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나는 언제고 그 애가 나를 좋아하게 되리란 것을 알았다.

 

 그것은 날벼락 같은 확신이었다.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신탁과도 같았다. 그 애를 처음 만나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세상은 정적에 잠겼다. 창 밖에는 폭풍우가 한창이었다. 비바람이 미쳐 날뛰고 천둥과 번개가 이 세상을 쪼개버릴 듯 내리쳤지만 나는 귀가 먹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그런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너는 터무니없이 마르고 앙상한 몸을 너절한 누더기로 간신히 가린 가여운 몰골의 아이였다. 움푹 패인 뺨과 동굴같이 커다란 눈동자, 가라앉은 밤하늘처럼 어둑하던 동공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광휘에 그저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저주를 새기듯 확신을 곱씹었다. 너는 반드시 나를 좋아하게 될 거야. 어쩔 수 없이,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렇지? 신데렐라.

 

 그래서 나는 네가 싫어.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

 

 그 날은 평소와 달랐다.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은 것이 아무래도 오후에는 큰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역사에 비해 관리가 부족한 저택은 비가 내리면 신경써야할 부분들이 배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모두가 부산스레 수선을 떠는 와중에 하녀인 엘라는 유독 산만하여 실수연발이었다. 그녀는 카르타의 책에 우유를 쏟고 내 인형을 밟은 것으로도 모자라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접시를 세 장씩이나 깨뜨렸다.

 

 " 엘. "

 

 마침내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잠깐 쉬는게 좋겠구나. "

 

 엘라는 드물게 파래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 죄, 죄송합니다. 남작님. 하지만... "

 " 엘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렴. "

 " ...알겠습니다. "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황급히 다이닝룸을 나섰다. 어머니는 고질적인 편두통이 도진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한때는 아주 고왔을 어머니의 손은 울퉁불퉁하게 마디가 불거지고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아무리 귀족 끄트머리라지만 남작의 손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노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손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솟아 시선을 떨구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엘라의 상태를 살피러 갔다. 그녀가 울고 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뜻밖에도 엘라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수돗가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어머니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두웠고 가여운 엘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역시 아까의 실수 탓일까. 오늘따라 실수가 좀 잦긴 했지만 평소의 엘은 착하고 일도 잘하는 아이인데. 꾸중이 지나친 것 같았다. 상황을 봐서 적당히 끼어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어머니!!! 엘!!! "

 

 나는 해맑게 웃는 얼굴로 새까만 머리칼을 팔랑팔랑 나부끼며 두 사람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너무 앞만 보고 달렸던 탓일까, 때마침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요란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 우...으잉... "

 

 무릎의 통증은 별 거 아니었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괜찮아. 나는 할 수 있어. 부끄럽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지금 여섯살이니까.

 

 " 아가씨! 괜찮으세요? "

 

 아, 상냥한 엘.

 

 그녀는 방금 전까지만해도 자신이 엉엉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당황한 얼굴로 넘어진 나를 일으켰다. 자기는 눈이 퉁퉁 부어오르고 코는 새빨개진 주제에. 그 모습이 안타깝고 우스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조심했어야지. "

 

 어머니는 가볍게 나무라며 내 몸을 세심하게 살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흙과 부드러운 잔디가 완충작용을 한 것인지 무릎팍이 좀 붉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 잘못했어요... "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대답하자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쓸며 못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그 틈을 타 나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

 

 " 으응, 그치만 아우카 다리 짧아, 엄마랑 엘이랑 너무 멀었어요. "

 " 그래서 뛰신 거예요? "

 " 응! 뛰면 빨리 가. "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익숙하게 팔을 벌리자 엘은 자연스레 나를 안아올렸다.

 

 " 그럼 저는 이만 아가씨를 방으로 데려다주도록 하겠습니다. "

 " 그래. 가보거라. "

 

 어머니는 뭔가 복잡한 감정이 얼룩덜룩 뒤섞인 표정으로 나와 엘을 쳐다보더니 이내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엘은 나를 꽉 끌어안고 못생겨진 얼굴로 생글생글 잘도 웃었다.

