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빛바랜 기억 속에서 너는 항상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교복을 입고, 단정한 감람색 넥타이를 늘어뜨린 채 칼날 같이 잘린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꼿꼿하게 세운 등은 언제 누구 앞에서도 굽힌 적 없이 당당했지. 미친개로 소문난 수학 선생에게 잘못 걸려 뺨을 두 대나 얻어맞을 때에도 무너지지 않은 너를 보며 나는, 가끔 가끔, 고아하게 반듯한 네 등을 활처럼 구부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에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하얗고 얇은 도자기 잔에 자연스러운 입술 자국을 손가락으로 지워내며 눈가에 품위 있는 웃음을 얹는다. 그 미소에 건너편에 아무렇게나 걸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은 입술 한 쪽 끝을 비틀어 올리며 반대로 아무렇게나 물잔을 치운 채 제 주머니 속 담배곽을 한 번 확인해본다.



 “별 일이네, 박묘란. 네가 나를 보자고 할 줄이야.”

 “나야말로 제나 네가 이렇게 순순히 나와 줄 줄은 몰랐지.”

 “안 될 건 뭐람. 이럴 줄 알았음 수갑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히스테릭한 웃음을 쿡쿡 흘리나 싶더니 일순 몸을 숙여 눈을 맞춘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새까만 눈. 단 한 번도 타인을 포용한 적 없을 것 같은 암흑 속에 오롯이 깃든 것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박묘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기쁜 걸, 네가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



 균형을 잃은 입술이 사소하게 흐트러진다.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네가 반응할 때마다, 나는 어찌할 바를 잘, 모르겠다.



 학창 시절에 네가, 친구라고 여겼던 이가 있기나 했을까. 목덜미에 간신히 닿을 만큼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믿기지 않을 만큼 짙은 검은색. 너무나 새까매 오히려 푸른 염료가 담기지는 않았을까 의심하게 하는. 아무렇게나 구겨 입은 하얀 블라우스의 단추는 언제나 두 개 이상이 열려 있었고, 네가 구색이나마 맞춘 넥타이를 한 날에는 전교생 모두가 그날은 복장 검사가 있겠거니, 하고 다시 한 번 더 제 교복을 돌아보곤 했었지. 누구에게도 관심 없는 눈을 하고 단 한 번도 제 밖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너를 나는, 복도에서든 교실에서든 그 검은색 머리칼 사이로 자주자주 넘겨다보았다.



 “이래봬도 우리 같은 학교, 같은 반도 한 적 있지 않았어? 사회에서 더 자주 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묘란의 한 마디에 흔들렸던 눈빛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심연을 닮은 눈으로 잠깐 허공을 바라보던 제나는 털썩, 카페의 소파에 기대며 담배 곽을 꺼낸다. 가느다란 손가락 새 익숙하게 한 개비를 엮은 뒤 흘끗 묘란에게도 곽을 기울였다가 거두며 느슨하게 웃어 보인다.



 “건강 생각해서라도 너는 끊어.”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구나. 그래, 나는 괜찮으니 너는 펴도 돼.”



 가볍게 농담을 건네나 싶더니 묘란의 허락에 불을 붙여 푸른 연기를 내뱉는다. 끊은 뒤 담배 냄새를 그리 반기지 않던 묘란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나가 피우는 이 담배 냄새는 어딘지 옛 기억을 모호하게 자극하는 그리움이 있었다.



 “제나야, 서제나. 참 얄궂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상대방에게 한다기보다는 반쯤은 제게 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제나도 잠자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생에 너와 내가 엮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린 듯 완벽한 모범생과 동시에 그린 듯 완벽한 날라리. 야간 자율 학습을 끝마치고 가는 길, 서둘러 집에 가기 위해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휘황한 피어싱들을 자랑하며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찰나의 시선. 너는 낯선 발소리의 주인공이 나임을 확인하면 미련 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입술 끝에 물린 담배에 열중했다. 가로등조차 없는 어둑한 골목길에서 오직 가늘게 비추이는 달빛만이 파르라니 떨리는 연기 속을 유영하며 네 단정한 옆모습을 유려하게 떠오르게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패싸움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어디서 요란하게 얻어터지고 오기라도 한 건지 입술 끝과 눈두덩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너와 마주하기도 했다. 당혹스러워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평소와 다름없이 나른하게 시선을 돌리던 너는, 눈앞에 디밀어진 손수건에 놀라지도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었지.



