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대공녀, 회귀하겠습니다

1. 암전

아를레이나.

그에게는 오래된 기억이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아를레이나는 책장 앞에 서서 일렬로 정리된 책들을 손가락 끝으로 사르르 훑었다.

책의 표지는 오래되어 빛이 바랬지만 누군가 매일 정성스럽게 닦는지 먼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원하던 책을 찾았는지 그녀는 책 한 권을 골라 들어 춤추듯 사뿐히 뒤로 돌아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 위로 화사하게 가을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그녀의 하얀 드레스 자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햇살 아래 그녀는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같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 날 그 서재에서 그녀에게 다시 한번 반했었다.

아를레이나, 아를레이나,

영원한 아를렌 공국의 여신.

그대가 가는 모든 길에 태양이 함께 하길.


***


"허억-"

비릿한 피비린내가 입 안에서 느껴졌다.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의 단편적인 부분이 드문드문 기억났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와 아를린은 숨을 몰아쉬었다.

대공국을 습격한 수만이 넘는 제국 기사단의 선두에 서있던 남자.

그는 바로 레이였다.

일주일 전까지도 그녀의 옆에서 같이 밥을 먹고, 수업을 듣고, 훈련을 하던 사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를린은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배에서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피를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칼에 찔린것인가, 용케도 여태까지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윽…”

아를린이 쓰러진 차가운 대리석 바닥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피로 더러워져 있었다.

죽어가는 중 그녀에게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피어나지 않았다.

허나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살아나서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다.

난 너를 사랑했는데 너가 나에게 되돌려 줄 것은 내 가족과 조국의 멸망뿐이었냐고.

아버지, 어머니, 대공저의 모든 가족들, 그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죽음을 눈 앞에 두니 아를린이 묻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모든게 다 잘 짜여진 각본뿐이었나.’

사랑했었다. 그 남자를.

이 쓰라린 현실 속에서도 그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아를린은 믿을 수 없었다.

살아남아서 그에게 묻고 싶었는데, 야속하게도 의식은 점점 흐려져만 갔다.

저 멀리서 누군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게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을 끝으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


“별채를 제외한 본관은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덤덤하게 보고하는 기사의 말에 레이먼드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고 주위를 확인했다.

사방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현재 레이먼드가 서있는 본관의 중앙 복도는 그에게도 매우 익숙한 장소였다.

아니, 익숙했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평소대로라면 저녁 정찬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일 고용인들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 대신 고용인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복도는 그가 알던 아를렌 대공저에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 중에는 그가 아는 친숙한 얼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생각이 그 곳에 미치자 그는 속으로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명령을 내린것도 자신, 습격을 한 것도 그 자신.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상황이 벌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레이먼드 자신이었다.

일주일 전 황제의 호출을 받았다.

오래 전, 아직 어린아이였던 그가 걸음을 떼자마자 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대공국에 쳐박히다 싶히 보내진 후 처음으로 황궁에서 받은 연락이었다.

불안했다.

그렇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그는 황궁으로 돌아갔고, 이렇게 군대를 이끌고 아를렌 대공국으로 돌아왔다.

기사의 보고를 받는 중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이 레이먼드를 덮쳐왔다.

감추었던 초조함이 다시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는 억지로 그 감정을 꾹꾹 내리 눌러버렸다.

“대공은?”

“습격 당시 대공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정리되었습니다.”

쿵.

심장이 무겁게, 그리고 빠르게 가라 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억지로 눌러 버린 감정이 목 밖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이 불쾌했다.

“모두?”

“예.”

레이먼드는 빠르게 중앙복도를 뛰쳐나갔다.

뛰어가는 발치에 무언가가 계속 채였지만 지금 그에겐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본관 왼쪽에서 세번째 계단.’

아를린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그 계단 아래에는 숨겨진 공간이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그대로 지나치기 쉬운 그런 벽.

대공저에서 그녀만을 위해 존재하는 작은 서재가 그 벽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안에 있어야 한다.

레이먼드가 서재를 향한 복도에 다다랐을 때, 그녀만을 위해 열리던 서재의 아름다운 문은 아무렇게나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그녀가 누워있었다.

아를린.

아를레이나.

제비꽃같이 순수했던 아를렌 공국의 아를레이나.

이제는 꺾여버린 피투성이 꽃, 아를레이나.

레이먼드가 본 아를레이나의 마지막이었다.


***


위이잉-

무언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자꾸 귀에 울렸다.

