 적은 없는데 갑자기 궁금해졌어.

  • tory_7 2021.04.14 10:16
    나도 어릴 때 읽은 거라 잘 기억 못 하는데
    아저씨가 나무 뚝딱뚝딱 하면서 딸 재밌게 키우던 걸로 기억나는데
    생각보다 더 심도있는 내용이었구나

    신종남자가 마음씀씀이에 대한 말이라는 거
    다음에 써 먹어야지
    저 문단 맘에 든다
    신종남자가 가진 마음씀씀이에 대한 말이라는 거
  • tory_8 2021.04.14 19:35
    반쪽이 시리즈 진짜 .... 맞아ㅜㅠㅠㅜ 오늘 집 가서 봐야지... 요즘은 진짜 어케 지내고 계시려나 궁금하다... 그림일기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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