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제목은 <몇 번을 접혀도 하얀>이었어 ㅋㅋ 쓰다말았는데 왠지 아까워서 가져와봤어





몇 번을 접혀도 하얀



출근시간 1호선은 언제나 그렇듯 지옥철이었다. 작은 언론사 사무실에 출퇴근하는 35세 직장인, 류노아는 사람들 사이에 꽉 끼인 채 지하철 위의 작은 광고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신세 확! 바뀌었다. 얘! 아○○○ 성형외과> 

<개인회생 도와드립니다. 변호사 사무소> 


자신들의 초라한 인생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광고 문구들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다. 자신의 인생은 그 광고판들 사이 어디쯤인가 헤아리려다가 그만둔다. 


방금도 5분가량의 정차가 있어 출근 시각이 아슬아슬했다. 손목시계를 흘끔 쳐다보니 7시 25분이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코트 주머니 속에서 전화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예. 류노아입니다.” 

「선배!!! 지금 난리 났어요. 와요. 얼른!」 


전화를 받자마자 쨍한 여후배의 목소리가 높은 데시벨로 울려 퍼졌다. 몇 달 전 입사한 파릇파릇한 언론계 새내기 유리는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기운이 넘쳤다.


“무슨 일인데, 차근차근 얘기해 봐.” 


노아는 혹시 유리의 큰 목소리가 새어나가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볼륨을 낮추면서 전차 출구 근처의 지지대에 몸을 기대었다. 베이지 색 모직 코트를 입은 키 큰 남자가 집중하는 얼굴로 전화를 받는 모습에 주위 몇 여자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런 흔한 모습까지 이목을 모으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어디 남성용 명품 광고의 모델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185cm의 훤칠한 키에, 체구도 운동 꽤나 했을 것 같단 소리가 늘 인사말로 따라붙을 정도로 떡 벌어졌다. 두터운 눈썹과 남자다운 골상까지 갖췄다. 


그런데 눈매는 흔히 말하는 강아지 상으로 약간 처져 있는 긴 눈매라, 체구에 비해 험악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워낙 사람이 잘 웃고 타인을 배려해서인지 사람 자체가 언제나 상냥한 기운이 따라다니는 편이었다. 이러니 일 년 열두 여자라고 주위에서 놀릴 정도로 고백 받는 일이 흔한 인기남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연애할 여유가 없다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하긴, 지금 그가 일하고 있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 말이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직서를 품에 넣고 일한다는 말이 농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매일 매일이 버라이어티한 나날이었다.


3년 전, 사장은 나름 야심차게 <와우 뉴스>라는 이름의 소규모 인터넷 언론사를 창업했다. 하지만 나라는 작아도 언론사는 수백 수천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직원 5명 규모의 신생 인터넷 언론사는 낄 곳이 없었다. 문제는 사장이 늘 일이 잘 안 되면 직원들 탓을 한다는 것이었다. 


「저번 달 PV(페이지 뷰)가 15% 정도나 떨어져서 얼마 없던 광고주들까지 광고 끊겠다고 했대요. 사장님이 노발대발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대체 그동안 기사를 어떻게 썼길래 이 모양이냐고. 기자들 당장 다 오라고, 소집하라고, 특히 류노아 그 새ㄲ부터 오라…… 악!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선배! 제, 제가 말실수한 거예요! 사장님이 그러신 게 아니라요…」


노아는 두 눈을 감고 유리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삼켰다. 그 몇 안 되는 직원들 중에서도 사장은 사람이라고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회사 사람들이 모두 암묵적으로 알고 있듯, 사장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류노아였다. 이게 안 되어도 류노아, 저게 안 되어도 류노아, 뭐가 안 되기만 하면 전부 류노아 탓이라는 논리로 화를 내며 사무실 책상을 뒤집어대는 통에 웬만한 일에는 꿈쩍 안 하는 노아마저도 없던 편두통이 생기려고 할 정도였다. 


어처구니가 없는 점은 정작 류노아를 회사로 데려온 것도 바로 사장 본인이라는 점이었다. 중학교 동창이라는 인연을 통해 당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던 노아에게 손을 내밀어줬던 것이다.


“아. 알았어. 유리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실 방금 시끄러워서 잘 못 들었어.”

「저, 정말요…?」 


응응. 노아는 다정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응. 정말로. 빨리 갈 테니까 일단은 나 갈 때까지… 사장님한테 차라도 끓여줘.”

「네? 차요?」

“응. 지금 상태로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직원들한테도 적당히 나 올 때까지 피해 다니라고 해. 네가 고생이 많다. 유리야. 늘 고마워.”

「아………고, 고생은요. 선배님.」 


목소리에 색이 있다면 유리의 목소리는 지금 바로 연분홍색으로 꽃처럼 물들고 있을 것이다. 유리는 노아의 공치사에 제법 감동한 눈치였다. 그때 막 다음 정거장에 정차한 전차의 문이 열렸다. 문가에 서있던 노아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내주기 위해 비켜섰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이번 차를 놓치면 지각이다! 라는 열기를 두 눈에 품고서 놓치지 않기 위해 발을 들여놓는 통에 문가는 북새통이었다. 기관사는 몇 번이고 ‘문을 닫습니다’ 라고 안내했지만 사람들은 포기를 몰랐다. 


그때 사람들의 물결 사이에서 고꾸라지는 회색 옷자락이 비쳤다. 시장에서 내다놓고 파는 종류의 촌스러운 털실 카디건이었다. 이 시간대에는 흔치 않게 한 할머니가 전차를 타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손에는 봇짐까지 바리바리 싸든 채였으나, 사람들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 저리 채이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출근이 먼저라는 듯 급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혹은 하도 사람들 틈바구니라 미처 발견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제가…… 선배님 한 분만 보고 회사 다니는 거 아시잖아요.」


유리는 그 말을 무슨 비밀 속삭이듯 아주 작게,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노아는 이번에는 정말로 유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럼 조심히 오세요. 헤헤. ……선배님? 선배님. 무슨 일 있으세요?」


노아는 저도 모르게 전차에서 나가 할머니의 팔을 잡고 일으키며 급하게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채로 말했다.


“유리야……. 5분만 더 버텨줄 수 있겠어? 정말 미안. 최대한 빨리 갈게.”