 

 " 아가씨, 저는 이 곳이 참 좋아요. "

 " 좋아? "

 " 네. 남작님이랑 벨리오님, 카르타 아가씨와 아우카 아가씨 모두모두. 정말로 좋아해요. "

 " ...나도 엘이 좋아. "

 " 뭐예요, 아가씨 지금 부끄러워 하시는 거예요? "

 " 몰라! "

 

 나는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엘의 품 속에 고개를 묻었다. 따끈따끈한 체온 너머로 엘라가 킥킥대느라 생긴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나는 그만 심술이 나서, 이럴 줄 알았으면 도와주지 말 걸 하고 조금 후회했다. 흠. 그렇다고 그 애가 혼나든 말든 내버려두는 건 좀 매정한 것 같고 다음 번에는 이렇게 티도 안나는 거 말고 좀 생색도 내고 잘난척도 할 수 있는 걸로 도와줘야지.

 

 그러나 내가 엘에게 생색을 낼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았다.

 

 그 날 밤 엘라는 저택을 떠나버렸던 것이다.

 

*

 

 오후부터 시작된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저녁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거센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되었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애매한 시각에 나는 잠에서 깨었다.

 

 바깥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공기에서 오래된 먼지와 비 비린내가 났다. 다시 잠들기 위해서 눈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 썼지만 어쩐지 잠들 수 없었다. 자꾸만 신경이 곤두섰다. 이상하게 덥고 짜증이 났다. 숨이 답답하고 팔다리가 걸리적거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이불을 발로 차내고 일어나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우르르 꽝꽝!

 

 눈 앞에서 플래시를 터트린 듯 밝은 빛이 번지는 동시에 우렁찬 천둥소리가 저택을 내려 찍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세상은 온통 소란에 빠졌다.

 

 밤의 정원, 숲, 황야에서 달려오는 온갖 소음들이 나의 귓가에 폭력적으로 밀려들어왔다. 

 

 고통에 찬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닮은 바람소리, 무자비하게 꺾인 나뭇가지들이 창에 온 몸을 내던지는 소리, 나뭇잎들이 술렁이며 추락하는 소리, 세찬 빗방울들이 지붕을 부술듯이 쏟아지는 소리, 낡고 오래된 저택이 폭풍우에 휩쓸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내는 끔찍한 신음소리까지...

 

 덜컥 겁에 질렸다. 철근 콘크리트가 아닌 나무와 벽돌로 지어진 구시대적인 저택에 대한 불신감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건물에 피뢰침이 있던가? 창문의 내구도는 어떻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안하고 무서워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엇보다도 방 한 쪽 면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이 가장 신경쓰였다. 지금은 잔가지들 뿐이지만 언제 굵은 나뭇가지나 기왓장 등이 날아와 유리를 깨부술지 모른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자연 앞의 인간은 무력하다. 내가 있던 곳에서도 태풍에 날아온 물건들 때문에 아파트 샷시가 깨지는 사건들이 종종 뉴스에 등장하지 않았는가.

 

 다행히 창에는 튼튼한 나무 덧문이 달려 있었다. 문제는 내 키가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적당히 발판으로 삼을만한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

 

 급한 대로 세 살 많은 언니, 카르타를 깨우기로 했다. 그 애라면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니 덧창을 닫는 것쯤이야 간단할 것이다. 나는 즉시 건너편 침상으로 달려가 카르타의 어깨를 흔들었다.

 

 " 언니, 큰일 났어. 좀 일어나봐. "

 " 으응... "

 " 아 빨리 일어나라고! "

 " 어엉... "

 

 그러나 한 가지 내가 간과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카르타가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잠꾸러기라는 사실이었다.

 

 " 아! 언니이이! 야! 카르타! "

 "..... "

 

 나는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팔을 꼬집고 심지어는 매트리스를 쾅쾅 걷어차기까지 하였으나 카르타는 도무지 눈을 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카르타 깨우기를 포기했다. 그냥 엘에게 닫아달라고 해야지. 고된 하녀일에 지쳐 잠들어 있을 아이를 깨우는 것은 좀 미안했지만 창문이 깨져 아수라장이 된 방을 청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므로 엘라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한 점 거리낌도 없었다.

 

 뜻밖에도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야무진 아이답게 정갈하게 정돈된 시트와 이불에는 단 한 번도 눕지 않았던 듯 잔주름 하나 없었다. 덧문도 꼼꼼히 닫혀 있었고 먼지 한 톨 보이지 않게 잘 정돈된 방이었으나 어딘가 허전하고 을씨년한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 살피니 엘라의 자잘한 물건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도 평소와 같았는데. 그 애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이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별 수 없이 나는 드리아스 남작 부부의 방으로 향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와 언제나 바쁜 어머니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작 부부의 방으로 향하는 길은 드물게 밝았다. 한밤중이 지난 시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복도의 촛불이 모두 켜져 있었던 탓이었다. 알싸한 소름이 팔뚝에 번졌다. 이상해, 이상하다. 아침부터 부자연스러웠던 엘라의 태도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재와 손님이라도 맞이하는 듯이 환한 복도까지. 기묘한 예감에 짓눌린 나는 마룻바닥의 삐걱거림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남작부부의 침실에 도착했다.