 “, .”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아직까지 긴장과 갈증이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 날것의 숨소리와 살기로 뭉친 눈빛.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형형하게 빛나는 그 공허한 동공과 마주하며 나도 모르게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켜냈다. 사실 욕설 한 마디쯤, 아니 따귀나 주먹 등 거친 몸동작 한 두 개쯤은 각오하고 내민 손수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너는, 단 한 마디의 욕설이나 행동 없이 그 무심하고 나른한 안정(眼精)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곤 손수건으로 엉망이 된 제 얼굴을 조금 정리하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어떻게 살기와 나른함이 공존할 수 있지, 싶었지만 머리카락을 닮아 심연을 모아둔 네 눈은 그렇게도 모순적이면서도 독특했다.



 “고맙다, 반장.”

 “-, .”



 내가 반장인 건 알고 있었구나,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으로 잠깐 너를 돌아다보고는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반사적인 미소를 지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하고 금세 시들기는 했으나. 닦아낸 손수건을 보며 담배를 피우던 너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서 있는 나를 보고 그제야 처음으로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말을 꺼낸다.



 “이거, 빨아서 돌려줘야겠지?”

 “? , ? , 아니, 그게, 그렇게, -근데, , 저기, 상처는, 괜찮아?”

 “-이 정도야 뭐, 밴드 붙이면 될 걸.”



 우리 학교의 누구라도 보면 믿기지 않아 할 대화였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더듬다니, 그리고 네가 이렇게 협조적인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가다니. 내 기억 속 너는 무엇과도 섞이지 않을 것처럼 검푸른 머리카락만큼이나 철저히 세계를 무시해나갔고, 어떤 사람도 네 경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동시에 누구도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게끔 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네가, 이렇게나 무구하고 무해한 목소리로 말을 잇다니.



 “그래도 약은, 발라야 하지 않을, .”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나 허둥대며 말을 더듬는 너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웃기기도, 귀엽기도 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매일 아침 다림질이라도 한 것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하얀 블라우스, 목 끝까지 채운 단추에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넥타이에 정확한 각도를 유지하는 이름표. 한 올의 삐침도 없이 칼처럼 정리 된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같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꼼꼼함과 완벽함으로 일을 척척 처리해내는 너를, 아무리 학교 일에 무관심한 나라도 모를 리 없다.



 상냥한 말투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며, 공명정대한 너는 바꾸어 말하면 누구에게도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다. 그런 너와 나는 평생을 낮과 밤으로 나뉘어 만나지 못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사실 그 날의 일은 나에게도 뜻밖이었다.



 지긋지긋한 삶을 잊게 해주는 것은 몇 개 없었지만, 슬슬 끊을까 하던 담배가 그나마 위안이 되곤 했다. 학교 근처지만 재건축 들어갈 예정이라는 낡은 상가가 몇 개나 들어선 그 골목은 낮에도 지나다니는 사람 없이 외로운 곳이었고, 그곳이야말로 담배를 태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남에게 들키는 것 자체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나의 삶을 살아본 적 없이 이해할 생각도 없는 타인에게 공허한 설교를 듣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조금 급한 듯한 낯선 발소리를 듣곤 새로운 곳을 또 찾아야 하나, 지겨운 생각에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들어보자 달빛이 네 뒤로 가로놓였다.



 하얗고 가는 달빛이 그날따라 왜 그리 휘황했던지. 교복 블라우스 카라를 벨 듯 단정한 머리카락에 덧씌워지는 달빛은 화관 같기도 하고, 번진 날개 같기도 해서 우습게도 조금, 안심해버렸다. 너라면, 그래 너라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란 근거도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마주침.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고요라 할지언정 나는 네 익숙한 발소리를 들었다. 메트로놈처럼 단정하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교복 단화 소리. 그 소리가 낡은 골목길에 울려 퍼질 때에는 아주 잠깐, 네가 오겠거니, 나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미소가 입술 끝에 허름하게 흐르곤 했다.