「네?! 선배? 선배? 노아 선배?!」


노아는 휴대폰을 끊고 할머니를 본격적으로 부축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키 큰 남자가 나타나 할머니를 일으키자 그제야 사람들이 할머니의 존재를 눈치 챘는지 피해주기 시작했다. 그 덕에 좀처럼 비지 않던 탑승구가 동그랗게 비었다. 드디어 차를 출발시킬 타이밍을 찾은 기관사가 신나서 문을 닫고 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전차를 놓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노아는 무슨 일이냐고 수선을 떠는 전화를 끊고 할머니를 인파 바깥으로 끌어다 옷을 털고 짐을 다시 챙겨드렸다. 몇 초만 늦었어도 어디 크게 부딪힐 수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할머니는 넋이 나간 모양새였다. 한참을 허공을 보며 노인 특유의 희뿌예지고 있는 동공을 깜박거리면서 혼잣말만 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어머님?”

“아따. 이게 무시랑가. 사람이, 오지게 많아 갖고.”

“제가 모셔드릴……”


아무래도 한참은 더 혼란스러워 할 거 같아 노아가 조심스레 다가가던 찰나였다.


홱.


“비켜. 비켜. 정신이 없으니까! 나 건들지 말고!” 


할머니는 노아를 자신이 들고 있던 봇짐으로 후려치며 저만치로 반대편 플랫폼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노아는 잠시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어찌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찬찬히 몸을 돌려 가까운 플랫폼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기다리는 줄이 길어 맨 뒤에 서자 맨 앞 사람이 잘 안 보일 정도였다.


선행을 베푼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고마워하는 건 아니었다. 류노아는 이미 그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노아는 곤경에 처한 이를 외면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건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도, 그가 선량해서도 아니라……. 


노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상념에 빠질 겨를도 없었다. 반대편 플랫폼에서 요란하게 열차 한 대가 빠져나갔다. 시끌시끌, 갓 데워진 요리가 이곳저곳에서 기름이 튀듯 소음이 튄다. 서울의 아침은 분주하고 눈부셨다. 역사의 전광판에 빨갛게 띄워진 형광색 큰 숫자의 초가 넘어간다.


시각을 확인하니 7시 32분. 불쌍한 유리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장을 막으려 애쓰고 있는 모습이 어렵잖게 상상이 갔다. 


‘이거 미안하게 됐네……’


노아는 눈썹을 올렸다.





광명역 3번 출구 근방. 한때는 위성도시 재개발을 외치며 패기 있게 투자자를 모으던 곳이지만, 지하철 출구 근처만 큰 간판들과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조금 보일 뿐, 5분만 걸어 들어가도 꼬불거리는 구시가지와 옛 다방과 정체 모를 방석집들이 가득한 흔한 한국의 동네이다.


그 중에서도 주택지와 얽혀있는 복잡한 낡은 빌라 중 하나에, 정체 모를 마사지 가게 위의 2층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와우 신문사>의 하나 뿐인 사무실이었다. 


칙칙한 계단을 타고 올라갈 때면 항상 이상한, 퀴퀴한 냄새가 나곤 한다. 노아는 잠시 코끝을 찡긋거렸으나 절레절레 혼자 고개를 내젓고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 문이 열리자마자 노아를 향해 서류들이 눈처럼 쏟아진다. 11월의 눈인가. 노아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자신의 얼굴 위로 쏟아진 서류들을 잡아서 자기도 모르게 습관처럼 정리하고 있는 가운데, 그 서류들을 던진 범인은 분이 안 풀리는 얼굴로 숨을 씩씩거리며 사장 명패 뒤에 서있다. 


서정한. 벌이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용을 그려놓은 명패하며, 번드르르한 양복이 알려주듯 치장을 좋아하는 사내였다. 어렸을 때 유도를 한 것 때문인지 그는 키는 노아보다 작아도 단단한 어깨와 몸집을 갖고 있었다. 화를 낼 때는 온몸의 근육이 정장을 뚫을 듯 실룩여 꽤나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어디에 쳐 있다가 이제야 기어 들어오냐? 회사 일이 장난 같아?”


노아는 두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건 정한에게 겁을 먹어서라기보다는, 전혀 겁먹지 않은 눈초리를 감추려는 행동에 가까웠다.


“……사실 출근 시각은 8시라 지각은 아닙니다만.” 


노아는 사무실의 8시 10분 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말했으나 역시 소용은 없었다. 작은 회사가 자주 그렇듯 이곳의 출퇴근 시각도 물리적인 시간보다는 서정한의 심리적 시간에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서정한이 꼴리는 시간에 나오고 들어가라 그 말이었다. 


“내가 지금 그런 걸 물어봤냐, 병신 새끼야?”


쾅!


명패까지 바닥에 집어 던지며 서정한이 포마드를 발라 치켜세운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마른세수를 했다. 바닥에 튕긴 명패가 벽 한쪽에 긁힌 흔적을 냈다. 벽지가 부욱 찢어진다. 기자보단 조폭을 연상시키는 과한 퍼포먼스에, 3명의 여자 기자들은 겁이 나는지 눈치를 보고 있다. 다만 유리는 겁에 질리기보단 화가 나는지 팔짱을 끼고 서있고, 다른 남자 기자는 그 상황이 그저 웃긴지 혼자 컴퓨터로 뭘 보며 킬킬대고 있었다. 얼핏 보니 고스톱 화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모니터 보안 필름 좀 붙이라니까.’ 


노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김준은 여러 언론지에 고용돼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남자였는데, 꼭 그래서라기보다는 그의 성격 탓으로 어디에도 책임감이 별로 없었다. 모든 일을 그저 관망하듯 보며 킬킬댈 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산업이랑 ○○다이어트 쪽이 우리랑 광고 끊고 싶단다.”

“잠시 좀 읽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건방진 새끼.”


정한이 뭐라고 비아냥거리든 말든, 노아는 정한이 건네준 최종 서류를 읽느라 바빴다. 귀사의 번영을 바라며, 따위의 흔한 문구를 제거하고 보면 결국 ‘너희 신문 점점 보는 사람 떨어지는 거 같고 전망 없으니 광고 끊겠음’ 이란 뜻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장님, 저희는 아직 신생 매체입니다. 초반에 고정 독자를 만들고 자리를 잡기 전까진 어느 정도 고전을 하는 게 당연해요!”


