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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네? 그런 사이가 뭔데요, 혜준씨? 나 미국 사람이라 잘 모르겠어요.”


유진이 빙글빙글 웃으며 치근댔다.


얼른 밥이나 다시 먹어요. 조금 식어버린 밥을 다시 뜨며 혜준이 말을 이었다. 난 이혜준씨랑 그런 사이가 되고 싶은데. 유진이 숟가락을 들다 말고 혜준의 눈을 맞추려 애쓰면서 빙글거렸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밥 드세요. 혜준은 개소리라는 어절을 숨을 들이켜며 삼키듯 뱉었다.


“근데 이 화분은 뭐예요?”


혜준이 화제를 돌리려 화분을 손으로 톡 건드렸다.


“아. 저번에 난 화분 하나 샀는데, 그건 공무원한테 못 준다고 하더라구요? 무슨 법? 뭐라고 했었는데-”


“청탁 금지법이요?”


“네, 그거. 그래서 이번에는 조그만 화분으로 가져왔어요. 혜준씨 닮은 친구예요.”


뭐, 물도 가끔 주면 된다고 하고. 손도 거의 안 탄대요. 이혜준씨 같아. 어디서든 잘하잖아요. 이름은 준(June)이라고 붙였어요. 혜준씨 닮으라고. 유진이 짓궂게 덧붙였다. 혜준은 가만히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뭐를 보던지 저를 생각해준다.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더는 없는 줄 알았는데. 부모라는 사람도 그만 저를 등지고 떠나버리지 않았나. 고작 몇 번 보지도 않은 사람과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혜준은 설핏 웃어버렸다.


“이거 드세요.”


혜준은 제 앞에 더 가까이 있던 시금치 그릇을 슬쩍 유진 앞으로 밀었다.


“왜 시금치예요?”


철분. 피 만드는 데 좋다고 해서. 와, 나 걱정해주는 거죠, 이혜준씨? 전에도 얘기했지만, 진심이에요. 걱정하는 거. 혜준은 제가 듣고 싶은 말을 유진에게 해주곤 했다. 그의 상처받은 곳을 헤집어 소독약을 뿌리고 약을 덮어주면, 꼭 제가 응당 받고 싶었던 일을 받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서. 지독히 이기적인 자기 위안이었지만, 그런 기만이라도 잡지 않으면 언젠간 흔들리는 그 근간에 삼켜질 것 같았다. 물론, 유진 한을 만나기 전까지는 부러 인식하지도 않았던 어둠이긴 했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 책임져, 그런 비약적인 생각마저 간간이 들기도 했다. 유진은 뭐가 좋은지 신나게 젓가락질을 하다가 뭐가 마음에 걸렸는지 이내 손을 멈췄다.


“그래서 그날 만나자고 한 거예요? 집에서 쫓겨나서?”


“그렇게 말하지 마시죠. 아프니까.”


혜준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이 사람은 되는대로 혜준의 경계를 비집고 들어와서 그 땅을 내어주게 만들고는 했다. 유진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거에 너무 쓸데없이 마음 주지 말아요, 이혜준씨. 나도 해봐서 알아요. 결국 다 돈이야. 돈이 없으면 사람은 밑바닥까지 주저  않아요. 그걸 보고 상처받지 않으려면, 마음을 주지 않으면 돼. 유진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그렇다고 이혜준씨를 그렇게 취급한 사람들이 괜찮다는 건 아녜요. 너무 기분 나쁘다. 혹시 뭐 복수하고 싶으면-”


“유진한씨. 내 가족이에요. 위로는 고맙지만, 선을 지켜주시죠.”


