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정원

"미구(未久)에 남녀 전쟁이 날 것이야"라고 예언한 이는 나혜석(1896~ 1948)이다. 흔히 부잣집 딸로 태어나 신식 교육을 받았으나 불륜과 이혼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는 그 '신여성'이다. 하지만 나혜석의 삶은 '비운의 여자'란 수식으로 무질러 폄훼할 대상이 아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조선일보를 비롯한 유수 매체에 칼럼과 만평을 게재하며 이광수 등과 한 시대를 풍미한 지성이었다.

1918년 발표한 소설 '경희'는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문학이다. '조선여성 첫 세계일주기'의 주인공도 나혜석이었다. 1927년 6월 부산에서 출발해 1년 9개월간 중국·러시아를 거쳐 유럽 각지와 미국을 돌면서 보고 느낀 여행기를 발표했다. 파리에선 "공기에 자유, 평등, 박애가 충만해 있다"고 썼고, 중국 하얼빈 여성들을 보면서는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여성이 불쌍하다"고 개탄했다.

나혜석은 위험한 여자였다. 칼자루를 쥔 남성 사회를 바꾸려면 칼날을 쥔 여성들이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었다. 1934년 발표한 '이혼 고백장'이 대표적이다. 불륜이 사실무근임에도 남편 김우영에게 강제 이혼당한 과정을 낱낱이 밝혀 충격을 던졌다. 그러나 세상은 내밀한 가정사를 들춰낸 나혜석에게 돌을 던졌다. 그래도 굽히지 않았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올해 사망 70주기를 맞아 전시, 출판 등으로 나혜석을 부활시킨 건 '82년생 김지영'들이다. 나혜석의 시대와 김지영의 시대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 이들은 "무용(無用)의 불평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비난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같은 나혜석 어록을 퍼나르며 세상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지금 대한민국을 강타한 '미투(Me Too)'의 핵심 엔진이다.

나혜석의 '동지'는 더 있다. 미투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남성들이다. 여성에 대한 희롱과 추행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만연해왔는지 목도한 그들은, 미투를 폭로한 여성들이 100년 전 나혜석처럼 행려병자로 떠돌다 죽어가지 않도록 방패막이가 돼주고 있다. "내 아내, 누이들이 이런 막장 세상에서 살아남은 줄 몰랐다" "이 미개하고 야만적인 세상을 내 딸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분노와 공감이 미투를 메가톤급 태풍으로 키운 숨은 힘이다.

모든 미투가 정의는 아닐 것이다. 한 가정에 씻기 힘든 상처도 안긴다. 남성을 주눅 들게 하고 '펜스룰'이란 역풍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투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욕과 성적 방종은 남자다움이요 사소한 일탈'이라는 무지와 편견이 어떤 광기(狂氣)로 치닫는지 증언하기 때문이다. 엘리트 집단의 이른바 "나는 큰일 하는 남자"라는 권력형 나르시시즘이 어떤 파국을 가져오는지, 사이비 진보의 민낯이 얼마나 추악한지 드러냈기 때문이다. 뭣보다 여성들에겐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이란 사실을 일깨웠다.

'한 시대가 끝났다'(Time is up)는 말은 자조가 아닌 희망의 외침이다. 미투의 본질은 남녀 간 전쟁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다. 태풍은 목숨을 위협할 만큼 무섭고 아프지만 견뎌야 이겨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다. 꽃은 지더라도 새로운 봄은 온다. 나혜석의 말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3&aid=0003359108

  • tory_1 2018.03.19 19:05
    좋은글고마워 잘읽었오
  • tory_2 2018.03.19 20:25
    불륜이 사실무근이구나 ㅠㅠ 이걸로 남초에서 웅앵웅 많이 하던데...마지막 문장 너무 좋다
  • tory_3 2018.03.19 20:30
    되게 멋진 글이다...
  • tory_4 2018.03.19 21:51

    좋은 글 고마워ㅜ 갑자기 울컥하네

  • W 2018.03.19 22:03

    짧은 주소!

    http://naver.me/FvhsMW92

  • tory_6 2018.03.19 22:09
    정독했어. 좋은 글 고마워!
  • tory_7 2018.03.19 22:40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1/31 22:17:35)
  • tory_12 2018.03.20 04:57
    후... 통찰력... !!
  • tory_8 2018.03.19 23:05
    불륜이 사실무근인건 미묘..............
    (조선일보이긴 하지만)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premium&contid=2015042104135&Dep0=m.chosun.com#Redyho