몸에는 별 감각이 없었지만 그 소리만큼은 매우 거슬렸다.

"...이걸 빨리 준비해줘..."

한참을 그 상태로 있다보니 곧 누군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 수 없는 소리는 점차 사그라들고 없어졌다.

아를린은 감각이 없는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모든 것이 캄캄했고 소리만 들리자니 너무 답답해 눈을 뜨고 싶었다.

'눈만 뜬다면 어떻게 될거 같기도 하고.'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되어버린듯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몇번이고 눈꺼풀을 들어올리려 노력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몇번을 그러기를 반복하다 지쳐버린 그녀는 다시 지독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의식을 되찾은 것은 아마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전에 눈을 뜨려고 부지런히 노력했던 것이 부질없게 이번에는 그녀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처음에는 눈이 너무 부셨지만 점차 햇살에 익숙해진 눈에 흐릿하게나마 배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를린이 누워있는 폭신한 침대 위로는 정교하게 수 놓인 천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천 뒤로 활짝 열려 있는 문이 보였고, 그 안으로 또 다른 방들이 보였다.

방의 구조를 보고 나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침대 건너편의 벽난로 위에 달린 휘장이었다.

소녀의 방인지 그것은 기사나 군주의 휘장보다는 위엄이 덜 했지만 부드럽고 정교한 금실로 아름답게 수 놓아져 있었다.

휘장의 문양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갑작스런 두통을 느꼈다.

무언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을 잊은 기분이었다.

두통을 줄이기 위해 머리를 감싸려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가락 사이로 길게 흐트러진 머리는 마치 들꽃을 연상시키는 연보라색이었다.

'내가 연보랏빛 머리를 가졌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레이나 황녀님.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곧 조찬을 준비하여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하녀로 보이는 여자가 매일 하는 일인듯 익숙하게 들어와 그녀의 침대 끝자락을 매만지고서는 긴 머리를 빗어주며 말을 걸었다.

레이나 황녀? 아를린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한참을 대꾸하지 않았지만 하녀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계속 그녀의 머리를 다듬었다.

원래대로라면 분명 그녀는 이 시간이면 평소대로 아침 수련을 마치고 레이와 함께...

"레이먼드..?"

기억났다, 아를린은 죽을 뻔했었다.

아니, 죽었었나?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에서 휩쓸리는 동안 아를린은 하녀가 빗을 떨어뜨리고서야 하녀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녀는 그대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더니 실수에 대한 사죄도, 무례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방을 뛰쳐나갔다.

이상한 반응이었지만 덕분에 그녀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졌다.

"살은건가?"

살아있다, 라는 감각이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숨을 들이 쉬고 내쉴 때마다 들썩거리는 얇은 옷감도, 쿵쿵 뛰는 맥박도, 꼼지락거리는 발치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이불도 소름끼치게 현실적이었다.

그 모든 것이 또한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아를렌 대공국은 어떻게 된 것이지? 이 곳은... 나는 왜 다른 사람이 되어있는 것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아를린은 쉴 틈없이 몰려드는 기억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분명 그녀는 서재로 달려가던 중 누군가의 검에 찔려 쓰러졌었다.

여전히 그 감각은 생생했다.

자유로운 대공국의 대공녀로 태어나 검술을 수련할 기회가 있었던 아를린에게 왠만한 상처 정도는 새롭지 않았다.

여느 귀공녀들처럼 자그마한 생채기에 호들갑을 떨기는 커녕 오히려 몸 곳곳에 자잘한 타박상과 물집이 잡혀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뒤에서 배에 구멍이 뚫리는 고통은 다시 살아났다하여 잊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외려 다시 살아났다는 비현실감을 떨쳐내려는듯이 죽기 직전에 느꼈던 고통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입 안에서 다시 비릿한 혈향이 느껴지는듯 했다.

"헉."

소름끼치는 감각이 재현되자 아를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은 그 고통에 허우적거릴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죽기 직전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그녀를 오히려 냉정하게 만들었다.

'이 것이 정말 죽음에서 되돌아 온 것이라면 나에게 주어진 기회이겠지.'

다시 되짚어보면 특이한 점이 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아를린은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을 재정비했다.

모든 기억이 방금 일어난 일처럼 괴로웠지만 죽은줄 알았던 아를린은 다른 사람이 되어 지금 이렇게 숨을 쉬고 있었다.

"이건... 기회야."

모든 것을 다시 바로잡을.

그의 손아귀에서 나의 공국을 되찾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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