“아냐, 사람 근본은 안 바뀐다니까?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가 꽤 잘 사는 집 딸이었거든요. 그 시대에 음악 공부를 한,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었어. 그때는 고모고 삼촌이고 잘해주고 뭐 얻어갈 구석 있나 기웃거리다가, 내 아빠가 사고 치자마자 등을 돌리더라고요. 그냥, 그런 사람들인 거야. 여유가 있을 땐 가면 쓰고 잘 숨기고 있다가. 그게 아닐 땐-”


혜준은 드물게도, 오늘도 역시나 엄마 타령하고 있는 유진의 말을 끊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가만히 듣고 있는 혜준의 엷은 미소를 힐끔거리던 유진은 얼마 안 되는 저의 헤아림을 그러모았다. 그리고 그 단단한 혜준의 얼굴을 저렇게까지 무너지게 하는, 혜준의 상처를 가늠해보려 애썼다. 나라면 저렇게 두지 않을 텐데. 제가 저지른, 앞으로 저지를 수많은 과오들을 까맣게 잊고 유진은 신파스런 감상에 빠져들었다. 이상한 여자다. 남의 슬픔과 고통을 무시하고, 숫자와 이익에 악바리 같이 달려들던 삶. 감상은 사치고 약점이었다. 좋은 사람은 돈을 불러모으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이 좋은 사람 앞에서는 저도 사람 꼴을 하고 싶었다. 옆에 있어도 될까, 라는 구차한 변명보다 그저 옆에 있는 게 당연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신은 그래도 보러 갈 엄마가 있잖아. 난 그런 게 없거든요. 내가 돌아갈 곳은 고모랑 마리, 고모부 밖에 없더라구요. 혜준의 목소리가 담백하게 유진의 생각의 고리를 잘라냈다. 혜준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작은 화분을 손에 들었다.


“어, 내가 괜한 소리 했다고 그거 버리려는 건 아니죠?”


유진이 서둘러 혜준을 따라 일어났다. 그래도 내가 처음 주는 선물인데. 마음에 안 들어요? 다른 거로 바꿔줄까? 나 돈 많아요. 말만 해요. 혜준이 하, 웃었다. 자꾸 잊으시나 본데, 저는 공무원입니다. 유진 한씨.


이것 봐, 저는 혜준을 울리지 않고 이렇게 미소 짓게 할 수 있었다. 혜준의 어설픈 ‘가족’과는 달랐다. 혜준의 웃음을 제대로 곡해한 유진이 뿌듯해하며 머리에 둥둥 떠다니던 생각을 엮어 그대로 내뱉었다.


“내가 찾아봤는데, 우리가 가족이 되면 그런 거 상관이 없더라구요.”


혜준은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가 싶어 한쪽 눈썹을 올리고 유진을 바라보았다. 네? 그러니까, 뭐랬더라, 우리가 무촌 관계로 묶이면. 아니,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고작 선물 주겠다고 지금 뭘 하자고? 혜준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이 쓸데없는 비약은.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해야 하나. 허, 참. 혜준이 말을 잇지 못했다. 왜요? 그럼 안 되나요? 유진은 말간 얼굴로 되물었다.


혜준의 작은 화분은 피아노 위에 안착했다. 혜준과 아빠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옆에. 혜준을 감싸듯 뒤에 자리한 유진이 액자로 손을 뻗었다. 혜준은 뺨을 살짝 스치는 부드러운 스웨터의 질감에 깜짝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사진 좀 봐도 될까요? 유진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파고들었다. 어떤 목소리가 나올지 몰라 차마 입을 열지 못한 혜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와, 이거 몇 살 때예요? 너무 귀여운데.”


낮게 웃는 소리를 따라 유진의 가슴이 부드럽게 울렸다. 그 떨림은 곧 혜준에게 옮겨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혜준이 흘끔 사진을 쳐다보았다. 아빠와 제가 맑게 웃고 있는, 마지막 사진이었다.


“아마, 6살 때일 거예요. IMF 직전에. 그 뒤로는 웃는 사진이 거의 없었거든요.”


아니, 웃고 찍은 사진이 있긴 한가? 혜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어린 시절의 모든 날이 지옥은 아니었다. 일 년 내내 비가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분명 언젠가는 햇빛이 잠깐잠깐 구름을 뚫고 내려왔을 텐데. 그래도 그늘 없이 완연하게 웃는 사진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아, 유진은 짧게 탄식했다. 그리고 이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렸을 때 엄청 활동적이었나 봐요. 생기 넘치네. 맨날 밖에 가서 놀고 그랬어요? 궁금해.