 

 방 문이 열려 있었다.

 

 문 틈 새로 살그머니 훔쳐보니 방 안은 일렁이는 촛불로 어슴프레했다. 안 쪽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깨어계신 것 같았다. 혹시 엘라가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나? 그래서 방 안에 없었던 걸까?

 

 어쩌면 그 애에게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서, 하루 바삐 이 곳을 떠나야 해서, 그래서 부모님께만 급하게 인사를 드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있을 법한 이야기다. 애초에 그 애는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서 하녀일을 시작한 아이다. 노예로 팔려온 것이 아니므로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었다. 아침부터 실수연발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엘라는 이미 그 때 이 곳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괜히 여기가 좋다느니 남작가 사람들이 좋다느니 부끄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다.

 

 의문은 풀렸으나 기분이 나빴다. 솔직히 말하면 서운했다. 물론 아우카는 여섯살 밖에 안되었으니 이별엔 익숙치 않고 어릴 때 돌봐주었던 하녀따윈 금방 잊어버릴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사실 나는 어른인데. 이별같은 건 이미 익숙하고 얼마든지 의젓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행운을 빌 수도 있는데. 제대로 된 작별인사 하나 남겨두지 않고 떠나려는 것이 섭섭했다.

 

 바보같으니라고.

 

 울컥해서 에꿎은 입술만 야금야금 씹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엘라이려나 싶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올려다보았지만 낯선 사람이었다.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불타오르는 듯한 머리칼을 가진 여자였다. 잘 익은 포도주와 닮은 보라색 눈동자가 매혹적이었다. 차림새는 초라했지만 기묘한 박력이 넘쳐 나도 모르게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여자는 놀리듯 말했다.

 

 " 착한 아이는 일찍 자야지? "

 " 아우카, 이리 오렴. "

 

 때마침 들려온 구원의 목소리에 얼른 무서운 여자에게서 도망쳤다. 아버지는 거대한 침대의 헤드에 커다랗고 푹신한 쿠션을 잔뜩 겹쳐두고 그것을 등받이 삼아 앉아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가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빴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답게 아버지에게 매달려 잔뜩 응석을 부렸다.

 

 " 천둥번개 무서웠어요. "

 " 그랬구나. 우리 아기. "

 " 애송이로군. "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럼 여섯살이 애지 어른인가? 속알맹이는 어엿한 어른이었으나 겉모습만은 어린애였기에 당당한 나는 여자를 살짝 흘기곤 아버님의 옆자리로 기어올라갔다.

 

 " 오늘은 어머님이랑 아버님이랑 같이 잘래요. "

 " 저런. 카르타는 어쩌고? "

 " 언니는 똑똑하니까 괜찮아요. "

 

 카르타가 입버릇을 흉내내며 익살을 떨자 아버님은 살포시 웃으며 언니를 놀리면 못쓴다고 내 코를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나는 엄살을 부리며 헤헤거리다 문득 방 구석에 서 있는 낯선 아이를 발견했다.

 

 " 응? 근데 쟤는 누구예요? "

 

 대수롭지 않게 물었는데 어머니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아... 설마 저 애가 새 하녀는 아니겠지. 나는 속으로 제발 그 애가 새 하녀가 아니길 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애는 도저히... 하녀일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이는 꼭 빈민가에서도 가장 밑바닥의 밑바닥에서 간신히 주워온 넝마주이와 같은 꼴이었다.

 

 평균에 비하면 마른 편인 내 팔과 비슷한 굵기로 보이는 앙상한 다리에 겉가죽만 겨우 뒤집어씌운 듯한 팔, 해골처럼 말라붙은 뺨과 푹 꺼진 눈두덩이까지. 그 와중에도 콧대는 높고 곧아서 이질감이 들었다. 나이는 대체 몇 살인건지, 그 애는 힘이 세지 않은 나조차 거뜬히 업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가벼워 보였으므로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릴 것이 틀림 없었다.

 

 어쨌거나 저런 애한테 일을 시킨다니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아동학대다. 이 세상에 인권이란 개념이 아무리 깃털처럼 가볍다고는 해도 이건 정말 아니었다. 아니, 애한테 밥을 안줬나? 어떻게 하면 사람이 저렇게까지 마를 수가 있는거지?