유리가 뒤에서 주먹을 쥐고 말했다. 그러자 정한이 쾅, 자신의 책상의 유리를 때렸다. 사장실이라고 분리할 곳도 없어 그저 큰 책상과 쇼파 두 개, 접대용 테이블을 갖다놓은 곳이 그의 업무공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그가 저리도 부수고 흔들어대니 얼마나 갈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나 더 말을 해야 알아들어?! 우리 같은 삼류 인터넷 매체에 고정 독자가 어디 있냐고. 유리 씨. ○○○ 알아? ○○○○ 알아? ○○○○○ 같은 곳, 매일 들어가서 봐?”

“아…….”

“대답 안 해?!” 


유리가 고개를 숙이자 하나로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마치 풀 죽은 강아지 같다.


“아니요…….”


그렇겠지. 지금 정한이 줄줄 읊은 곳들은 주로 실시간 검색어가 뜨면 그에 관련된 기사를 미친 듯이 올려 클릭 수를 올리는 종류의 곳들로, 저질 광고나 정보성 부족한 기사들만 가득해 굳이 사람들이 들어가 보지는 않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 사장은 자신의 신문도 그런 신문들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유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노아가 찬찬히 페이지를 넘겨 이번 사태로 인해 줄어드는 예산 문제가 담긴 표까지 확인하는 걸 보고 난 후, 정한이 폭탄선언을 했다.


“넣자, 성인광고.”

“예에--?!” 


유리와 몇몇 여성 기자들이 펄쩍 뛰었다. 하지만 김준은 ‘찬성이요’ 하고 손을 들고 휘적거렸다. 두 눈은 여전히 고스톱의 화려한 패들에 꽂힌 채였다. 어절씨구. 쓰리 고가 났다. 


서정한은 이미 성인광고주들과 이야기가 다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는 보기만 해도 민망한 광고 시안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가슴과 엉덩이가 확대되어 흔들리는 온갖 움짤들과 함께 야시시한 문구들이 적혀있었다. 명문대 여대생 K양이 은밀히 밤마다 향하는 곳? 커도 너무 커? 다음 중 섹스와 농구의 차이점은? 매부, 그만해요! 아내가 여고생이 됐다? 날뛰는 야생마 같은 남편을 만들어준 비결 대공개……,


여기자들은 메두사를 본 사람들처럼 바위라도 되듯이 굳어만 갔다. 노아는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는 듯 입술만 굳게 다물 뿐이었다. 김준은 괜히 욕심을 걸어 다음 판에도 고를 불렀다가 됫박을 쓰고는 혀를 쯔쯔 찼다. 사무실에는 쌀랑한 늦가을 바람과 함께 침묵만이 감돌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회사의 점심시간. 사장은 언제나 그렇듯 ‘중요한 사람’과 미팅이 있다며 따로 식사를 하겠다고 나간 뒤였다. 하지만 그가 미팅을 누구와 하는지, 미팅으로 어떤 소득을 올렸는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직원들 몇 명은 사장에게 비밀스러운 애인이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을 떠들곤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더 중요한 이슈가 있었다. 두 블록 옆 카페에서 외근을 나간 김준을 제외하고 옹기종기 모여든 기자들은 성인 광고가 추가되는 것에 대해 우려 섞인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특히 유리의 목소리는 옆 테이블들에서 가끔씩 시선이 올 정도로 격했다.


“저희 신문의 시작은 이렇지 않았잖아요! 건전하고, 중립적이고, 새로운 뉴스 매체를 지향하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후원자도 모으고, 홍보해서 저희도 채용하신 거잖아요! 그런데 점점 기사도 무조건 클릭 수를 높일 수 있는 것만 쓰라고 하고, 성인 광고까지……. 이건 사기예요! 저는 좋은 기자가 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건데…… 이러면 제 커리어도 엉망이 될 거예요. 이곳에서 경력을 쌓아서 더 좋은 신문에 가서 어엿한 사회부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유리는 말을 하다 말고 감정이 북받치는지 테이블에 엎드렸다. 동그란 안경을 쓴 이원아라는 이름의 고참 여기자는 체념을 한 투였다.


“그냥 넘어가. 사장이 뭐 하겠다고 한 다음 지 의사 꺾은 적이 있어? 사실 광고 없이 언론이 어떻게 유지가 되겠어. 우리는 뭐 땅을 파서 돈을 버나. 당연한 수순이야. 이렇게 삼류 찌라시 언론이 하나 더 대한민국에 탄생하는 거지.”


긴 생머리의 박경우라는 이름의 귀여운 상의 막내 여기자가 한숨을 폭 쉬었다.


“기자를 하기 전에는 그런 삼류 언론들은 대체 왜 있나 싶었는데 다 사정이 있었던 거네요. 사실 다들 멋진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거겠죠?”

“쓸데없이 또 감정 이입하고 있다. 우린 그냥 꼬박꼬박 월급이나 밀리지 않고 받음 기적인 거야. 내가 먹고 사는 게 최우선, 최우선이라고! 알겠냐, 기집애?” 


원아가 경우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유리는 여전히 엎드린 채 테이블을 손톱으로 박박 긁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커리어가 망가지는 것이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는 좋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음에도 굳이 언론계 직종이 하고 싶다며 이 시답잖은 직장에 찾아온 것이 그녀였다. 부모며 주위가 모두 말렸지만 용기를 냈다며 해맑게 웃던 것이 고작 몇 달 전이건만 그 미소는 이제 사그라지고 없었다.


테이블의 유일한 남성인 노아는 말없이 코트 차림으로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본래도 말수가 적은 노아였지만 이 날은 더욱 더 말이 없었다. 


“선배, 그러고 보니 오늘은 왜 늦은 거예요? 전화도 갑자기 끊으시고, 지하철에서 일이 있으셨나?”


보다 못한 유리가 말문이라도 틔워주고 싶었던 것인지 고개를 번쩍 들며 노아에게 물었다. 테이블에 짓눌린 탓에 이마에는 빨간 원이 그려진 채였다. 말총머리가 살랑 테이블 뒤로 떨어진다. 노아는 유리의 이마에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멀리하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냥. 할머니 한 분께서 문에 낄 뻔 하셔서.”

“아아! 선배가 도와주셨구나? 하여간, 선배는 너무 착하다니까.”

“맞아 맞아. 노아 씨 같은 사람, 요즘 희귀종이야. 거의 멸종 직전이라구.”


원아도 유리의 말을 거들었다. 


“……….”


노아는 별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저을 뿐이었다. 별달리 들뜨는 기색도, 그렇다고 싫다는 기색도 없는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하긴 이 빡빡한 대한민국 서울에서 착한 사람으로 산다는 건 자기만족이나 알량한 사명감 따위로 하기에는 지나치게 힘든 일이었다. 그야말로 천성이라고밖에….


