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대체 언제까지 자는 거야?”

꾸러미를 어디서 잔뜩 들고 온 M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쇼파에서 고개를 살짝 들어 M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한쪽 팔이 소파 밖으로 축 늘어졌다. M이 거추장스럽게 내 팔을 밀면서 소파 앞에 앉았다. 종이로 예쁘게 쌓인 꾸러미를 북북 찢으며 M은 간간이 나를 노려보았다.

좀 일어나라니까.”

다시 눈을 떴을 때 찢어진 종이들이 가득했다. 비닐로 한번 더 쌓여 있는 옷 가지며 가방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M은 그 지경을 만들어 놓고 어딜갔는지 없었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M이 어지러 놓은 거실을 치웠다. 비닐이 쌓인 물건들을 한쪽에 밀어 놓고 종이 포장지들을 구겨 쓰레기 봉투에 담았다. 그러고 있자니 막 샤워를 끝내 M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물기 있는 몸으로 여기저기 물을 떨어트리고 걸어 다녔다.

밥 먹어야지.”

치워진 거실을 보더니 좀 화가 누그러진 듯 말했다. 질문도 아니고, 명령조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짜장면 먹을래?”

토할 거 같은데.”

M이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밥 없어. 뭐 먹긴 해야할 거 아냐.”

속 안 좋아서.”

죽이라도 사다 줘?”

니가?”

나는 조금 웃었다. 나 때문에 뭘 한다는 게 어울리지가 않았다. M도 빈말이었는지 어깨를 한번 들썩이더니 그제야 바지를 꿰어 입었다. 나는 M의 엉덩이를 아쉽게 바라봤다. 수건을 하나 꺼내 바닥에 놓고는 발로 끌고 다니며 M의 흔적을 지웠다. 하여간 어디든 M은 제 흔적을 남겼다. 잠깐이라도 머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치킨 시킬 게.”

M이 말했다. 이미 휴대폰으로 결제중이었다. M은 별로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달달한 연애 속 배려같은 건 우리 사이엔 해당사항이 없었다. 애초에 연애라기보다는 섹스 파트너에 가까웠다.

50분 걸리네.”

M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할래?”

M이 답지 않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를 잠깐 바라보았다. 안 씻어서 그런 가. 나는 의아하게 M을 바라봤다. M의 눈이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아파서 하루 종일 잔거 아니야?”

.”

“…..”

M의 침묵이 답답했다.

씻고 와?”

내가 묻자 M이 고개를 저었다.

먹고 하자.”

가볍게 말하고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거실을 가로질렀다. 닦아낸 물기가 금방 바닥 여기저기 튀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서 치킨을 먹었다. M은 후라이드를 좋아했고 나는 양념을 좋아했다. M은 휴대폰을 보며 치킨을 먹었다. 치킨을 시키고 배달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섹스시간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지루한 건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생각해보면 억울했다. 우리 사이는 한없이 가벼웠다. M은 방앗간 들르는 참새처럼 시도때도 없이 우리집에 드나들었다. 볼일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하지만 그 후에 돌아간 M의 흔적을 치우는 일은 항상 나의 몫이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나는 M을 생각하고 우리 관계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싫어도 그래야 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감정의 무게가 달라지는 걸까? 서로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다르니까. 내가 그보다 그를 조금 더 생각해야 하니까. 나는 그 사실이 불편했다. 두렵고, 무거웠다.

그만 만날까?”

M이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려 휴대폰을 덮어 놨다. 나는 그 휴대폰을 살짝 곁눈질했다. 한번도 화면을 위쪽으로 해서 놓지 않았다. 그것도 배려라면 배려인가? 나는 M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M은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라이드 닭다리를 하나 집어 들더니 내 접시위에 올려 뒀다. 그리고는 양념 닭다리를 하나 집어먹었다.

, 오늘은 하고.”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M이 그것 때문에 화가 났을 까 싶었다. 너무 비 매너 인가, 끝나고 말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했다. M이 웃었다.

몸 안좋잖아. 오늘은 쉬어.”

그럼 네가 온 보람이 없잖아. 진짜 괜찮아.”

그냥 얼굴 봤다 치지 뭐.”

M이 다시 본론을 끝낸 사람처럼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나는 그게 금세 서운해져 참 찌질 하다 싶었다. 이러다 가는 내 스스로가 싫아질 테였다. 그만 만나자고 하길 잘했다. 역시 잘했다. 치킨무를 먹으며 생각했다. M을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 혼자 앓고 싶지도 않았다.