“마리랑 이곳저곳 놀러 다녔죠. 그땐 집이 풍족했어서, 마리가 우리 집에서 거의 살고는 했었어. 아빠도 우리를 데리고 자주 놀러 다녔구요.”


그래, 그땐 그랬었다. 엄마 없는 아이라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아빠는 얼마나 깔끔하게 저를 키웠었나. 마리랑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새까맣게 흙먼지를 몰고 집에 돌아오면, 아빠는 언제나 짐짓 엄한 얼굴을 그려내며 그 천방지축 꼬마들을 작게 타박하고는 서랍장에서 빳빳한 새 옷을 꺼내주곤 했다. 우리 강아지들, 건강하게만 커라, 건강하게. 엄마 닮지 말고 혜준아, 건강하게. 혜준은 깔끔하게 세탁된 옷의 냄새를 맡으며, 아빠가 속삭이는 뒷말을 귓가로 흘려보냈다. 그래. 내가 그걸 좋아했었구나. 혜준은 노란 햇볕이 잔뜩 묻은 그 청량한 새 옷 냄새를 기억하려 애썼다.


기억하고 있는 향보다는 훨씬 더 세속적인 냄새였지만, 유진의 깔끔한 체향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혜준은 유진에게 함부로 여지를 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급진적이고 긍정적인 행복회로가 어디로 튈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잠시 앞일을 조금 걱정하던 혜준은 외로움에 못 이겨 머리를 살짝 유진의 품에 기댔다. 온기가 고팠다.


유진은 앞으로 제 눈으로 바라볼 혜준의 모습과 더불어 혜준의 과거까지 그리워졌다. 제가 보기에도 중증이었다. 톡, 혜준의 머리가 가볍게 가슴에 닿았다. 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조차 이리 어려워했다. 최대한 무게를 덜어주려는 듯,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유진은 살며시 보이는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아마 그러면 이혜준은 깜짝 놀라 도망가겠지. 남은 한 손으로 혜준의 머리를 살짝 쓸었다. 애달픈 감정이 선뜻 올라왔다. 누군가를, 이렇게. 매 순간이 새로웠지만, 결코 두렵지는 않았다. 꽉 안아버릴까, 그런 생각에 몰두할 때 제 품에 언제까지고 담겨있을 것 같았던 혜준의 머리가 쏙, 하고 밑으로 꺼졌다.


혜준은 유진이 숭한말로 기분을 어지럽히지 않자 오히려 더 빨리 감상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아고,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간다. 도망갈 곳이 피아노의 액자를 집고 있는 유진의 팔에 막혀 있었다. 혜준은 무릎을 굽혀 팔 아래 공간으로 몸을 숙였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혜준은 아무 말 없이 화장실 앞에 던져 놓은 공구에 정신을 집중했다.


“거기 그렇게 있지 마시고 밥 다 드셨으면 설거지나 하시죠.”


설마 맨입으로 그냥 쏙 집에 가려는 건 아니죠? 밥을 다 먹고 제가 설거지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려던 유진은 괜히 억울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매너 없는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하고 다는 거 보면 딱, 매너 있게 생기지 않았나? 아, 글쎄요. 워낙 사고를 몰고 다니시는 분이라 그런 생각은 안 들던데요. 혜준이 진심과 농담을 반반 섞어 무심하게 답했다.


“잘됐네요. 설거지 안 한다고 하면 쫓아내거나 억지로 떠넘길 셈이었는데. 난 화장실 좀 손 보려고요.”


혜준은 의도적으로 유진의 얼굴을 피하며 화장실에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래도, 더 있다가는 마음의 장벽이고 뭐고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설거지는 원래 내가 하려고 했어요, 그래야 혜준씨 집에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지, 따위의 말을 구시렁거리며 다 먹은 그릇을 포개고 있었다. 막힌 세면대부터 뚫어야지. 혜준은 비장하게 장비를 챙겼다. 이 막힌 곳을 뚫어버리면 넘실거리는 제 상념을 다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혜준은 부러 더 거칠게 팔을 움직였다.


“이혜준씨, 남은 반찬은 어디다가 넣을까요?”