여기자들은 그렇게 제멋대로 해석하며 일제히 동경의 눈초리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시멘트 색 칙칙한 작은 이 언론 회사에서 류노아의 존재는 빛나는 금성, 아이돌 그 자체였다. 잘 생긴 외모에 완벽한 매너와 성인군자 못지않은 도덕성, 거기다 글 솜씨까지 좋고 현장도 잘 뛰었다. 


그래서 모두들, 심지어는 시니컬한 이원아마저도, 노아의 한마디면 끔뻑 죽으며 접어주곤 했던 것이다. 그간 회사를 이끌어왔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진정한 사장은 서정한이 아니라 노아일지도 몰랐다.


“선배! 혹시 선배가 이번 성인광고 건 막아보면 어때요?”


유리가 문득 소리쳤다. 그러자 원아와 경우도 빤히 노아를 바라보았다.


“맞아 맞아. 그래도 그나마 선배가 사장 동창이잖아. 말이 먹혀도 더 먹히지 않겠어?”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사장님이 노아 선배님을 싫어하시는 거 같지만.”

“선배! 선배가 여기서 그래도 가장 성과도 많이 내고 있고 생각도 똑바로 박혀 있잖아요!”


경우의 희미한 목소리는 두 여자의 아우성 중앙에서 묻힌 모양이었다. 노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굵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한이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애초에 동창일 때도 서로 좋은 친구는 아니었어.”

“예? 그럼 왜 스카웃까지 해서 일은 같이 하는 거래요.”

“……어쩌다 보니.”

“참나. 말 안 해줄 거라는 거구나. 좋아요. 뭐. 선배는 비밀이 많으니까.”


유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자신의 핫초코 컵을 빙빙 돌렸다. 


“그런데 정말, 이런 기자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자극적인 기사나 막 쓰고. ‘무슨 무슨 연예인 알고 보니…… 헉!’ 해놓곤 3년 전 일 갖다 써놓고. 그런 거 말이에요.”


유리는 젖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마치 정말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거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


노아는 찬찬히 유리를 바라보았다. 남들보다 밝은 편인 노아의 갈색 눈동자에 유리의 쓸쓸한 옆얼굴이 담겼다. 


“나쁜 짓을 하는데,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세상 탓이야, 하고 변명을 하면서 하는 사람. 그니까, 그런 사람이 전 제일 최악이라고 전부터 생각해오고 있었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정말 나쁘게 좀먹는 거라고요. 자기변명뿐인 악당들 말예요. 이 세상은 어떻게 늘 맞았다는 사람만 있고 때렸단 사람은 나오지를 않잖아요? 그게 다 이런 것들 때문이라고요. 다들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 버리니까. 그리고 맞았을 때만 아프다고 야단들이죠.”


노아의 눈동자가 천천히 깜박거렸다. 그때 갑자기 원아가 테이블이 몇 센티미터 쭉 밀려날 정도로 앞으로 몸을 빼며 유리에게 달려들었다. 유리는 그 바람에 쇼파로 발라당 뒤로 넘어진다.


“어쭈. 시 쓰고 있어. 야. 너도 이리 와! 경우만 애기인 줄 알았더니 너도 오늘 좀 당해봐야……”

“앗! 싫어요. 언니!”


원아가 유리의 볼을 쭈욱 늘리려던 때였다. 노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생각해볼게. 대안.”

“예?” “진짜?” “정말요?” 숨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세 여기자가 연달아 놀라워하며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꼭 이게 될 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새로운 기획기사를 써서 수익을 낸다든가, 여러 가지로 광고를 막을 수 있는 기획안 써볼 테니까. 다들 기대는 너무 하지 말고 기다려 봐요.”

“와-! 선배!! 역시, 역시 선배뿐이에요. 선배는 너무 멋있어!”


유리가 바로 두 눈에 광채를 띠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카운터의 여직원까지 돌아볼 정도로 그 목소리와 몸짓이 컸다. 하지만 다른 여기자들도 흥분한 건 마찬가지라 그녀를 말릴 정신도 없어 보였다. 


셋이 가능한 기획안이 무엇이 있을까 골똘히 머리를 모으고 고민하는 동안 노아는 ‘아.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라고 말하며 일어섰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카페 직원에게 화장실 위치를 물어보았다. 여직원은 매우 얼굴을 붉히며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어, 노아는 잠시 그것이 그리 말하기 쑥스러운 일인가 의아하게 여겼다. 


물론 그 직원은 노아의 모습이 멀어지자마자 부리나케 옆의 다른 직원들에게 눈짓을 보내 그들을 카운터의 구석으로 불러들이기 바빴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서로의 감상을 나누기 시작했다.


“서강준 닮았지 않아?” 

“좀 고수 느낌인데.” 

“아냐, 내 말 들어봐. 내 말이 무조건 맞아. 무슨 아이돌 닮았어. 있잖아. 그 수목 드라마의.” 

““걔는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그들이었다.




노아는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 앞에서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낡은 화장실 안에서 액정의 푸른빛이 껌벅거렸다. ‘이번에 예산 메꾸지 못함 정말 모가지인 줄 알아. 씹새끼가 힘든 때 도와준 은혜도 모르고 점점 기어올라.’ 서정한이 보낸 것이었다. 


탁. 노아는 휴대폰을 닫고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최대한 찬 물을 두 손에 받아 얼굴을 한 번, 두 번, 세 번 적신다. 그럼에도 핏기가 남아있었다. 노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놓았다. 


《넌 지금부터 내 똥개 새끼야. 알아들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라고.》


3년 전. 중학교 동창회 술집 2차 자리에서 멱살을 잡히고 끌려나온 뒷골목. 에어컨 실외기와 쓰레기봉투들이 가득한 그곳에 강제로 무릎을 꿇린 채 류노아는 서정한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나는 네 시꺼먼 과거를 다 알아.》


노아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여기자들을 돕기로 한 것이 좋은 선택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유리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노아는 정한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기자들을 달랬고, 회사가 굴러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리가 들어온 이후, 노아는 의식하지 못하는 새 기자들의 편을 조금씩 더 들게 되었다. 


아직도 순진하게 세상에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유리의 눈을 보면 노아는 속이 체한 듯 거북해졌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가 유리를 비호해줄 수 있을까.


……그때였다.