 

 내 시선은 자연스레 아이와 함께 온 것이 분명한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녀도 썩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는지 볼은 패여있고 눈 밑이 검었다. 하지만 바싹 마른 아이보다는 명백히 상태가 나아보았다.

 

 못된 어른 같으니라구.

 

 얄팍한 경멸이 내 눈썹을 미미하게 찡그러뜨렸다. 여자는 그런 모습을 똑똑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환히 웃어보이며 내게 손짓했다.

 

 " 자, 소개해줄테니 이리 와보렴. "

 

 패기있게 노려보기는 했으나 여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무섭고 꺼려졌다. 저렇게 어린 애를 학대하는 사람이 나라고 딱히 잘 대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덜컥 밀려든 두려움에 아버지를 돌아보자 그는 내 등을 가볍게 쓸며 속삭였다.

 

 " 괜찮을거란다. 가보렴. "

 

 어머니는 딱딱하게 굳은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 모르겠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쭈뼛거리며 여자에게로 다가가자 여자는 그 마르고 앙상한 아이를 데려와 내 앞에 나란히 세웠다.

 

 " 네 이름이... 아우카? 아우카 드리아스? "

 " 네. "

 " 그래. 그럼 이 쪽은 아우카 드리아스. 그리고 이 애는 ...엘... 엘... 엘이라고 했나? 아니, 아니지. 엘라, 엘라란다. 자, 인사하렴. "

 

 저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가 아는 엘라는 단 한 명 뿐이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뺨에 상냥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나를 꼭 자기 막냇동생처럼 대해주던 아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까칠하고 냉소적인 카르타마저도 엘라에겐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려 웃곤 했었다.

 

 그런데 저 애가 엘라라고? 감히?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 아냐! 얘는 엘라 아냐! 다른 애야! "

 " 어머, 무슨 말을 하는 거니? "

 

 여자는 재밌다는 듯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 모습이 꼭 악마 같았다.

 

 그 순간,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맞추어지듯 내 혀 끝에서는 그 대사가, 마치, 마치,

 

 " 얘가 무슨 엘라야! 얘는 엘라 아냐! 신데렐라야! "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나는 기절했다.

 

*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거짓말처럼 사방이 조용했다.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던 카르타가 내 모습을 보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 지금이 몇신데 이제 일어나니? 이 늦잠꾸러기야. "

 " 으응... 뭐래.... " 

 " 이게 언니한테! "

 

 흐흥. 아홉살 주제에 언니라니 이십년은 빠르다. 하지만 내 몸뚱아리는 고작 여섯살에 불과했으므로 나는 열심히 잉잉거리며 카르타의 간지럼을 피했다.

 

 " 이기지도 못하는게 까불기는... "

 " 잉잉 너무해... "

 

 평소처럼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자니 시간이 슝슝 잘만 갔다.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지, 나는 미래를 위한 쭉쭉이 체조를 하며 태연한 척 카르타에게 물었다.

 

 " 근데 엘라는? "

 " 엘라? "

 

 태연하게 되묻는 카르타의 얼굴이 너무나 평탄하고 자연스러워 나는 순간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모두 다 꿈은 아니었나 생각했다. 악마처럼 웃는 못된 여자와 불쌍한 어린애가 나오는 꿈이라니, 과연 여섯살짜리 꼬맹이가 꿀 법한 악몽이다.

 

 " 으음, 엘라. 아침 먹으라고 부를 때 됐는데 안 와. "

 

 카르타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 크게 한숨을 쉬더니 어린애를 어르는양 내 등을 두드리며 드물게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 아우카, 넌 아직 너무 어리고 멍청해서 모르겠지만... 엘라는 이제 없어. 고향으로 돌아갔거든. 큰 돈이 생겼다나 어쨌다나? 솔직히 걔가 무슨 수로 큰 돈이 생겼다는 건지 좀 이상하긴 한데... 여튼 고향 가서 하녀일도 안해도 된다니 좋은 거겠지. 여기서 계속 고생하느니 차라리 잘됐어. 혹시나 네가 보고 싶다고 할까봐 하는 말인데 걔 고향은 여기서 아주 아주 멀어. 그러니까 보고 싶어도 그냥 참아. 살다보면 언젠가 만날 날도 있지 않겠니? 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

 

 설명을 하는 건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건지. 말을 마친 카르타는 대답을 원하는 듯 내게 눈짓했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늘어트리고 에꿎은 이불만 도닥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카르타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입가엔 찌그러진 미소를 매달고 눈살은 찌푸렸으며 눈썹은 팔자로 쳐졌다. 언제나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 모습이 우습지도 않아서 나는 토해내듯 말했다.