큰 덩치가 화장실 문턱을 꽉 채웠다. 혜준은 인기척에 무심코 문을 바라보다가, 풋 웃어버렸다. 아니, 앞치마 화려하니 잘 어울리네요. 좀 작아 보이지만. 앞치마를 맨 건지 살짝 덮은 건지. 앞치마는 유진의 몸뚱이보다 한참은 작아서 장난감처럼 보였다. 유진은 제 꼴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혜준을 따라 웃어버렸다. 좀 깔끔한 디자인으로 하나 가져다 놓아야겠어. 유진은 입을 삐쭉 내밀더니 애꿎은 앞치마만 손으로 탁탁 털었다. 나 이렇게 혜준씨 잘 웃기는데, 집에 들일 생각은 없어요? 혜준은 미소를 싹 그러모아 삼키고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설거지나 하시죠. 그 싱크대 위 찬장 보면 밀폐 용기 있어요. 그거 쓰면 돼.”


네네, 유진은 순순히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시간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뒤에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소리, 이따금 그릇이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혜준이 고모랑 지낼 때도 종종 들려오는 소리지만, 괜히 마음이 부대껴 안절부절 못 하며 들었던 것과는 달랐다. 물소리와 그릇 소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들릴 줄은 몰랐네. 혜준은 슬쩍 몸을 기울여 유진의 뒷모습을 훔쳐봤다. 그와 나누는 공간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적당한 부피감과 사람 사는 온기. 정말 오랜만에 돌려받는 안온한 분위기에 혜준은 유진의 너른 등의 움직임에 맞춰 춤추는 햇빛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은 슬쩍 어깨너머를 살폈다가 혜준의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휘며 깊게 웃었다. 이크, 혜준은 몸을 얼른 뒤로 빼고 괜스레 스패너로 세면대 뒤의 파이프를 툭툭 쳤다.


툭. 마지막 그릇을 건조대에 올려놓고 물을 끈 유진이 기억을 더듬었다. 엄마가 설거지를 다 하고 어떻게 했었더라? 주변에 어지러이 고여 있는 물방울을 훔쳐내면서, 유진은 고요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 끼긱 돌아가는 소리, 텅 빈 뭔가가 울리는 소리, 그리고 낑낑대는 혜준의 소리. 작게 들리는 그 소리가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품에 폭 감싸버리면, 그때도 저렇게 낑낑대며 빠져나가려고 애쓸까? 유진은 멀리 달려가는 망상을 애써 잡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궁금했다. 저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웃는지, 우는지. 앞치마를 대충 접어 식탁 의자에 걸쳐놓고, 유진은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귀찮고 골치 아픈 일이었을 텐데, 혜준은 일을 거의 다 마무리한 상태였다.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요? 나 설거지 다 했거든. 유진은 구석에 박힌 파이프와 씨름하는 혜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거의 끝났어요, 이것만 조이면 될 것 같아.”


다음엔 사람을 부르든지 해야지 정말. 혜준은 퉁명스레 불평을 입안에서 굴렸다. 이놈의 나사, 혜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줘 봐요, 내가 할게. 유진이 스패너를 쥐고 있는 혜준의 손을 감쌌다. 아냐, 도움 필요 없어요. 내가 할 수 있어. 혜준은 유진의 손을 대충 털어내다가 반동을 못 이기고 기우뚱 넘어갔다. 어? 혜준의 옆에 있던 유진도 덩달아 중심을 잃었다.


“악!”


혜준이 갑자기 쏟아진 찬물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허공을 스치던 유진의 손이 그만 샤워기 수전을 건드린 탓이었다. 유진이 넘어질 때 혜준을 한쪽 팔로 감싸 안은 덕에 혜준은 머리 부근만 물에 흠뻑 젖었다. 유진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좋게 봐줘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유진은 제가 안은 혜준의 체온과 머리와 등을 차갑게 두드리는 물줄기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애쓰고 있었다. 아니, 이게 뭐지? 따뜻하고, 추웠다. 혜준의 허리를 감은 손에서 간질간질하게 열기가 올랐다. 갑작스러운 물벼락이 화가 나기보단 좀 웃겼다, 그래서. 혜준은 등 뒤에서 쿡쿡 웃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제 허리를 안고 있는 유진의 팔을 찰싹 때렸다.