거울에 비치는 노아의 얼굴 뒤로 기묘한 형체가 보였다. 노아는 그를 처음에는 굼벵이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것은 너무 말도 안 된다는 깨달음이 뒤따라왔다. 우선, 굼벵이가 저리 클 리 없으며, 두 번째로 그런 것이 설사 어디 아프리카 오지에 있다 해도 구의역 카페 남성 화장실에서 직립보행하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눈가에 묻었던 물방울들이 튕겨나가며 시야가 밝아지자 그것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온몸을 꽁꽁 싸맨 남자의 모습이란 것이 그제야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소시지 같은 롱 패딩을 지퍼를 모두 올리고 모자까지 눌러썼고 거기다 선글라스에 마스크, 목도리까지 했다. 양손은 장갑을 꼈으며 두 발은 두꺼운 부츠를 신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스프레이 통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노아는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인식하는 것과 별개로, 도저히 그의 모습이 상식적이라고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황망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굼벵이, 아니, 롱 패딩의 남자가 어기적어기적 세면대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춰 이곳을 빤히 보는 것이 비켜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도 같다. 그러고 보면 저기 화장실 칸 중 하나에서 나온 것도 같으니 손을 씻을 차례인 거겠지. 하지만 비켜달라고 말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예 세면대 가까이 걸어오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있는 모습이 심히 의심스럽고 이상했다. 게다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눈에 들어온 그 스프레이 통에 적혀있는 상호명은 - ‘치한 퇴치 스프레이’. 어째서?


굳이 따지자면 본인이 더…… 치한 같이 생겼는데.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는 노아였다.


“………….”

“………….”

“………….”


이대로 있다가는 서로 삼십분도 더 넘게 대치하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아는 손을 털고 남아있는 물기가 찝찝해 페이퍼 타월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그곳은 하필이면 굼벵이 바로 뒤 벽면에 있었다. 노아는 왠지 더 찝찝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오지 마!”


순식간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매운 연기가 허공에 분사되어 노아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허리를 수그렸다.


“윽!”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눈을 순식간에 감았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은 연기의 성분이 들어왔는지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설마 치한으로 보여 퇴치된 건가. 노아는 바둥거리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가까운 벽의 타일을 잡았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 지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름대로 노련한 기자라고 생각했는데, 당황스러웠다.


“오, 오, 오, 오, 지 마.”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음에도 굼벵이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온 공기로, 온 몸의 감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건가? 순간 그 생각이 뇌리에 스쳐 노아는 고통스러웠지만 입을 열고 한 음절, 한 음절을 또렷이 발음하려 애썼다.


“아…… 윽, 저, 오해하지 마세요. 해치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다, 다, 가오지 말랬지! 주, 죽여 버릴 테니까.”


노아는 타일을 잡고 있는 손을 기억하고 있던 위치대로 슬금슬금 움직여 예상했던 플라스틱 박스를 찾아내 타월을 한 장, 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뽑으며 말했다.


“페이퍼 타월을 뽑으려 한 거였어요. 진짜예요. 봐, 봐요.”

“………….”


잠시 화장실 안에 썰렁한 침묵이 감돌았다. 노아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마치 항복하는 장군이 백기를 흔들 듯이 한 손에 페이퍼 타월을 들고 힘없이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노아는 순간 이 화장실에 그와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신에게 감사했다. 만일 지구상의 단 한명이라도 이 꼴을 보았더라면 다음날부터 거리를 걷는 데 이전만한 자신감은 가지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돌부처 같은 류노아라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었다.


굼벵이는 잠시 그의 해명에 대해 생각해보는 듯 조용히 서있었으나 이 상황은 그의 생각에도 그의 잘못이 맞는 듯했다. 놀랍게도 그에게는 그 괴이한 행색과 언행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사실을 받아들일 정도의 인지력은 있는 것 같았다.


“미…………미안.”

“예……. 스프레이는 확실해졌을 때 뿌리세요. 아프네요.”

“마, 많이 아파? 병원 부를까?”


체형이나 목소리가 성인 남성임이 분명한데도 말투는 어딘가 앳되다 싶었더니, 언어 사용도 좀 이상하다. 노아가 물었다.


“‘병원’은 어떻게 부른답니까?”

“……응? 119로. 전화, 열고 1, 1, 9 누르고 주소지 말하면 와. 몰랐어?”

“………….”

“사실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어.”


굼벵이가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듯 말해주었다. 퍽이나 위로가 되는 내용이었다. 노아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조금 눈이 뜨여졌다. 겨우 눈을 뜨자, 굼벵이가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그리 가까워져 있는 줄 이제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보, 보, 보지 마.”


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한 굼벵이는, 초특급 스피드로 손을 씻으려 하는 듯 했으나, 그러기에는 장벽이 너무 많았다. 우선 장갑을 벗어 물에 젖지 않을 곳에 보관해야 했고 자신이 직접 가지고 다니는 듯한 가루비누가 담긴 상자를 열어 물에 개어야 했으며 그것을 또 모든 손가락에 문지르고 손바닥도 15초 이상 문대야 하는 등 복잡하고 정교한 그만의 세수법을 전부 수행해야만 하는 듯했다. 그러는 와중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인지 자꾸 그의 손은 무언가를 흘리거나 어딘가에 부딪혔으며 모자는 시야를 계속 가려 위로 올려주길 몇 초마다 반복해야했다. 


“보, 보지 말라고 했잖아! 죽인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나가고 있었습니다.”

“저, 정말. 저, 정말. 너무, 너무…… 서.”

“예? 괜찮으세요?”


굼벵이는 갑자기 모든 게 견딜 수 없어졌다는 듯 펑펑 울면서 물건들을 다 던지고 달아나버렸다. 노아는 당황하여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당황한 노아를 내버려두고 냅다 가버리는 사람의 모습이, 어쩐지 오늘 아침의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의 데자뷰 같기도 하다.


종소리가 들리는 거로 보아 굼벵이는 바로 카페 밖 대로로 뛰쳐나간 모양이었다. 


‘어디 아픈 사람인가.’


노아는 황당함에 메마른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껍질을 탈피한 벌레마냥 애벌레는 세면대 위에 이것저것 그의 물건을 남겨두고 갔다. 노아는 카운터에 물건들을 챙겨줄 요량으로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래도 그에게는 소중한 물건들일 것이다.


노아는 손에 잡힌 스프레이 통을 들고 흔들어보았다. 통 안에서 사분의 삼 정도 남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저거, 미친 거 아냐?”