 

 "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 "

 "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거야. "

 

 카르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아홉살 어린애답지 않은 말을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기분이 울적했다.

 

*

 

 아침 식사는 엉망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애를 볼 일이 없을 거라 믿었다. 상태가 워낙 참혹했기 때문에 뭐라도 먹이고 재우고 씻겨서 좀 번듯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정식으로 다시 소개 시킬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쯤이면 엘라의 이름과 자리를 빼앗은 가여운 어린애를 향한 내 복잡한 심경도 어느정도 정리가 되겠지 싶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이닝룸에 그 애가 있었다. 옷차림만 나아졌을 뿐 여전히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벽 한 면을 차지한 창에서 아침햇살이 쏟아져 방 안은 온통 황금빛으로 넘실거렸다. 그 따뜻하고 다정한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그 애는 지우는 것을 잊어버린 얼룩처럼 검게 물들어 햇살을 등지고 있었다.

 

 ...신데렐라.

 

 문득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분명 화가 났었다. 작별인사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린 엘과 아무런 귀띔도 해주지 않은 부모님, 어린애를 방치하다가 남의 집 하녀로 떠넘겨버리는 어른, 이제부터 엘라를 대신하게 될 어린애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기분이 상했지만 하필 고르고 골라 가장 약하고 어린 그 애에게 분풀이를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내가 갖는 분노가 부당하고 불합리함을 알고 있었다. 삶이 원래 그러했다. 비단 이 곳만의 일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 발전되고 풍요로운 세상에도 비극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어느 개인의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감정을 추스리고 이성을 되찾을 시간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혀가 제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아니, 아니야. 비겁한 변명은 그만두자. 어쨌거나 나는 그 애를 비난했다. 상처를 입혔다. 그것은 내가 의도했던 의도치 않았던 간에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 안녕. "

 

 어색하게 건넨 인사에 반 쯤 감겨있던 눈이 번쩍 뜨이더니 이 쪽을 향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죄책감 섞인 당황을 우물쭈물하는 태도로 감추었다.

 

 " 음... 저기 그러니까... 미안해. "

 

 나는 서둘러 양심의 가책을 지우고 싶었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매일 마주해야 할 얼굴과 이 이상으로 어색해지고 싶지 않았다. 비겁하고 이기적인 인간 같으니라고. 나는 스스로를 책망하면서도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변명들을 황급히 주워 섬겼다.

 

 " 어젯밤에는 내가 화가 많이 나서 잘못했어. 엘라가 떠난게 충격이었나봐. 그게 너에게 화풀이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닌데. 정말 미안해. "

 

 불편한 침묵이 나와 그 애를 에워쌌다. 부피를 늘려가는 갑갑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되자 나는 간신히 미소지으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 네가 딱히 밉거나 싫어서 그런 건 아냐. 첫인상이 좀 그렇겠지만... 앞으론 잘 지냈으면 좋겠다. 실례지만 이름이 뭐야? 혹시 정말로 엘라와 이름이 같아? "

 

 그렇다면 더더욱 미안하고... 말을 이으려는 순간 그 애가 설핏 웃었다. 기묘하고 꺼림칙한 웃음이었다.

 

 " 신데렐라. "

 

 네가 그렇게 불렀잖아.

 

 거칠게 갈라진 목에서 흘러나온 속삭임은 지옥처럼 낮았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별 생각 없이 버린 쓰레기가 돌아와 얼굴 앞에 디밀어진 기분이었다. 그 애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 아니, 그건 네 이름이 아냐. "

 

 왜 하필 그 이름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주 옛날, 내가 아우카 드리아스로 태어나기 이전에 읽었던 어느 동화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와 새언니들에게 구박 받으며 갖은 고생을 다 하지만 요정대모의 도움으로 참석한 무도회에서 만난 왕자님과 행복해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녀, 그녀의 이름은 본디 엘라였지만 허드렛일을 하다보니 재투성이가 되어 재투성이 엘라라는 뜻으로 신데렐라가...

 

 벼락같은 깨달음이 일었다.

 

 저 애, 그리고 저 애가 처한 상황은 그 동화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엘라, 하녀일을 하는 엘라. 하나뿐인 보호자를 잃고 낯선 성인여성과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두 명의 여자아이와 함께 살아야 하는 엘라. 더럽고 불쌍하고 꾀죄죄한, 재투성이 엘라.