“아니, 지금 뭐 해? 빨리 물 꺼요!”


유진은 웃으면서 벽면을 더듬더니 물을 끄고 혜준을 안은 채로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이혜준씨, 정말 더 먹어야겠어. 너무 가벼운데. 강아지가 물을 터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던 유진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앗, 차가워. 혜준은 흩날리는 물방울을 피해 몸을 움츠렸다. 이 인간이 드디어 미쳤나. 혜준은 유진의 손을 열심히 밀면서 고개를 돌려 얼굴을 쳐다보려고 애썼다.


“아, 이거 좀 놔 봐요. 무슨 꼴인지 봐야겠으니까.”


유진의 팔이 혜준의 허리를 한번 꽉 다잡더니, 스르륵 풀렸다. 혜준은 황급히 몇 걸음 물러선 뒤, 거울에 제 몸을 이리저리 비춰봤다. 다행히 머리와 어깨, 바지 밑단을 제외하고는 크게 젖은 곳은 없었다. 무성의하게 머리를 털면서 유진을 어쩔지 고민에 빠졌다. 첫째, 당장 이 집에서 내쫓는다. 쌀쌀한 초봄 오후 칼바람에 물을 뚝뚝 흘리는 유진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아버린다. 깔끔했다. 어차피 사고는 이 인간이 친 건데. 혜준은 한숨을 푹 쉬고 수납장에서 마른 수건 두 개를 꺼내 유진을 돌아보았다. 수건을 건네주려던 혜준의 시선이 물에 푹 젖어 여과 없이 드러난 유진의 어깨선에 걸렸다. 왜, 나 좀-, 악! 혜준은 소리를 질러서 유진의 말을 막았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에 푹 젖어 이마를 덮은 유진의 머리카락이, 선정적이라. 그리고 처연했던 병실 속 모습이 겹쳐 떠올라서. 둘째, 마지막 남은 이성과 유교적 사상이 혜준의 생각을 뜯어말렸다, 둘째.


“아. 진짜 이런 말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이상한 데로 급발진할 생각하지 말고, 팩트만 들어요. 수건은 여기 있고. 샴푸, 바디 워시는 저기에.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오세요.”


칫솔은 저기서 새 것 하나 꺼내 쓰시던지. 입을 옷은 대충 찾아볼게요. 혜준은 말을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화장실을 나왔다. 쾅. 괜히 문을 세게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등 뒤에서 유진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옷장 문고리에 걸린 코트를 보자 또 방금 전 보았던 유진의 어깨선이. 서랍 가장 깊은 곳에 손을 넣어 헤집던 혜준이 뭔가를 잡아 꺼냈다. 고등학교 때 반티였다. 혜준은 그때 제 체격을 매우 과신해서, 당당하게 라지 사이즈를 적어냈다. 결과는 세기말 힙합 패션보다 더한 루즈핏이었다. 이게 아직 살아있었네, 헛웃음을 짓던 헤준은 도톰한 흰색 면티를 옆에 내려놓고, 다른 서랍을 뒤졌다. 집에서 입으려고 산 실내복 바지들을 뒤지면서, 대충 저와 유진의 체격차를 가늠했다. 제일 큰 사이즈를 고르면, 대충 맞지 않을까?


화장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물소리가 이어졌다. 쾅. 혜준은 서랍을 닫으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화장실 앞에 옷가지를 내려놓고 물소리에 괜히 싱숭생숭해져 좁은 방에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던 혜준이 마음을 다잡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소리를 다른 소리로 덮어버리면 그만이지. 혜준이 가만히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잠시 망설이다가, 다음 음을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 또 다음 음. 하나하나 벽돌을 쌓듯이 차곡차곡 음이 겹쳐졌다. 베토벤 소나타 8번, 3악장. 비창이었다.