 그날은 너를 기억했던가. 굳이 기억하자고 한다면 참으로 재수 없는 날이었다. 학교에서는 뺨을 두어 대 얻어맞고, 그리고 집에서는 이미 나조차 포기해버린 나를 들들 볶으며 소리나 내지르던 그런 날들. 끝없이 파고드는 운동화 끄트머리로 지구의 파편을 멸망시키고 싶다고 뇌까리며 나는 오직 단순하게 너를 기다렸다. 그저, 달빛보다 환하게 저를 비추려던 나를, 비우고 기대고 또, 바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내 얼굴에는 어떠한 흔적도,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내가 기대한 것이라고는 단순히,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 그 얼굴, 오직 그뿐. 그렇게나 나는 단순하게도, 그리고 위대하게도 너를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무엇과도 바꾸지 않고 바꿀 수 없을 너를,



 몇 번이고 떠올려보고, 몇 백번이고 내가 기다려 본다.



 오직 달랐을 테고, 완전히 변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을 통틀어 나는 너를 떠올리지 않고서-, 단 한 번도 기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너와 나는 달랐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만이 나를 살려주던 시대가 있었다.




 

 한동안 학교 끄트머리에서는 명문대학교에 진학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정도로 한 사람은 우등생으로 이름이 올라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대학교에 잔디구장 하나를 지었다거니, 그 학교 출신 유명 인사 이름을 딴 건물을 지었겠거니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입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스쳐 지나기를 반복했으나-, 방학만 되면 핫핑크 색 머리카락 사이 아무렇게나 담배 연기를 흩날리며 교내를 활보하는 한 사람과 염색 기 하나 없이 단정하게 쓸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옷차림을 자랑하는 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유대감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상상도 못했지, 서제나 네가 서미나의 딸일 줄은.”



 가볍게 쿡쿡 웃는 제나의 안광이 서늘하다.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엷게 내뱉으며 제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나야말로, 설마 네가 설표회의 무남독녀 후계자일 줄 꿈에나 상상했겠니.”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힌다. 아주 담백하지만은 않은 그 시선 속에는 독살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사랑스럽기도 한 낯선 감정들이 넝쿨을 감는다. 서제나와 박묘란.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곁눈질로만 바라보다 사회에 나가서야 처음으로 서로를 그 네 개의 안정 안에 똑바로 담게 된다. 그 안정 속, 두 사람의 홍채만이 아닌 다른 물건-이를테면 달빛조차 되튀지 않도록 곱게 재를 먹인 총신 같은 것-까지 휩싸인 것은 별개의 일이었지만.



 사회에 나가서도 여전히 분홍빛으로 물든 머리카락 점점이 박혀든 음영은 달빛이 엿보였다 사라지는 그림자는 분명 아니었다. 누구의 혈흔인지 모를 그 암적색 액체들은 탐욕스럽게 머리카락을 삼키고도 제나의 흰 뺨까지 튀어 있었다. 묘란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턱선에 맞추어 단정히 자른 머리카락은 드물게도 흐트러져 군데군데 핏방울이 뭉쳐 하얀 셔츠 위에 거친 흔적을 남기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과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예상치 못했던 만남은 두 사람이 서로를 겨눈 총구를 멈칫하게 하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제나?”

 “박묘란...?”



 어두운 공간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또렷하게 울렸으나 여전히 총은 거두지 않은 두 사람 중, 먼저 손을 거둔 것은 묘란이었다. 빛을 잃지 않은 시계 안에 제나의 형체를 깊이 가두며 저도 모르게 생긋, 입술 끝을 끌어올린다.



 “서제나, 서미나. 추리 좀 할 걸 그랬어. 그래, 네가 우리 학교에 온 것도 사실은 납득이 되지 않았는데 경찰청장의 딸이라면 얘기가 또 다르지.”



 고등학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묘란의 목소리에 제나도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웠던 듯 나른한 미소를 흐트리며 총신을 거두었다.



 “내가 할 말이지. 하기야, 설표회 차기 회장님께서 경찰대에 진학할 거란 상상이나 했겠냐?”

 “우리 할머니의 안목을 칭찬하는 거라고 생각할게.”