2018년 서울, 사람들은 대로 한복판에 나타난 때 아닌 거대 굼벵이의 모습에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검은 롱 패딩을 입고 발에 맞지도 않는 것 같은 큰 부츠를 신은 채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는 큰 형체의 모습은 정말로 굼벵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모자에 선글라스, 목도리로 얼굴은 한 치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가린 채였다. 


“연예인이라든지?”

“아냐. 너무 돌아이로 보여.”

“혹시 전신성형 같은 거 아닐까?”


두 여자가 큰 소리로 패딩을 입은 남자 귀에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굼벵이는 발걸음을 더 빨리 했다. 패딩 안에서 땀이 뻘뻘 났다. 11월 날씨에 패딩은 아직 더웠다. 어서 한겨울이 오면 좋을 텐데. 남자는 차라리 어서 한파가 오기를 바랐다. 폭설주의보가 내리기를 바랐다. 온 서울의 거리에 하얀 눈이 무릎까지 쌓이고 사람 하나 없는 고요한 밤이 오면 그때에서야 남자는 자유롭게 곳곳을 활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한 일. 남자는 방금 카페 화장실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며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위가 경련을 일으킬 듯 아파왔다.


《저, 오해하지 마세요. 해치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키가 큰 남자가 괴로움에 허리를 꺾고 기묘한 자세를 하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죄 없는 남자에게 스프레이를 써버렸다. 


‘현이 꼭 필요할 때만 쓰라고 준 건데…….’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또 저질러버렸다. 남자는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사람, 화도 내지 않고 조곤조곤 말해주고. 다른 사람들과 좀 달랐어.’


이전에도 두 번 정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은 경악과 분노로 남자를 대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괜찮으세요?》


자신에게 스프레이를 뿌린 사람까지 걱정해주던 그 낮은 목소리. 왠지 안심이 되는 울림감이 있는 목소리였다. 


《괜찮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하지만 남자는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그렇게 잘해주었던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지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서로 귀엣말을 하고,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남자는 순간 넘어질 듯 앞으로 휘청거렸으나 다시 힘을 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병원이 300m 앞이었다. 고작 300m. 도보 5분 거리가 그렇게 멀고 힘겹게 느껴졌다.




“또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참으려고 했는데. 사람들도 다 보고 있었는데.”

“그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분노조절장애시니까 약을 드시라고.”

“미친 새끼 아냐, 이거?!”

“아, 씨발. 돌겠네. 이거.”


김현 신경정신과 원장, 전문의 김현은 오늘도 잇새로 욕을 뱉으며 환자 상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 두 명이 초조한 눈길로 원장실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환자가 없어 텅 비다시피 한 병원인데 오늘은 또 원장이 무슨 까칠을 부려 환자를 쫓아낼까 싶었다. 


김현. 한국 최고 의과대학 출신에 미주, 유럽 등에서 역시 명문 의과대학과 유명 병원만 거치며 수련을 거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이 분야에서는 실력도 최고급으로 꼽히고 훌륭한 논문도 많이 적어 멋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존경까지 받는 작자였다. 하지만 그럼 무엇 하랴. 


‘성격이 저리 더러운 것을…….’


환자들과도 대판 싸움을 하곤 하는 한 성질의 소유자. 세상 무슨 일이든 금세 트집을 잡아 불평할 수 있는 세계 최강 염세주의자. 그것이 김현의 실체였다. 


결국 화려하게 대리석으로 꾸며놓은 병원에 드나드는 환자들은 몇 없었다. 김현이 하도 약을 잘 써서 그 성질머리를 감당할 각오를 하고도 찾아오는 중증 환자 몇 명, 지금처럼 김현과 맞서 싸울 정도로 제정신 아닌 환자 몇 명, 그리고…….


땡그랑.


종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문 뒤로 모습을 드러낸 건 기다란 검은 소세지 패딩, 굼벵이 남자였다. 간호사 둘이 ‘왔군’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있는 간호사 쪽이 눈짓을 하자 젊은 간호사가 얼른 원장실로 달려갔다. 그의 도착을 빨리 알리지 않으면 김현이 나중에 온갖 난리를 피우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있는 간호사는 데스크에 남아 몇 번을 보아도 경이로운 굼벵이의 탈피 과정을 다시 보고 있었다. 패딩을 벗어 던지자 그곳에는 굼벵이는 없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소년미를 간직한 채인 미청년 한 명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참 언제 봐도 놀랍단 말이지.’ 


간호사는 속으로 되뇌었다. 정신 상태만 괜찮았더라면 어디 연예인을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물론 이 병원에 오는 환자인 이상, 글러먹은 거지만 말이다. 


남자는 답답했던 의상을 해체하자 좀 살 것 같은지 휴, 숨을 내쉬었다. 자연적으로 조금 곱실거리는 머리칼이 그에게는 참 잘도 어울렸다. 동양판 피터 팬이 있다면 바로 이 청년일 것이다. 남자는 속눈썹이 긴 눈을 한참 깜박거리며 숨을 들썩거렸다. 아직도 약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유은서 씨 왔습니다, 원장님.”


젊은 간호사가 달려가 원장실의 문을 두드리며 말하자마자 김현이 용수철마냥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이런. 당신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 왔군!”


그는 황망해 하고 있는 환자에게 ‘약이나 받아서 쳐나가세요. 밥 꼭꼭 드신 후에 하루 3번씩 쳐드시고요.’ 라고 말하고는 원장실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야, 여기는 병원이 무슨 이따위로 진료를 하냐!”

“환자 분. 긴급 환자가 있어서 그런 거니 나가주세요.”

“야, 의사 이 개새끼야! 네 위장을 꺼내 팔팔 끓여줄까?!”


간호사들이 질질 끌고 나가는 동안 환자는 사방에 팔다리를 휘저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든 말든, 김현은 은서를 만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은서야! 정말 오랜만이다! 어제 보고 그 뒤로 한 번도 못 봤잖아. 이게 말이 돼?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환자를 대할 때와는 놀랍도록 다른, 상냥하다 못해 부담스럽고 느끼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그러나 은서는 멀뚱멀뚱 눈만 깜박이며 그를 볼 뿐이었다.


“나 보고 싶었지? 응?”


보다 못한 김현이 은서의 대답을 유도하듯 얼굴을 들이밀었으나 은서는 여전히 인형처럼 눈만 깜박거렸다. 김현이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서 말했다.


“어허. 아직도 치료가 덜 됐네. 이럴 땐 ‘나도 보고 싶었어. 현아.’ 라고 말하라니까.”

