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곁에는 동생이 있었다. 동생은 꾸벅꾸벅 졸다가 내가 눈 뜬 것을 보자 정신을 차리고 내게 달려들었다.
“언니!”
운명의 장난도 이런 장난이 있는가?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동생이라니. 호랑이에게 쫓기는 꿈에서 깨어났더니 눈 앞에 또 호랑이 한 마리가 버티고 있는 상황 아닌가. 혹시 이것도 꿈일까? 이 꿈에서 깨어나도 또 동생이 눈 앞에 있지 않을까? 내 삶이 돌아가는 꼴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온 세상이 짜고 나를 주인공으로 몰래카메라 판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앞에 있는 얘는 진짜일까?
이런 나의 생각을 모른 채 동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언니, 괜찮아? 걱정했잖아. 간호사 선생님이 별 건 아니라고 그냥 집에 가서 푹 쉬래. 어쩐지 요즘 살도 빠진 거 같고 피곤해 보이더라. 아얏! 왜 꼬집어?”
“너 진짜네.”
“뭐?”
“너 진짜 사람이라고.”
동생은 분명 진짜였다. 이건 꿈도 아니고, 몰래카메라도 아니고, 그저 망해버린 내 삶이었다. 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문이 막혀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도 가만히 누워 그런 동생을 마주보기만 했다. 꿈이 아니니 깰 수도 없었다. 귀신이면 물러가라, 동생에게 호통을 칠 수도 없었다. 삶의 모든 것이 내 손이 닿는 거리 너머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평생 이렇게 고통받는 살아야 하는가?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작은 동물처럼 겁에 질려 일생을 보내야 하는 것인가? 억울함이 가슴 속 가득 차올랐다.
넘치는 감정이 눈물이 되어 눈가에 고였다가 떨어졌다. 그로도 모자라 점점 울음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기 시작했고, 이내 울음은 오열이 되었다. 당황해 말리는 동생을 향해 난 눈을 부라리고 꺽꺽거리는 울음소리 사이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너 뭐야… 너 대체 뭔데… 왜… 갑자기 나타나서… 나 힘들게 만들어…”
“뭐야, 언니… 대체 무슨 소리야…?”
대체 왜 같은 사바나에서 누구는 잡아 먹히는 영양으로, 누구는 잡아먹는 사자로 태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냥 다 똑같이 영양으로 태어나면 안 되나?
“그 학교…! 내가 먼저 갈려고 그랬단 말야…! 내가 먼저 꿈꿨단 말야… 다 내가 먼저 이룰 거였단 말야…!”
같은 빛깔에, 같은 모양의 뿔에, 같은 시력과 같은 다리 길이를 가지고 서로 비교해 조금의 모자람이나 조금의 우월함도 없이 똑 같은 영양들만 모여 살면 안 되나? 사자도, 하이에나도 없는 영양들만의 천국에서 그 영양들은 잘난 척 할 것도, 주눅 들 것도 없이 행복하지 않을까?
“이럴 거면 왜 왔어… 그냥 거기서 살지… 왜 나타나…!! 너 왜 나타나서 내 인생 망쳐…!!!”
그렇게 다같이 행복하게 살면 안 되는 건가? 고른 황금빛의 초원 위에, 늠름한 두 뿔을 가진 한 무리의 영양떼. 저 먼 지평선까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어디에도 없고 그저 한 무리의 영양떼뿐.
“돌아가… 사라져… 내 앞에서…”
그 말을 들은 동생은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뚫어져라 보기만 하던 동생은 짐을 챙겨 방에서 나갔다. 문을 닫고, 떠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해방이었다.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9월에 입학이 예정되어있던 동생은 애초 초여름까지는 회사를 다닐 계획이었으나 윗사람들과 면담을 몇 번 하더니 한 달 후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남은 한 달간 하던 업무를 마무리했고 그동안 우리 둘은 인수인계나 기타 업무에 관련된 대화를 제외하면 전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냉랭해진 우리 둘의 관계에 사람들이 수군대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상관 없었다.
동생은 예고 없이 온 것만큼이나 훌쩍 떠났다. 한국에서 지낸 기간이 길지 않았고 그동안도 본가에서 지냈기에 처리할 살림도 없었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지 않았던 듯 싶다. 나는 관여하지 않았기에 자세히는 모른다. 동생은 떠나는 이유를 부모님께 설명하지 않은 듯 했지만 우리 둘 사이 달라진 분위기를 보고 부모님이 나를 다그쳤다. 내가 못 살게 굴어서 떠나는 것 아니냐. 수십 년 만에 만난 동생을 잘 돌봐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것 아니라고 했고 동생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으므로 부모님도 할 수 있는 건 애먼 타박 정도였다.
동생이 한국을 떠나던 날 나는 친구의 결혼식 핑계를 대고 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미국에 놀러갈 거라고 둘러댔지만 미국에 가는 일도, 동생을 만나는 일도 없었다. 동생은 그렇게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지금의 나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마치 동생이 이곳에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다. 나는 여전히 같은 회사를 다니며 흥미 없는 일을 하고, 언제가 이곳을 탈출할 새로운 꿈을 키워나가며 일상을 견디고 있다. 친구들의 말로는 내 옷 취향이 좀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예전과 같다.
그러나 요즘 밤이 되면 어김 없이 그런 일상이 지리하게 느껴진다. 그럴 때면 나는 SNS를 켜고 동생의 이름을 검색한다. 그리고는 내 흔적을 지운 채, 최근 올라온 동생의 게시물들을 하나씩 확인한다. 학과 파티에서의 한 컷, 밤새 과제를 하는 모습, 뉴욕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빠에야집, 한 푼 두 푼 모아 장만했다는 게임 콘솔, 새로 사귄 애인과 찍은 사진, 페루에서 오신 부모님과의 오붓한 한 때 등 즐거움과 행복으로 가득 찬 동생의 일상을 남몰래 훔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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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준 톨들 고마워!
나가기 전에 댓글 한 개씩만 부탁해!! ㅠ
와 톨아 너무 잘봤어 ㅠㅠㅠ 뭔가 마음이 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