 가볍게 대답한 뒤 입고 있던 재킷의 주머니를 뒤진다. 그러나 찾던 물건이 나오지 않는 듯 가볍게 혀를 차는 묘란에게 제나는 자연스레 다가가 그 입술에 제 담배를 물려준다. 입술에 담긴 끄트머리가 젖어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문 묘란 또한 고개를 제나 쪽으로 기울이며 담뱃불을 빌린다.



 “몸에 안 좋을 텐데.”

 “총보다 더 안 좋을 리가.”



 우문현답이었다. 궁색한 말 붙이기조차 되지 않는 제 말에 제나가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자 묘란도 소리 내어 따라 웃었다. 이내 두 사람의 웃음은 합창이 되어 어둠만이 똬리를 튼 공간에 별을 심는다. 허리를 꺾어가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가며 신나게 웃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학창 시절에 체력 점수가 좋았지?”

 “왔다 갔다 했지. 내가 1등하면 다음번엔 네가 1, 그리고 또 다음번엔 내가 1등하고 그랬잖아.”

 “맞아. 제나 네가 공부는 안 했어도 체력 시험은 항상 잘 보긴 했어.”

 “-자기변명 같지만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반항이었어.”



 달빛이 내려앉는 붉은 핏자국이 말갛게 지워진 제나가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묘란이 작은 웃음소리를 낸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늦은 일탈은 어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그 말에 묘란이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말을 들은 묘란의 친구들은 백이면 백, 뜨악한 표정으로 저를 돌아다보거나 혹은 농담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사실은 이만큼이나 적확하게 제 심경을 표현해준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래볼까. 시작은 뭘로 하면 좋겠어?”



 놀란 입술에 다시 웃음을 피워 물었다. 묘란의 물음에 제나는 조금 고민하는 듯 말이 없다가 별안간 폭소를 터뜨린다.



 “아하하, 이건 어때? 네가 경찰이 되는 거야. 아주아주 충직하고 성실한 경찰. 이거야말로 널 기대하는 사람에게 주는 가장 커다란 일탈 아니겠어?”



 못 견디겠다는 듯 말 사이사이에 터지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대답해준 제나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던 묘란은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글쎄, 그것보다 조금 더 좋은 생각이 난 것 같은데.”



 여전히 겨우 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 제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다가 그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든다. 학창 시절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여느 사람에 비해서는 색이 옅은 그 입술 곁, 한없이 입술에 가까운 그 뺨에 입을 맞춰본다.



 “경찰청장 딸과의 연애는 어때.”



 그 때 내가 뭐라고 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이 조금은 바뀐 미래가 되었을까. 다시금 담배 연기를 입술 새 가늘게 뿜어내며 멍하니 네 손가락을 바라본다. 제 턱에 닿았을 때처럼, 여전히 가늘고 뼈대가 곧은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으로 대체 몇 명이나 죽여 댄 거야.”

 “살인은 취향이 아니었어.”

 “한 사람도 죽인 적 없어?”

 “네가 죽인 한 사람은 알고 있는데.”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소리 나지 않게 찻잔을 받침에 둔다. 엉뚱한 소리라며 웃어넘기려던 제나는 여전히 제게 시선이 박혀있는 묘란에게 눈을 깜박인다.



 “내가 별 짓은 다했어도 사람 죽인 적은 없는데. -죽도록 팬 놈이 진짜 죽었냐?”

 “내 마음을 그 때 한 번 죽이긴 했어.”



 쓸쓸하게 대답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그에게, 폭소를 터뜨릴 뻔한 제나였으나 진지한 상대방에게 어색하게 입술을 굳힌다.



 -, 언제 내가 네 마음을 죽였다고 그래.”



 그러다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자 묘란이 흠칫 고개를 든다.



 “제나야!”

 “? -, , 말해.”



 마실 타이밍을 놓치고 눈만 깜박거리는 제나에게 묘란이 웃어준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냉정하면서도 단려한 분위기는 그것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한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조사, 그냥 여기서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는 거지?”

 “-그래. 너무,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 이미 내 권한을 지나간 거야.”

 “서울시 경찰청장인 네게 권한이 지나갔다는 건 그냥 말장난으로밖에 안 들려. 정말, 여기서 그만 둘 생각은 없어?”

 “나야말로, 박묘란. 네 스스로 설표회 자료를 넘겨준다면 어떻게든 너만큼은, 아니, 최대한 형량을 낮게 잡도록 힘써볼게. -묘란아, 제발.”