 

 나는 왜 하필 그 이름을 말했을까?

 

 왜?

 

*

 

 충격에 휩싸인 마음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식사준비를 마친 가족들이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카르타는 식사 준비를 도우랬더니 여기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냐며 입술을 삐죽였지만 솔직히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으므로 무시했다.

 

 그 애 앞에는 멀건한 수프가 놓였다. 너무 굶은 상태에서 급하게 음식을 섭취하면 탈이 날까봐 취한 조치 같았다.

 

 그러나 저 애는 이 또한 차별이라 여기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식단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내 몫의 빵조각을 성의없이 뜯었다.

 

 드리아스 남작가는 귀족치고는 넉넉지 않은 편에 속했다. 어린아이의 몸이지만 저택을 드나드는 사용인들의 숫자만 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구색을 갖추었던 사용인들은 날이 바뀌고 해가 갈수록 줄어들어 종국에는 엘라 하나만 남았다. 그나마도 이제는 비쩍 마른 어린애로 바뀌었지만.

 

 기울어지는 살림살이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좀처럼 차도가 없는 아버님의 병환이었다.

 

 드리아스 남작부부는 페르카 내전의 공신이었다. 전장의 악몽, 검은 화염의 마법사 이니스 시니페르처럼 용맹하고 뛰어난 무장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황제는 마땅히 공신을 치하하고 포상을 내렸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은 비 갠 후에 반짝 뜬 무지개와도 같아서 몹시도 아름답고 명예로웠으나 그만큼 짧고 덧없었다.

 

 고통은 길게 남았다. 전쟁은 끝났으나 후유증은 끝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으로 아버님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파괴된 것은 육체만이 아니었다. 나는 자정이 넘은 시각, 환청처럼 울려퍼지는 비명에서, 한숨과 고통스러운 신음소리 속에서, 두 분이 아직도 전장의 밤을 떠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행히도 어머님은 힐러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낫지 않는 병을 어떻게든 치료해보려고 발버둥치려는 사람의 심정을 나는 차마 짐작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어머님은 묵묵히 영지를 꾸리고 우리를 가르치며 아버님을 치료했다. 그 결과 어머님은 몸이 셋이라도 모자라게 바빴다. 만약 아버님의 누이이자 어머님의 소꿉친구인 아멜루스 고모님이 행정관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어머님은 진작에 과로로 쓰러졌을 것이다.

 

 아멜루스 고모님은 므나쉬가 드리아스 남작가를 위해 보내준 페투스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드리아스 남작가는 진작에 영지를 잃고 귀족명부에서도 이름이 사라졌을 것이다. 귀족들의 체면치레를 위해 으레 행해지는 친척 챙기기와는 달리 그녀는 제 피붙이라면 정말 유별나게 아꼈다. 어머니가 매번 사양하는데도 불구하고 귀한 약재들과 조카들을 위한 값비싼 선물들을 보내는 것이 그 증거였다. 심지어는 언젠가 나와 카르타 중 한 명을 양녀로 맞이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어머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셨지만.

 

 " 야. "

 

 딴 생각에 빠져서 기계적으로 빵조각을 씹어 삼키고 있는데 카르타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너 뭐 했어? "

 " 왜? "

 

 카르타는 그 애가 앉아 있는 쪽을 향해서 눈짓했다. 나도 따라서 쳐다보니 그 애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까지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어둑한 밤하늘처럼 푹 꺼진 눈에서 기묘한 광채가 반짝였다. 언제부터 저렇게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별안간 이 공간이 불편해졌다. 나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토록 열렬한 시선을 받아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색하고 불편해서 고개를 떨구었다. 낯설고 거북한 관심이었다.

 

 " 나도 몰라. "

 

 마침 접시도 거의 비웠겠다, 나는 남은 내 몫을 입 안에 한가득 욱여넣고는 황급히 삼켰다. 목이 턱턱 메어왔지만 감사인사를 하고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 애의 눈빛은 집요하게 날 따라왔다.

 

*

 

 결국 그 애는 신데렐라가 되었다. 그 애가 그 이름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신데렐라는 말 안 듣는 고양이처럼 자신을 지칭하는 다른 모든 이름들을 무시했다. 어차피 그 이름을 싫어하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 애를 자연스레 신데렐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동안 먹이고 씻기고 입혀서 제법 사람 꼴을 갖추게 된 신데렐라는, 놀랍게도 무척 예뻤다.