지독한 침묵이 이어졌다. 코트를 챙겨 입은 M이 현관에 섰다. 나는 어색하게 현관까지 배웅했다. 막 나가려던 M이 뒤돌아봤다.

, 네가 잊어버릴 때쯤 오면 되나?”

M의 표정이 한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일그러졌다.

보고싶어도 그때까지 참으면 되나?”

무슨, “

나는 숨을 멈췄다. , 기억이 날 듯도 하다. 그의 순간들이, 흔적들이. 아닌가. 꿈인가, 우리의 만남들이, 반복되던 이별들이.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M의 구두가 망설이듯 서있다가 뒤돌아 사라졌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M이 필사적으로 남긴 흔적들을 치웠다. 이 찢어질 듯한 아픔도 청소가 끝나면 잊힐 테지. 나는 조금 울었다.

 

조금씩 기억이 사라졌다. 순서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근 기억은 대체로 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턴지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눈을 뜨면 나는 내 메모들을 보고, 그날 원하는 대로 생활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책을 읽기도, 하루 종일 나가서 쇼핑을 하기도 했다. 그 남자는 자주, 매번 낯선 사람으로 마주쳤다. 어떨 땐 서점에서, 카페에서, 오랫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으면 어김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우리는 가벼운 관계를 맺었다. 깊은 관계는 나를 너무 두렵게 했으니까. 내 감정이, 누군가에게 내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너무 괴롭게 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별하고 나는 다시 그를 잊었다.

 

아주 가끔은 걷다가 목적지를 잊기도 했다. 나는 멍하니 지하철 역에 멈춰 섰다. 많은 인파들이 갑자기 멈춰버린 나를 성가시다는 듯 치고 지나갔다.

괜찮아요?”

누군가 내 팔을 붙들고 물었다. 심드렁한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저기요,”

남자가 한번 더 물었다. 나는 막 꿈에서 깬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 . 네 괜찮아요. “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로 웃었다. 남자가 약간 풀어진 얼굴로 따라 웃었다. “이거하면서 낯선 지갑을 건넸다.

아까 떨어트리던데, 모르고 가시더라고요.”

. . 감사합니다.”

나는 낯선 지갑을 열어 내 것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지만, 그게 남자로 하여금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어색하게 가방에 지갑을 쑤셔 넣었다.

어차피 지금 가도 지하철 못 타요.”

남자가 바쁘게 지하철 환승구로 가는 인파를 손가락질했다.

퇴근시간이라. 몇 개는 그냥 보내야될걸요.”

.”

나는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차나 한잔 하죠. 근처에서.”

?”

묻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가볍게 남자가 말했다.

한 한시간 시간 때우면 앉아서도 가겠네요. 어때요? 제가 살게요.”

멍청한 내 표정을 보더니 남자가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꽤 큰 회사에 대리였다.

신분 확실하니까 안심하라는 의미고요.”

남자는 명함을 건넨 이유를 설명했다. 목 짓으로 얼른 이 인파를 좀 벗어나자는 듯 나를 재촉했다. 나는 남자를 따라나섰다. 커피를 마시고 배가 고프다는 남자를 따라 저녁을 먹고, 우리집으로 향했다. 남자는 나보다도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집 앞에 도착했다. 그 많은 문들 중 내 집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기도 전에 남자는 내게 키스했다.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안 씻어도 되죠?”

절박하게 느껴지는 행동과 다르게 말과 표정은 가볍게 그지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의 몸짓을 따랐다. 따뜻하다. 얼마만에 사람과의 접촉인지 모르겠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남자가 나를 깊게 안았다. 따뜻하다.

  • tory_1 2019.01.27 03:09

    혹시 주인공이 기억상실같은거야??ㅜㅜㅜ

  • W 2019.01.27 23:32
    댓글 고마워 ㅎㅎ 토리 말처럼 계속 기억을 상실하는 병을 가진 주인공을 생각하고 쓴 글이야.
  • tory_1 2019.01.29 05:17
    @W

    앗 내가 이해한 게 맞구나! 혹시 틀렸을까봐 엄청 고민했어 ㅜㅜㅜㅜㅜㅜㅜ

    M너무 짠하다 ㅜㅜㅜ M시점도 너무 좋을것 같아 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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