 한 때 그리도 갈망했던 시선들이 이제야 서로를 마주보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닿지 못하는 평행선 위 새겨지는 그리움을 헤아려보는 수밖에 없다. 슬픈 한숨처럼 뒤따라 붙는 제나의 마지막 말에 묘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한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좀 더, 빨리 불러주지 그랬어. 그렇게.”



 참 듣고 싶었던 내 이름. 묘란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주는 내 이름. 다른 사람에게 불리는 그 이름과 다를 바가 없는 자음과 모음이지만 네가 불러줄 때마다 내 이름은 무지개, 보석, 이슬 같은 것들을 닮아간다. 사무치게 아름다우며 단지 네게 속해있을 뿐인, 오직 네게 불러짐으로써 완성되는 네 속의 나.



 그러나 나는 네 이름을 부르길 원치 않았다. 내 입속을 뒹구는 네 이름은 어린 날 먹었던 솜사탕보다도 달콤하여, 그렇게 내 혀를 다디달게 녹여놓고도 돌이켜보면 그 존재조차 의심하게 만들어버렸으므로. 네 이름이 달콤한 것인지, 네 존재가 사랑스러운 것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그 이름을, 나는 끝의 끝까지 부르지 않길 바랐다. 내 생애의 끝자락에서조차 결코.



 -제나와 묘란은 서글프게 녹아드는 침묵 속에서 끝끝내 서로를 갈구하며,

 재처럼 내려앉는 그리움 앞 마주 앉은 그 자리에서 서로를 그리며 찻잔을 들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입술 끝에서 흐르는 선혈을 선명히 자각하면서 묘란은 입을 열었다.



 “나 또한 그럴 수 없으니, 너 또한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눈가에 어리는 눈물이 단려하게도 제나는 애써 웃음 지었다. 주름지는 눈가에 웃음과 눈물이 촛농으로 무너졌다.



 “제나야, 서제나. 내 생을 통틀어, 단 하나 남았던 내-, 연모.”

 “말하지 마, 묘란아.”

 “이제야 마음껏 불러주는 구나, 내 이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지만 웃음기가 가득하다. 눈물이 그렁한 눈에는 마찬가지로 제 입술 너머 피를 뚝뚝 떨구는 제나가 사진처럼 박혀들었다.



 “나는 결국 네 찻잔에 독을 넣지 못했고, 너도 결국 내게 권한 담배에 독을 넣지 못했구나.”



 너를 죽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노라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떨리는 손으로 결국은 찻잔을 바꾸어 놓았다. 그건, 참으로 행복하고도 황홀하게도, 너 또한 마찬가지였구나. 내 귀에 울리는 내 이름이 너무 달콤해서 오히려 쓰다. 천천히 뻗어낸 손가락 사이로 운명을 닮은 네 손가락이 엉켜온다.



 그래, 우리. 서로에게 독이 되어주자. 차마 권하지 못했던 독배와 독연처럼, 대신 서로를 향해 무너지자. 그을리고 엎드린 그 사이로, 서로를 향한 눈빛만큼은 지우지 못하는,

 그런 독이 되자, 우리.


==

느와르물을 엄청 좋아해. 여성들끼리의 애정과 유대와 긴장으로 신세계같은 느와르 물이 나오면 너무너무 좋을 것 같아.

젊은 제나는 전ㅈ현분, 젊은 묘란은 이영ㅇ분. 요즘 서예ㅈ분도 느와르물에 너무 잘 어울리실 거 같더라.

나이든 제나와 묘란은 누가 좋을까. 예수ㅈ분도 너무 분위기 있으셔서...ㅠㅠ

아무튼 재밌게 읽어줬음 좋겠다. 

딱히 공부 안하고 쓴 글이라 설정이 엉망인 건 감안하구 그저 재미있게 즐겼기를 ㅋㅋㅋㅋ^^

  • tory_1 2020.08.06 16:02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03/22 10:51:42)
  • W 2020.08.08 00:25
    ㅠㅠ 톨아 댓글 고마워 나도 이 캐릭터들이 마음에 드는데 단편이라 ㅋㅋㅋ 언젠가 이 두 사람이 나오는 글을 쓰게 되면 꼭 올릴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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