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평소 알고 지내던 민단의 간부를 찾아가 의논했다.
그 민단의 간부는 아버지가 조총련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에
'우리 쪽 스파이가 되주지 않겠느냐.'는 제법 스릴 넘치는 제안을 했던 작자였다.
물론 아버지는 거절했다(한 것 같다).
민단의 간부가 손을 써준 덕분에 신청은 아무 문제 없이 접수되었고 불과 두 달만 만에 아버지는 새 국적을 취득했다.
아마 조총련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그것도 마르크스주의자가) 국적 변경 신청을 한 인간 중에서는 최단기록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어떤 조치를 취한 것일까?
간단하다. 민단의 간부에게 뇌물을 바쳤다. 많은, 정말이지 거액의 돈을.
이렇게 아버지는 그 멋들어진 솜씨로 세번째 국적을 취득했다.
그런데도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이따금 농담 비슷하게 내게 말했다.
"국적은 돈으로도 살 수 있는 거야. 네 녀석은 어느 나라 국적을 사고 싶으냐?"
...
"천국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구나......, 천국은 정말 좋은 나라일까......"
그때 나는 반항기였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술주정뱅이 권투선수 주제에.'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얼마 전에 아버지는 처음으로 경품 교환소를 빼앗기는 쓰디쓴 경험을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얼굴을 내리고서 후, 하고 숨을 토했다.
그러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았어, 결정했다. 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처럼 천국으로 올라갈 거다.
너도 오고 싶으면 와라!"
아버지는 나무 아래서 뛰쳐나가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 속을 달려 잔디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온 얼굴에 미소를 띠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끔은 기괴한 스텝도 밟았다.
아무튼 나는 그때 반항기였다. '무슨 짓거리야, 술주정뱅이 권투서누가.'하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때 아버지의 움직임이 <Singing in the rain>에서 진 켈리가 빗속에서 춤추는 장면하고 비슷한 듯한 느낌도 든다.
몇 번을 보아도 볼 때마다 나를 행복함에 젖게 하는 장면이다.
...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홋카이도에 맹인 안내견 양로원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는 나이가 너무 들어 맹인 안내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개가 여생을 보내는 장소래.
10년이나 같이 생활한 어떤 할머니하고 개가 헤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거야.
앞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와 골든 리트리버 수놈이었는데, 할머니하고 개는 한 시간쯤 꼭 껴안은 채 움직지이지 않았어.
간신히 담당 직원이 떼어놓아 작별을 하기는 했는데, 차를 타고 양로원을 떠나는 할머니가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면서
'잘 있어, 안녕.'하고 개의 이름을 외치는데, 개는 꼼짝 않고 앉은 채 멀어져가는 차 쪽을 쳐다만 보고 있는 거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맹인 안내견은 그렇게 하도록 훈련을 받았으니까.
(...)
할머니하고 한낮에 헤어졌는데, 해가 기울이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무지하게 세찬 비가.
그런데 꼼짝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던 개가 고개를 들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웡, 하고 짖기 시작하는 거야. 웡- 웡-, 하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이야.
그런데도 그 모습이 조금도 비참하거나 볼품없어 보이지 않는 거야.
개는 등과 가슴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선을 꼿꼿하게 펴고 마치 완벽한 조각상 같았어.
나, 그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어버렸어. 개가 짖는 소리에 맞추어 엉- 엉- , 하고 말이야."
...
"그런데 그녀를 만나고부터는 차별이 두려워졌어요. 그런 기분 처음이었어요.
나는 지금까지 정말 소중하게 여길 만한 일본 사람을 만난 적이 없거든요.
그것도 내 취향에 딱 맞는 여자애는. 그래서 처음부터 어떤 식으로 사귀면 좋을지도 몰랐고,
게다가 내 정체를 밝혔다가 싫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스러워서
줄곧 털어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차별 같은 거 할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지만 난, 결국은 그녀를 믿고 있지 않았었나 봐요.
가끔 내 피부가 녹색이나 뭐 그런 색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다가올 놈은 다가오고 다가오지 않을 놈은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알기 쉽잖아요......"
...
이거 말고도 엄청 많지만 다 옮길 수는 없어서 ㅋㅋㅋ
이 책은 읽을 때마다 재밌고 술술 읽히고 느낌이 다른 것 같아
이 작가 다른 책들도 몇 읽어봤는데 이 책이랑은느낌이확 달라서 이만한 책은 또 없더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