유진은 문밖에서 자박자박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는 혜준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갈지. 이래도 되나, 안 되나, 혜준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물소리를 타고 저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피아노 소리. 길게 내려앉은 첫 음, 그리고 고요를 삼키다 이어지는 둘째 음, 셋째 음. 아, 비창이네. 와인 너머로 보던 혜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번에 올 땐, 새 악보를 들고 올까. 그때 마셨던 와인이 뭐였지. 유진은 따뜻한 물과 선율에 몸을 맡겼다.


“어, 이혜준씨.”


유진의 목소리가 혜준의 피아노 연주를 끊었다. 그, 방해해서 미안한데. 티셔츠는 어떻게 입겠거든요. 근데 바지가....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유진의 얼굴과 수증기가 빠져나왔다. 네? 혜준은 서둘러 화장실로 다가갔다, 따뜻하고 습한 열기가 훅 끼쳐왔다. 환풍기 좀 켜세요. 집안 눅눅해진다고요. 혜준은 가볍게 유진을 타박하며 환풍기 스위치를 켰다. 아니, 혜준씨 바지가 너무 작아서, 못 입겠어요. 네? 혜준은 무심코 하체로 내려가려던 시선을 다잡았다. 어쩌지. 나 그냥 수건 두르고 있을까요? 유진이 짓궂게 대답했다. 아뇨. 거기서 나오지 말고 딱 기다리세요. 혜준이 유진이 문을 열지 못하게 두 손으로 문고리를 단단히 쥐었다.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마세요. 경고했습니다. 혜준은 문을 힘차게 당겨서 쾅 닫아버렸다.



*


“이게 우리 집에서 제일 큰 건데. 예전에 사이즈 사기당해서 산 트레이닝복 바지거든요. 이게 어떻게 M 사이즈야?”


혜준이 손만 화장실로 쏙 집어넣어 회색 면바지를 건넸다. 아, 고마워요. 유진의 따뜻한 손이 혜준의 손을 잡았다 떨어졌다. 따끈한 열기가 손에 옮아왔다. 이윽고 문을 열고 나온 유진의 모습은 혜준이 그간 밖에서 보았던 것과 사뭇 달랐다. 평범한 옷, 머리를 털고 나오는 손짓. 누가 이 사람을 우리나라 경제를 말아먹는 사람으로 볼까. 혜준은 입을 비죽였다. 혜준에게는 눌어지다 못해 바닥에 끌렸던 바지는 유진의 발목을 껑충하니 웃돌았다. 통이 넓다 못해 펄럭였던 바지는 유진의 허벅지에 탁 달라붙어서, 혜준은 눈을 꼭 감았다. 유진은 제 모습을 슬쩍 내려다보다가 농밀하게 웃으면서 혜준에게 걸어갔다.


“피아노 잘 치던데. 피아노 엄청 좋아하나 보다. 그렇죠?”


이 집에서 이 흰색 피아노만 혼자 반짝거리고 있더라고. 혜준은 피아노를 돌아봤다. 만약. 혜준의 인생에는 수많은 ‘만약’이 존재했다. 부질없다, 생각하면서도 삶이 지칠 땐 만약, 이런 허황된 생각이 불쑥 찾아들고 말았다.


“네. 좋아했어요, 지금도 좋아하구요.”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나?”


“아뇨, 뭐 그렇게까지 생각해 볼 틈은 없었어요. 피아노 신동이다,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냥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시작해서 좀 더 일찍 그만두게 된 거죠.”


아마, IMF가 없었다면. 지금쯤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혜준이 조그맣게 덧붙였다. 와, 우리 언젠가는 만났을 수도 있겠네요, 나도 음악 쪽 진로였었어. 유진이 감탄했다.


“이혜준씨. 나 그 기분 뭔지 알아요. 만약에, 내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거? 내가 그 얘기 했나? 나 원래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어요.”


네? 의외의 사실에 혜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왜요, 안 어울려요? 엄마 닮아서 그런가, 음악이 좋더라고. 나 언제는 뮤지컬 극단에도 붙었었어. 노트르담 드 파리 알아요? 거기서 페뷔스 역할. 그때 잘 됐으면, 그런 생각이 날 강박적으로 몰아붙여.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 노트르담 드 파리의 페뷔스요?”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걸. 혜준은 유튜브에서 봤던 뮤지컬 실황을 떠올렸다. 구제 불능의 바람둥이 역할이었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바람둥이 역할이잖아. 그런데 왜 그만뒀어요?”


