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지금부터 그리 멀지 않은 옛날, 구체적으로는 약 25년쯤 전, 신에게 축복받은 땅 아렌토 왕국에, 아주 잘난 남자 하나가 한 여자에게 잘못 걸렸다.



아니, 잘못 걸렸다는 말은 약간 어폐가 있을 지 모르겠다. 여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남자를 지극히 사랑했으며, 부자에 권력마저 있는 든든한 후작 가문의 외동딸이었으니까. 잘난 남자의 배경이나 돈을 보고 달라붙는, 흔히 말하는 꽃뱀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물론 특출난 외모만큼이나 성깔이 평범하지는 않았고, 딸래미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병에 걸려 기침하는 시늉정도는 해 주는 아버지가 좀 부담스러울 수는 있어도, 보통으로 잘난 남자였다면 신께 넙죽 엎드려 감사드리고 평생 모시며 살 만한 여자였다.



문제는 남자가 보통 이상으로 잘난 사내였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후작이었지만 남자의 아버지는 공작이었고, 현 메를링어 왕조를 도와 나라를 건립했다는 유서깊은 열 두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웬델 가문의 가주였다. 여자가 순은으로 만든 딸랑이를 흔들며 비단 턱받이에 침을 흘릴 때, 남자는 가문의 상징이 새겨진 황금 브로치를 달고 무려 교황이 직접 뿌려주는 성수로 세례를 받았고, 여자가 탐스러운 금발에 제비꽃 색의 눈을 가진 미녀로 자라 사교계에 데뷔했을 즈음엔 남자는 이미 그 창백하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으로 사교계 미녀들의 연모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돈 많지, 권력있지, 고귀한 혈통에, 달을 닮은 은발의 미남이기까지 하니 여자는 남자를 볼 때마다 사춘기 부터 쭉 즐겨읽던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을 떠올렸고, 자신이 여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여자가 읽던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들은 백작보다는 왕자의 비중이 높았지만 안타깝게도 아렌토를 다스리는 메를링어 왕가의 세 왕자들은 하나같이 가문 특유의 강렬한 매부리코와 훗날이 걱정되는 부족한 머리숱 때문에 권력을 탐하는 귀족들의 야심을 흔들지언정 그 여식들의 연심을 흔들기에는 좀 모자란 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리고 부와 권력, 미모는 절대 평가가 아니라 상대 평가로 인정받는 영역이기에 그 셋을 모두 갖춘 남자는 어느 집단에서든 소수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 남자는 사교계에서 단 하나뿐인 달이었고 여자는 그 달을 바라보는 수많은 달맞이꽃들 중 하나였다. 여자는 각종 사교 모임과 연회에서 최대한 남자와 엮이려 발버둥쳤고, 그 와중에 그녀와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귀족 여식들과 척을 지었다. 그러나 소설과는 다르게, 춤 몇 번, 대화 몇 마디로 남자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유별나게 좋은 외부적 조건들과는 달리 남자는 전혀 유별난 성격이 아니었다. 정해진 길에 순응할 줄 알고, 사랑의 열정보다는 가문의 안녕을 더 중요시 하는 그는 사교계에 염문을 뿌리는 대신 집안에서 정해준 아가씨와 약혼하기를 택했다. 공작가의 친척으로, 세력 확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려는 공작가의 목표에 맞아떨어진, 덤으로 어릴 때 부터 얌전하고 말 잘 들어서 윗어른들에게 예쁨받는 아가씨였다. 그렇지만 여자만큼 아름답지도 않았고, 나름대로 힘 좀 쓰는 집이긴 했지만 공작 가의 방계라서 그녀의 아버지의 직위는 백작이었다. 당사자의 능력보다 인맥, 연줄로 성공하는 사회의 부조리함은 아렌토의 결혼시장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디서 감히 그딴 여자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자의 성깔은 보통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경쟁하던 고만고만한 귀족 아가씨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공식적인 연적(?)의 등장에 여자의 기세는 더없이 불타올랐다. 그녀는 평생 후작가의 부와 권력에 기대 살아왔음에도 인맥이 개인의 능력보다 더 대우받는 상황에 개탄했고, 여기서 그녀가 믿는 결혼시장에서 개인의 능력이란 미모와 상대를 향한 애정도를 이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 두 가지 분야에서 그녀를 능가하는 여자는 없었다. 현실에 벽에 부딪힌 여자는 제 아버지한테 도움을 청했다. 자신은 그 남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할 마음이 없으니 딸이 수도원에 서원하러 가는 꼴 보지 않으려면 웬델 공작가에 시집가게 해 달라고.



