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아니 오늘의 일인가? 12시가 넘어서였으니까.


보라색 니트를 입은 남자가 하얗게 질려서 바에 들어왔다. 한 발씩 내딛는 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다. 바텐더에게 무어라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자리를 옮겼다. 그가 주문한 술이 나왔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니트가 너무 탐이 났다. 어둑한 바 안에서도 멀리서 시선을 끈 이유는 틀림없이 니트때문이다. 나는 위스키를 홀짝이며 그를 곁눈질해 보았다. 쓰다. 이런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시켜야 할 것 같아서 되는대로 시켰는데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모르겠다. 반면에 그가 마시는 건 색깔부터가 맛있어 보였다. 꼭 아이들이 마시는 음료수처럼 생겼다. 언발란스하다. 우리 둘이 서로 음료가 바뀐 것 같다 꼭. 아무튼 나는 뭔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척 사연이 있어서 혼자 바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척 한껏 의식하며 그 니트를 눈으로 탐했다. 정말 맘에 드는 니트란 말이지.


그때 현이가 왔다. 어머 너 왜 답지않게 그걸 마시고 있어? 내 등을 찰싹 때리면서 현이가 앉았다. 덕분에 사레가 들렸지만 현이는 아랑곳않고 주문을 한다. 왠지 시선이 내게 닿아있을까봐 긴장된다. 연신 콜록대는 나를 그제서야 걱정스럽게 현이가 등을 쳐주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게 왜 못하는 술을 마시고 있어 단 거나 마시지. 분명히 내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감쌌다. 현이는 내 등을 슬슬 문지르더니 귀에 속삭였다. 저 남자 괜찮지 않니? 현이가 머리카락을 쥐고 어느 방향을 가르켰다. 갈색 단발머리가 향한 방향에는 검은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검은옷?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으니 현이 답했다. 아니아니 그 뒤에 보라돌이. 완전 괜찮지않아? 현이가 머리를 인중쪽으로 가져가는 척 입을 자연스레 가리며 말했다. 언제 봐도 귀여운 몸짓이다. 아 저 보라색니트! 니트가 너무 예뻐서 안그래도 눈에 띄더라. 그래? 니트? 음 그러게 딱 너 스타일이네. 현이가 니트따위는 관심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너도 저 남자 맘에 들어? 꼭 아니어야 한다는 눈빛으로 현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응? 아니 난 저 니트를 원해. 그래? 그럼 내가 말 걸어본다? 현이의 말에 어깨을 으쓱해보인다. 진짜지? 아 근데 아직 안 취해서 그런가 좀 떨리네. 친구야 너가 대신 말해주라. 현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 내가 뭐라고 말해 내 친구가 관심있다네요 댁은 어떻소? 아 뭐래 킥킥대며 현이가 웃는다. 그냥 같이 가자. 같이 가서 뭐 혼자 오셨냐 뻔한 인사라도 있잖아 뭐라도 해보자. 응? 친구야아. 친구라는 호칭으로 불리면 상대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지켜주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호위무사라도 된 듯 현이와 팔짱을 끼고 보라색 니트의 남자쪽으로 향한다.