    그치만 그 말대로 남자들은 바람 수도없이 피고 집안에 첩이고 사생아고 상관없이 데리고 들어오던 시대에, 여자가 바람폈다고 이혼 당하고 애들도 전혀 볼수없었고 친정에도 의절당한건...
  • tory_10 2018.03.20 00:44
    와 이렇게 멋진 분이 계셨었구나.. 친일파들에 둘러 쌓여있으면서도 창씨개명도 하지 않으셨다니 진짜 자유롭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 tory_8 2018.03.19 23:09
    집안 부자에 본인 예쁜데다 공부잘하고 해서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식민지 조선에 몇없던 변호사 남편이랑(고부갈등 부부갈등은 있었지만) 그 시대에 조선여자들이 꿈꿀수 없었던 세계여행까지 다녀오던 화려한 인생이었는데 불륜스캔들&이혼으로 한순간에 영락해 버렸다는게;;
  • tory_9 2018.03.20 00:43
    나의 롤모델
  • tory_11 2018.03.20 04:26
    불륜이 사실이다 치더라도 불륜 웅앵하면서 나혜석을 폄하하려는거 너무 웃기지않니? 유부남이 돈좀있으면 엣헴하고 첩을 들여와도 질투하지않는게 부인의 미덕인 시절이었으니까 여자만 불륜녀로 손가락질 받은거지ㅋㅋㅋㅋ사실 왜그렇게 나혜석한테 불륜이미지가 따라붙었는지 모르겠어...사실관계로만 치면 그당시 남자들 불륜남 아닌놈들이 없는데요^^...;;;
  • tory_13 2018.03.20 10:06
    그니까... 내로남불 오져 진짜...
  • tory_15 2018.03.22 09:25
    그러니까 그 시대에 불륜남 아닌 놈이 어디있음?
    다들 로맨스다 하면서 여자가 하면 불륜을 떠나 의절대상임;
  • tory_14 2018.03.20 18:47
    덕수궁 미술관 가서 신여성 모던걸 전시 봤는데 재밌는 자료 많더라! 나혜석 관련자료도 있었어. 추천~
  • tory_16 2018.03.23 15:13

    오 불륜이라서 욕 많이먹고 묻힌거구나... 남자는 괜찮고 여자는 안되는 불합리한 세상에서 시대를 잘 못 타고나셨던 듯 ㅜㅜ  

    좋은 자료 알게되서 고마워 토리~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조회
전체 【영화이벤트】 순결한 수녀의 임신, 축복인가 저주인가! 🎬 <이매큘레이트> 시사회 17 2024.06.24 1009
전체 【영화이벤트】 스칼렛 요한슨 X 채닝 테이텀 🎬 <플라이 미 투 더 문> 예매권 증정 51 2024.06.24 932
전체 디미토리 전체 이용규칙 2021.04.26 589620
공지 [영화] 게시판 신설 OPEN 안내 🎉 2022.09.03 9305
공지 토리정원 공지 129 2018.04.19 62538
모든 공지 확인하기()
27278 도서 토정방 북클럽: 6월 24일 월요일, 무더운 여름! 시원한 음료와 재미있는 책으로 나른한 월요일 오후를 이겨보자! 2 2024.06.24 55
27277 음악 (찾아줘) !!! 숏츠에서 우연히 들은 피아노 곡인데 알고싶어ㅠ 2024.06.24 77
27276 도서 서울국제도서전 갈말 해줘 8 2024.06.23 316
27275 음악 클래식 배경지식을 쌓을수 있는 책이나 유튜브 추천 부탁해! 4 2024.06.23 75
27274 음악 [릴레이댄스] EVNNE(이븐) - Badder Love 2024.06.23 189
27273 음악 케플러 - Don't Lose Your Smile (일본곡) 2024.06.23 16
27272 음악 안예은 - 이내 Live Clip 2024.06.23 35
27271 음악 [릴레이댄스] H1-KEY(하이키) - 뜨거워지자 (Let It Burn) 2024.06.23 214
27270 도서 토정방 북클럽: 6월 23일 일요일 책과 함께 시원하고 뽀송한 하루 보내길! 4 2024.06.23 58
27269 공연 클래식 공연 자리별 음향 관련 궁금한 점이 있어!! 2 2024.06.23 57
27268 음악 [릴레이댄스] RIIZE(라이즈) - Boom Boom Bass 2024.06.22 306
27267 공연 퀄리티에 비해 저렴하고 등급별 좌석 배치가 혜자이며 할인 못해줘서 안달난 공연 장르 6 2024.06.22 422
27266 도서 토정방 북클럽: 6월 22일 토요일, 책 읽다가 스르륵 잠들기 좋은 비 내리는 주말 오후 3 2024.06.22 65
27265 도서 해리포터 너무 좋아하는데 밈화된 부분이 너무 답답해(ㅅㅍ) 5 2024.06.21 472
27264 도서 토정방 북클럽: 6월 21일, 드디어 금요일! 책과 함께 하루만 더 기운내자! 8 2024.06.21 94
27263 공연 피아노 협주곡 보러가는데 자리가 어디가 나을까? 4 2024.06.20 177
27262 도서 퀴어 문학읽으면 궁금한거 5 2024.06.20 384
27261 도서 토정방 북클럽: 6월 20일 조금만 더 힘내보는 목요일, 시원한 바람 맞으며 누워서 책 읽는 저녁을 고대하며… 6 2024.06.20 93
27260 공연 고척돔 두아리파 콘서트 자리 좀 봐줄래? 2 2024.06.20 118
27259 음악 (찾음!!)Charli xcx 미발표곡? 찾고있어 2 2024.06.20 79
목록  BEST 인기글
Board Pagination 1 2 3 4 5 6 7 8 9 10 ...
/

Copyright ⓒ 2017 - dmi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