“……나, 도 보고 싶었어.”


앵무새가 말을 배워 그대로 따라하듯 감정 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김현은 그 모습도 귀여워죽겠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띤다.


“옳지 옳지. 근데 ‘현아’는?”

“……….”

“현~아~라고 불러봐. 응? 현이 형이라고 해도 좋고. 내가 너보다 3살 위니까.”

“꼭… 해야 해?”


그때에서야 두 간호사는 발악하는 분노조절장애 환자를 어떻게든 문 밖으로 밀어냈다.


“선생님. 은서 씨 그만 괴롭혀요. 의사가 치료를 빌미로 본인 사심이나 채우려 하심 어떡해요.”


젊은 간호사가 김현을 말렸다.


“사심?! 사심이라니?! 은서를 위하는 내 이 뜨거운 마음이 보이지 않는 거야?!”


김현은 당장에라도 가운을 뜯어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라도 보여줄 듯 오버 액션을 선보이며 말했다. 정말 갈비뼈를 뽑기라도 할 기세다.


“……그러니까 그 뜨거운 게 바로 사심이라니까요.”


나이 든 간호사는 문을 마구 두드리는 환자 앞에서 문을 걸어 잠근 뒤에야 대기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접근 치료 확인이요. 선생님.”

“아. 맞다.”


김현이 손뼉을 짝 치며 은서를 바라보았다.


“오늘 오는 길에 요 앞 카페에서 커피를 사오기로 했었지? 약속 시간보다 늦은 걸 보면 카페에 들르기는 한 거 같은데……. 어디 보자. 커피가…….”


은서는 말없이 김현을 올려다보았다. 그 두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다. 김현은 그 태도에 실패를 직감하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는 습관적으로 왼쪽 입 꼬리만 올라가는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아니, 뭐, 한 번에 성공할 거라곤 생각 안 했고. 원래 트라우마 치료란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니까 너무 좌절 말고……. 응? 은서. 울어? 뭐야. 무슨 일 있었던 거야?”


그는 유은서와 8년을 함께 한 오랜 주치의였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유은서는 DSM-5(정신과 편람)의 분류에 의하자면 ‘사회공포증’을 중증으로 앓고 있는 만성 환자였다. 각종 인지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했으나 별 효력이 없었다.


“……나, 나 오늘.”


최근 김현은 그에게 노출 요법(공포의 대상에 점차 노출시켜 공포의 대상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학습시키는 것)을 시키기 위해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오는 과제를 시킨 참이었다. 그러나 은서는 빈손으로 돌아온 데다 벌벌 떨며 눈가가 어두운 것이 영 불안해 보였다.


“말해봐. 은서야.”

“………….”

“설마, 설마 누가 우리 은서를 해친 건 아니겠지?”


김현이 불길한 예감에 외쳤다. 그런데 예상 외로 그것이 빙고인 모양이었다.


“누가…… 누가 화장실에서…… 막 다가오기에 나도 모르게…….”

“뭐라고? 누가 화장실에서 은서에게 다가갔다고? 잠깐만.”


김현은 바로 의사가운의 소매를 걷으며 씩씩하게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 새끼 좀 죽이고 온다.”

“원장님. 진정 좀 하세요.”

“은서 씨 얘기 좀 들어봐요.”


간호사 두 명이 김현을 말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대체 인간혐오자 원장님이 왜 저리 유은서만 끔찍하게 아낄까. 아니. 뻔하지.’


두 간호사는 유은서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간 표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은서 씨만 불쌍하게 됐지. 저런 인간말종과 엮이다니.’


모든 인간을 싫어하는 주제 정신과 의사인 역설 그 자체의 인간 김현.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세상에서 사랑하는 존재, 유은서.


어쩌면 김현 눈에 은서는 온통 새까만 세상의 단 한 점 흰 빛인지도 모를 일이다. 온갖 실수와 아집, 악으로 가득한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깨끗한, 그러나 그래서 상처를 입고 마는 은서에게 모종의 비감을 느끼고 있기라도 한 걸까.




잠시 뒤, 은서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며 애써 카페에서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가 착, 착각으로 잘못 없는 사람을…….”


과잉반응. 흔한 피해자들의 후유증이었다. 사람들은 무언가의 ‘피해자’라고 하면 지고지순한 이미지만을 떠올린다. 마치 찢긴 꽃잎처럼 그저 상처 입은 자리에 못 박히듯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도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럴 때마다 피해자들의 뇌는 이전의 피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과잉으로 보호하게 되고 잘못 격발된 방어 기제는 주위에 새로운 가해를 가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끔찍한 몰이해와 고립을 부른다.


김현은 잠시 침묵했다. 간호사들도 침묵했다.


이 분야에서 일하다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 성범죄를 당한 후유증으로 몇 년을 씻지 않아 모두가 꺼려하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사람부터, 양부모의 학대의 후유증으로 온몸이 찢어질 정도로 목욕을 반복하는 사람까지. 그러나 그들이 모두 주위의 매몰찬 시선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만은 같았다.


“…………음. 혹시 고소고발한다든?”

“아…………아니.”

“그럼 됐다!”


김현은 박수를 쳤다. 그는 고민하던 모든 것이 풀렸다는 듯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한 얼굴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간호사들 역시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끔한 얼굴들이었다.


“차나 가져올까요?”

“은서 씨, 차 뭐 드실래요? 따뜻하게 내올게요. 화과자도 좀 있어요.”


간호사들도 은서의 해프닝 이야기를 듣고도 조금도 은서를 꺼려하거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덤덤히 말을 걸 뿐이었다. 은서는 ‘아……’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이곳은 은서라는 굼벵이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집 밖의 공간. 말하자면 지난 8년간의 그의 둥지였다. 은서는 고개를 숙였다가 숨을 파 뱉었다. 겨우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동안 과하게 올라갔던 심장 박동이 조금씩 잔잔해지고 있었다. 


“하, 하, 하지만.”


달그락거리며 차와 과자를 내오고 있던 간호사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내가 그 사람……한테 잘못한 거잖아.”


은서는 고집스럽게 입을 뗐다.


“그 사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내가 스프레이를 쏴서 아팠을 텐데……. 근데 오히려 나보고 괜찮으냐고 물어봐줬어.”


그 부근에 이르러 은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좋은 사람……같았어. 이상하지?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는데.”


은서는 손가락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 그 사람한테. 나 할 수 있을까?”