저기 안녕하세요. 단정한 목소리로 불러보았다. 니트가 정말 예쁘네요. 보라색 좋아하시나봐요. 남자가 신기하다는듯 바라보았다. 술에 취해 나른해보이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그가 말했다. 그쵸? 너무 맘에 들어서 세일도 안하는데 산 거에요. 마치 아무도 몰라보던 영웅의 자질을 발견해낸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 남자의 미소가. 이가 참 가지런하다. 나도 모르게 그가 입은 니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감촉도 너무 좋네요. 좋은 니트 고르기 쉽지 않은데 감각 있으시네요. 그 말 한 마디에 남자는 니트 고르는 법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근 속상한 일이 있어 한동안 우울했다고 한다. 지난주에 길을 걷다가 쇼윈도 너머 한 편에 놓여있는 보라색을 보고 홀린듯이 샀다고 한다.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는데 기쁨이라기엔 우울한 감정이 컸고 단순히 소유욕이나 아름답다는 감정이 아니라 말그대로 홀린 느낌이였다고 했다. 낮은 목소리로 크리스마스 선무로 받은 장난감을 묘사하듯 그가 말했다. 왠지 알 것 같았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아마 당시에 감정적으로 너무 지쳐있고 우울한 감정에 뒤덮여 있어서 그 질척한 감정의 두께를 뚫고 기쁨이라는 감정이 올라와 마냥 밝지만은 않은 묘한 기분. 끈적이는 늪에서 겨우 기어 올라와 햇빛을 바라보아도 시야는 흐리고 몸은 무겁고 당장 이 늪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느낀 바를 설명하니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코올 냄새와 향수 향이 섞여 들어온다. 달콤한데 쓴 향이다. 위스키의 쓴 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다. 손을 맞잡고 향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아직 덜 취했다. 옆에는 현이가 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는 현이가 있다. 아 이 친구가. 그때 현이가 핸드폰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 빨리 가봐야겠다. 장소 변경됐대. 아무것도 없는 화면을 바라보고 현이를 바라보았다. 짜증이 단단히 난 얼굴이었다. 아 저희 가봐야하겠네요.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눠봤는데 죄송하게 됐네요. 니트에 술 안 흘리게 적당히 드시고 안전히 귀가하세요. 현이가 환하게 웃으며 힘을 주고 말했다.


바를 나오면서 현이가 말했다. 너도 정말 애쓴다. 그렇게까지 할 거 없어. 좀 이상한 남자같아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니트가 어쩌구 저쩌구. 초면에 말이 왜그렇게 많은지. 괜히 헤어졌나봐 그래도 걔만한 애가 없구나. 얼굴 좀 반반하면 성격이 이상하고 그렇다고 성격만 보고 고르자니 내가 심봉사도 아니고. 괴롭다 현실이 괴롭다 친구야. 현이가 팔짱을 끼며 투덜댔다. 뭐 괜찮은 사람같던데 이야기해보니. 현이가 놀라 물었다. 너 혹시 그 사람 맘에 들어? 어머 얘가 웬일이야 . 괜히 나왔네 눈치는 내가 없네 다시 가자 다시. 현이가 방향을 돌리며 나를 잡아끌었다. 아니 그냥 이상한 사람같지는 않았다고. 딱히 맘에 드는 건 아냐. 그러자 현이가 말했다. 그치? 좀 특이한 것 같아. 나쁜 사람은 아닌데 좀 아무튼 그래. 현이는 냉큼 가던 방향을 다시 틀었다. 그냥 니트가 이쁘더라. 어디서 샀는지 어느 제품인지나 물어볼 걸 그랬어. 내가 웅얼대는 걸 듣는지 마는지 현이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니 나를 또 잡아끌었다. 우리 저 골목으로 가자. 저기 괜찮은 바 있대. 저기서 찾아보자. 이번에는 너도 맘에 드는 남자 있으면 신호 좀 줘봐 나처럼 머리카락이든 뭐든 그럼 이 언니가 팍팍 밀어주지. 가자 친구야.


그새 들뜬 현이가 나를 잡아끌었고 나는 그녀가 향하는대로 발길을 돌렸다.
  • tory_1 2018.10.15 16:12

    현이라는 이름을 좋아해서 홀린듯 읽었어!

    이 글의 현이는 좋은 친구는 아닌거 같아ㅋㅋㅋ뒷얘기가 궁금해진다 톨아 잘 읽었오


  • W 2018.10.16 09:59
    나도 현이라는 이름 좋아해!

    현이는 밝지만 눈치없는 친구야 반면에 ‘나’는 자기한테도 솔직하지 못한 겁쟁이고 :)
  • tory_3 2018.10.18 17:27

    좋다....... 묘사가 되게 좋고 그남자 기분도 이해는 되고 깔끔한 식사한것같은 글이야 
    좋아요

  • W 2018.10.25 17:36
    고마운 댓글이다
    나도 댓글 좋아요
  • tory_4 2019.01.04 13:51

    남자랑 말 훌훌 통하는 와중 현이가 끊었넹...... 저 느낌 정말 이해된다 기뻐할수만은 없는 묘한 느낌

    잘 읽고가

  • W 2019.09.03 16:18
    훌훌 귀엽다 댓글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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