 

 땟국물이 줄줄 흘러서 무슨 색인지도 알아보기 어려웠던 머리칼은 햇살처럼 반짝이는 금색이었다. 보기 드문 보라색 눈동자는 값비싼 보석처럼 깊이와 광채를 동시에 머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군데 군데 남아있는 멍자욱과 생채기들이 애처로운 피부는 우유처럼 희고 고왔다. 이런 게 바로 날 때부터 다른 완성형 미모구나 싶었다. 티비에서 영화에서 인터넷에서 본 무수히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진들이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 생생했건만 눈 앞에서 살아 숨쉬는 미인 하나를 이기지 못했다.

 

 문제는 내가 아름다운 사람에게 면역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저렇게 멀리서도 후광이 번쩍거리는 어린이를 차마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원래도 낯을 가리는 사람이다. 그동안은 여섯살을 천진함을 가장하여 뻔뻔스레 지내왔지만 데뷔하자마자 검색어 1위 찍을 것 같이 예쁜 어린이는 정말 처음이란 말야... 만지면 상할까 불면 날아갈까 너무너무 무섭다.

 

 ㅠㅠ

 

 나는 덤불 뒤에 숨어서 쪼그리고 앉은 흙바닥에 이모티콘을 그렸다. 딱 지금 내 기분 같았다.

 

 " 뭐해? "

 " 아! 깜짝아! "

 

 그런 내 꼬라지를 우연히 발견한 카르타가 불쑥 나타나 물었다.

 

 " 너 지금 쟤 피해서 여기 있는 거야? "

 

 카르타가 텃밭 근처에서 나를 찾아 두리번 두리번거리는 신데렐라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 들키니까 저리가... "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더욱 작게 웅크렸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갖고 싶었다. 부모님도 카르타도 신데렐라도 없는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이. 예전에는 그게 참 쉬웠는데 요즘에는 너무 어렵다. 다 신데렐라 때문이었다.

 

 그랬다. 웃기게도 신데렐라는 나를 몹시 따랐다. 낯가림을 하는 상대가 어미 따르는 새끼오리마냥 나를 쫓아다닌다니. 정말... 너무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신데렐라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라면 뭐든지 따라했다. 내가 머리를 빗으면 그 애도 머리를 빗고 내가 하품을 하면 그 애도 하품을 하는 식이었다. 기겁한 내가 그 애를 떼어놓으려 뜀박질이라도 하면 신데렐라는 마치 야반도주하는 빚쟁이라도 잡으러 가는 것처럼 기를 쓰고 쫓아왔다. 이상한 건 그렇게 붙어 있으면서도 씻거나 잠잘 때에는 또 귀신같이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준다는거야? 뭐야?

 

 " 심술 좀 그만 부려. 쟤도 외로운 애야. "

 " 그런 거 아냐. "

 

 그것도 어느 정도껏이어야지, 옆에서 내가 고통받는 모습을 매일 같이 봤으면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카르타에게 기가 찼다. 자기는 상대도 안해주면서 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태도가 괘씸했다.

 

 " 그럼 언니가 나 대신 놀아줘. " 

 " 뭐래. 나랑은 수준이 안맞아서 안돼. 그리고 네가 제일 한가하잖아. "

 

 아홉살 주제에 수준 운운하기는. 그렇지만 약오르게도 카르타의 말이 맞았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나는 천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었다. 이전 생에서는 평범한 소시민 1에 불과하였으나 환생하고 나서는 현대지식을 이용하여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 제 2의 인생을 신나게 살아가는 소설 속 환생자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원대한 꿈은 카르타의 빛나는 지성에 밀려 무참히 어그러졌다. 아무리 카르타가 똑똑하다지만 명색이 정신만은 성인인 내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천재인줄은 몰랐지 뭐야. 흑흑. 게다가 여기서도 수학이 중요할 줄은 몰랐어.

 

 " 애가 불쌍하지도 않아? "

 

 나도 내가 그 애에게 유일한 선택지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좁디 좁았다. 자신의 친절하지 않은 보호자와 떨어져서 낯선 환경에 처한 신데렐라, 그 애는 정 붙일 사람이라고는 정말 어느 누구도 없는 외톨이였다. 드리아스 남작 부부는 신데렐라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해주었으나 그 애의 감정적 허기까지 채워줄 정도로 한가하지 못했다. 고용주라는 지위도 거리감을 주기 충분했을 것이다. 카르타는 천성은 나쁘지 않았으나 냉정하고 자아가 강해서 타인에게 무관심했다. 무엇보다 카르타는 아멜루스 고모님이 내주신 숙제더미들을 해치우느라 바빠 동생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식사시간과 취침시간을 제외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오랜만이었다.