“돈이 아주 많이 필요했거든요. 아주 많이. 고작 16달러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이유가, 유진 한씨 답네요. 네, 저도 피아노를 계속 치겠다고 고집부릴 만큼 뻔뻔하지는 못해서.”


그래도 조금 궁금해요. 무대 위에 선 바하마의 유진 한이라니. 뮤지컬 좋아해요? 다음에 같이 보러 가죠. 아, 생각 좀 하고 거절하세요. 그놈의 청탁금지법. 얼른 가서 씻던지 머리를 말리든지 해요. 감기 걸리겠다. 유진이 혜준의 등을 떠밀더니 피아노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피아노 쳐도 돼죠? 너무 오랜만이라 잘 못 칠 것 같아. 그건 감안해줘요.


Belle, Even though her eyes seem to lead us to hell.

벨, 그녀의 눈이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할지라도.


She may be more pure, more pure than words can tell.

그녀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순수할지도 모른다.


- <Notre-Dame de Paris> ‘Belle’ (ENG ver.) 中



혜준은 주섬주섬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닫힌 문에 몸을 기댔다. 조금은 음울한 곡조가 들려왔다. 낮게 가사를 읊조리는 유진의 목소리도. 혜준은 얼른 물을 틀어버렸다. 따뜻한 물이 어느새 짙은 수증기를 만들어서, 거울에 비친 혜준의 모습을 뿌옇게 가렸다. 거울 속 흐리게 뭉개진 인영, 혜준은 그 모습이 혜준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조금 전 같은 자리에 있었던 유진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토리들 넘 오랜만이야 내가 많이 늦었지ㅠㅠ 글이 엄청 안써져서.. 1만자 채우는게 이렇게 어렵다니! 그런데 또 막상 여기 올려놓고 보면 넘 짧다ㅠㅠ 토리들, 내가 항상 사랑하고 있어 머겜만큼! ❤️오늘 4화 단관도 잊지 말자구~~~

  • tory_1 2020.03.26 19:56
    아 설렌다 금손들 많아서 행복하구여~~ 이따 단관도 함께하자 꺅!!
  • W 2020.03.29 00:03

    단관! 함께해! 흐흐 함께할 수 있어서 넘 행복하다 토리!!

  • tory_2 2020.03.26 20:05
    좋다좋다 너무 좋다
  • W 2020.03.29 00:03

    흐흐 열심히 또 담편 써왔어!

  • tory_3 2020.03.26 20:52
    ㅠ글고마워
  • W 2020.03.29 00:03

    아냐 봐줘서 더 고마워!!

  • tory_4 2020.03.26 23:28
    아 너무 따뜻하다 ㅠㅠㅠ
  • W 2020.03.29 00:04

    흐흐 열심히 따뜻하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

  • tory_5 2020.03.27 00:07
    재밌어ㅠㅠㅠㅠㅠ
  • W 2020.03.29 00:04

    재밌게 봐줘서 고마워!!!

  • tory_6 2020.03.27 17:07
    넘 잼써 토리야ㅠㅜ 따숩고 두근두근하고!!! 담편도 들고 와줄거지??
  • W 2020.03.29 00:04

    다음편도 들고 왔습니다!!! 재밌게 봐줘서 고마워!!!

  • tory_7 2020.03.28 12:09
    다음편 또 또 주세요ㅠㅠㅠㅠ
  • W 2020.03.29 00:04

    흐흐 담편 들고 왔습니다!!

  • tory_8 2020.03.28 13:50
    혜준이의 작은 집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거 같아ㅠㅠㅠ
  • W 2020.03.29 00:05

    고마워ㅠㅠ 그렇게 이미지 상상하면서 쓰고 있어!! 흐흐

  • tory_10 2020.03.30 01:53
    두편이라니ㅠㅠ 너무 고마워 요동치는 혜준이마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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