태양이 뉘엿뉘엿 지평선에 몸을 늘어뜨린다. 미세 먼지로 뿌연 옥상 위에 서정한은 담배를 물고 세상에 연기를 더하고 있다. 서정한에게 호출 받은 류노아는 코트를 흩날리며 좁은 계단을 올라 와우 언론사 건물의 옥상에 올랐다. 서정한이 고개를 돌려 노아를 보았다.


그는 정말로 개를 대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로 손을 들어 입까지 모아 ‘쯔쯔’ 소리까지 내며 노아를 가까이 불렀다. 노아도 사람인지라 굴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정한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나 정한의 시비는 그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코트 좋네?”라고 말하더니 노아의 어깨 위에 담배를 비벼 껐다. 코트가 두껍다고 해도 불쾌한 느낌이 아예 전해지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노아는 이 역시 인내했다. 


정한은 노아가 계속 참기만 하자 재미가 없다는 듯 혀를 찼으나 곧 본론에 들어갔다.


“네 제안서 봤다. 성인 광고를 넣지 말고 기획 기사를 추진하고 SNS 마케팅이 필요한 업체 등에 그걸 제공해서 예산을 끌어오자, 한마디로 그거지?”


노아는 역광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서정한의 어두운 얼굴을 응시하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미 한 업체와 연락도 해봤는데 반응이 호의적…….”

“있잖아. 난 중학교 때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다.”


서정한은 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고 손을 털며 읊었다. 이빨 사이로 가래침을 뱉는다.


“항상 전교 1등에, 품행방정, 길을 가다가도 폐지 줍는 할아버지 리어카를 밀어드리고 강도당하는 아가씨를 도와줘서 표창장을 받는, 모두가 흠잡을 데 없다고 하는 녀석. 그런 건 거짓말인 게 당연하잖아? 그래서 네 진짜 모습을 알았을 때 정말 기뻤지. 네가 내 개가 돼서 일할 때도 정말 신났다구. 그런데 요새는 뭐야?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라도 하고 싶은 거야? 왜.”

“……….”

“‘좋은 사람’인 척 허허실실하고 있어? 뒤지고 싶냐?”


노을빛에 정한의 살벌한 눈동자가 비쳤다. 노아는 말이 없었다. 


“네까짓 게 조금 깨끗하게 살아본다고 이전의 과거가 다 지워질 줄 아냐?”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비로소 담담하게 대꾸하는 노아의 낯빛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럼 요새 하는 건 뭐냐. 마스터베이션? 회개?”

“그냥 하는 것뿐이야. 너도 밑의 기자들이랑 갈등 있음 피곤하잖아.”


정한은 품에서 정체 모를 약을 꺼내 입에 털어놓고 물도 없이 꿀꺽 삼키고는 노을 지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도시계획 없이 지어진 한국의 도시답게 스카이라인도 엉망이었다. 정한은 쌉싸래한 입 안을 마른 혀로 핥으며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하는 소리라기보다는, 스스로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병신 같은 놈. 넌 그냥 사람들을 속이는 걸 즐길 뿐이야. 그렇지? 고등학교 때는 학생부 위조해서 대학 잘 가려다 들통이 나고, 대학 때는 다단계 하다 제적당하고.”


그리고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은 그림자 연극의 주인공들처럼 노을을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만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개인 회생?”

“……반 년.”

“흥.”


류노아가 서정한의 개가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서정한은 그것을 떠올리자 흡족한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중학교 동창회에서 류노아의 존재는 스타 그 이상이었다. 항상 모두가 그의 소식을 궁금해 했고, 그가 잘 되면 신나했으며, 그가 안 되면 가련하게 여겼다. 그만큼 류노아의 그림자가 그들의 학창시절에 드리운 그림자는 길었다. 그 시절의 노아는 마치,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기에. 모두가 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한은 본인만의 루트로 노아가 대학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제적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를 빌미로 옥죄어 결국 노아를 고용하기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때의 쾌감이란! 


누가 보아도 인격자 같던 그도 결국은 시시한 인간일 따름이었다. 그러게 지가 뭐라고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녀. 무슨 까마귀 노는 곳의 백로야? 결국 다 까마귀일 뿐이지. 


서정한은 새 담배 까치에 불을 붙이면서 손등으로 노아에게 내려가 보라는 표시를 했다.


“이번은 봐준다. 하지만 언제고 내가 너 자를 수 있단 거 명심해. 다시는 직장 못 구하도록 아주 아작을 내줄 수도 있으니까.”

“그럼 광고 건은…….” 하고 노아가 희미한 신음 같은 목소리로 묻자 정한이 별안간 배를 잡고 웃었다.


“정말 웃긴 놈이라니까. 그렇게 권유리랑 애들 편을 들어주고 싶어? 이거 참! 누가 사장인지 모르겠다니까. 착한 척하는 것도 아주 습관이고 정신병인가보지. 그래,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봐! 하지만 대신에…….”


정한은 앞머리를 뒤로 젖히며 담배를 문 채 말을 뱉었다.


“권유리랑 대학 다단계에 대해 특집 기사라도 내보는 게 어때? 취재비는 빵빵, 지원해줄 테니까. 사실 네 이전 인맥들 찾아다니면 되니까 별로 쓸 것도 없잖아?”


결국 노아의 과거를 회사에 다 까발리란 소리였다. 


노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별다른 대답은 없었지만, 노아의 목줄은 정한이 쥐고 있는 만큼 이번에도 노아는 정한을 충실히 따를 것이었다. 파산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제도인 개인회생은 정기적인 벌이를 3년이나 5년 동안 하며 일정 비율로 빚을 갚으면 채무를 탕감해주는 파산을 면케 해주는 몇 안 되는 법적 제도다. 그 대신 한 번이라도 도중에 실패하면 다시 신청하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끝이 얼마 안 남은 노아로서는 정한의 말을 어기기 힘든 것이다.


정한은 담배를 순식간에 필터 끝까지 타들어갈 정도로 빨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이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이제는 세상이 얼마나 독한지 이정도의 담배는 독한 축에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재수 없는 놈은 조지고 가야겠지 않냐. 안 그러냐.”


정한은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어 하늘에다 대고 읊어보았다.


“유은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광고 문제 쓸 때는 프레ㅅㅇ 이라는 언론이 접했던 문제 생각해서 썼었어 

  • tory_1 2019.02.26 08:01

    정한이는 애증인건가? 힛.....ㅋㅋㅋㅋㅋㅋㅋㅋ

    그치만 노아는 그 롱패딩이랑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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