불행히도 후작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남보다 더 예쁜 드레스나 더 반짝이는 보석을 사주는 것은 가능했고, 심지어 지위가 백작 미만이라면 다른 아가씨들의 아버지들에게 은근히 딸 간수 잘 하라는, 적반하장의 충고마저 할 수 있었지만 공작가와의 혼인은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여자와 남자, 둘 다 한가닥 하는 가문의 자식들이었지만 그 가닥의 굵기가 달랐다. 만약 공작 쪽에서 신부의 개인적인 성깔머리와는 별개로 신부 가문과 세력다툼할 일 없이 고분고분한 상대를 찾는다면 중매쟁이를 보내 넌지시 혼담을 제시할 급은 되었지만 공작쯤 되면 왕족과도 혼인이 가능한 만큼 후작쪽에서 적극적인 이야기를 꺼낼 입장은 못 되었다. 젊은 백작(공작의 장남이니만큼, 남자에게는 태어나자마자 백작의 작위가 주어졌다)쪽이 후작의 딸에게 반했다면 모를까, 그 반대의 입장에서 혼사를 진척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실제로 백작가의 아가씨도 그녀의 유순함과 아버지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공작 가의 어르신들의 주도로 인해 선택받은 입장이 아니던가. 귀천상혼이란 으레 그런 법이었다.



“그런 법이 어딨어요, 아버지!”



반복하지만 여자의 성깔은 보통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것에 익숙한 그녀는 반대로 아버지의 말에 따라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정말 몇 번 안되는 거절에는 길고 요란한 울음과 각종 재물 손괴, 단식 투쟁 및 기타 자해 협박이 이어졌고 끝내 후작가 모두의 간절하고 끈질긴 달램과 그녀의 주의를 돌릴 달콤한 회유책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번에는 그녀의 주의를 돌릴만한 차선책이 없었다. 하늘에 달이 두 개 뜰리 없듯이 그만큼 잘난 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여자의 울음과 재물 손괴, 자해 행동들은 극에 달했고, 후작의 하늘은 노래졌으며, 후작가의 하녀들은 여자가 찢고 망가트린 커튼이나 드레스 조각들로 자신들의 외출복에 비단 장식을 해 달아 걸핏하면 맞는 따귀의 위자료로 삼았다.



아무리 난동을 부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 여자는 놀랄 만큼 과감해졌다.여자의 보통 아닌 성깔에는 누구도 막지 못할 행동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잘 나가는 후작 여식이였던 만큼, 웬만한 계획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부와 권력이 있었다. 그 동안 여자의 행동을 자제했던 건 고귀한 레이디로서의 평판과 공적 장소에서의 기본적인 사회 규범이었는데, 약혼녀의 등장으로 궁지에 몰린 여자는 그것마저 집어던지고 그녀같은 배경의 여자가 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계획을 세웠고, 그대로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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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로판에 눈을 떠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다가 끄적여 본 글이야. 글 쓰는 게 꽤 재밌긴 한데 처음 쓰는 거라 그런지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다야; 세상의 모든 작가님들 정말 존경합니다! 

프롤로그...비스무리한 남주 부모님 얘기야. 남주가 어떻게 성격 개차반이 되었나 배경 설명...애 성격 버리는 데는 가정 불화가 필수지, 암. 
  • tory_1 2019.05.09 14:12

    그 계획이 뭐야??? 작가님 담편이요!! 급해요!

  • tory_2 2019.05.09 22:36
    재밌게 읽었어! 나도 담편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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