 

 남은 것은 나 혼자였다. 할 일도 없어 보이고 자신을 대놓고 밀어내지는 않는 또래 여자애. 그 애가 손을 내밀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카르타가 커다랗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 신데렐라! 너네 작은 언니 여기있다! "

 " 악! 언니! "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냉정한 어린이 같으니라구... 나를 발견한 신데렐라가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뛰어왔다. 가볍게 흔들리는 금빛 꽁지머리가 꼭 강아지 꼬리같았다. 나는 똑바로 바라보기엔 너무 예쁜 신데렐라의 얼굴을 슬그머니 외면하며 카르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르타는 내 눈빛 따윈 가볍게 무시해버리고는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결국 나는 신데렐라를 향해 애매하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 애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발갛게 물든 뺨이 참 예뻤다. 그 모습이 좋으면서 싫었다. 나는 왜 이렇게 저 애가 불편하고 찝찝한 걸까. 아마도 첫인상과 저 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끌려나오는 죄책감이 원인이겠지. 어딘가 꺼림칙했던 분위기와 우중충했던 날씨도 한몫을 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면 참으로 대수롭지 않은데 어딘가가 계속 걸리고 불편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부분이 턱턱 걸려 이음매가 엇도는 톱니바퀴와도 같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과민한 걸까?

 

 하긴, 진짜 여섯살은 이렇게 예민하고 섬세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먼 옛날 정말로 내가 여섯살이었을 때에도 이상한 일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들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수롭지 않게 잊혀지고 일상은 언제나 평화롭게 흘러갔었지. 지금 나는 너무 강박적이다. 불확실한 예감에 연연해 안그래도 힘든 인생 더 힘들게 살지 말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신데렐라가 어설프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어색한 미소로 그것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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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한 열편 쓰고 난 담에 무료연재하려고 했는데 오늘 핵심 키워드 존똑인 작품 발견해서 접기루 함ㅋㅋ

사실 사람 머릿속이 거기서 거기니 되게 특이한 키워드는 아니고 줄거리도 전혀 다른 것 같지만 걍 내 양심에 찔려서...

그렇다고 이대로 전부 폐기하는 건 넘 아까워서 여기라도 올려ㅋㅋㅋ

사실 이건 최종본 아니라 3안 정도 되는데 이걸 젤 길게 쓰기도 하고 최종본은 다른 작품 쓰게 되면 문장 재활용하려고 이걸루 올림ㅋㅋ



올린 김에 결말까지 썰 풀자면(사실 썰이 풀고 싶었음ㅋㅋㅋㅋㅋ)


 여주는 흔한 신데렐라 패러디 소설에 환생한 아이임. 포지션은 배다른 둘째 언니.

동화와는 달리 신데렐라는 전쟁에서 공세웠더니 토사구팽 당한 공작의 하나뿐인 후계자인데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여장하고 여주네 집에 맡겨짐.

여기까지 본문 내용. 그리고 이 신데렐라가 남주임ㅋㅋ 물론 여주는 쟤가 여자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음.


 처음에는 학대와도 다름없는 처지에 마음을 닫았던 남주... 하지만 첫눈에 여주보고 반함(태어나서 저렇게 예쁜거 처음봄, 문화충격)

여주는 죽기는 싫지만 남주도 싫어서 차갑게 대하다가도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늘 손을 내밈. 여주 가족들 태도는 뭐 평범.

남주는 어느새 여주 가족들에게 마음을 열고 여주를 특별하게 여김.

남주는 여장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예쁜데 머리도 반짝거리는 금발이고 처진 눈에 눈물점도 있고 눈동자도 보라색이고 금손님이라서 여주 악성곱슬도 잘 손질해줌ㅠㅠ 그래서 나중에 여주한테 자기도 데려가달라고 조를 때 자기가 없으면 언니 머리칼에 걸려 죽은 쥐를 발견하게 될거라고 함ㅋㅋ

여주가 남주랑 같이 있으면 원작의 압박 같은 걸 느껴서 자꾸 밀어내는데도 언니언니 하고 따라다니고 좋아하는거 다 티내고 증말 댕댕이가 따로없다ㅠㅠ 물론 여주는 걍 자매애인줄^^;

그런데 얘 속은 여주네 가족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도 있고 자기가 언제까지 여장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니까 타들어감

자기 자신을 들키기 싫어서 더 과장되게 꾸미는데 집착하고 키가 자랄까봐 건강을 해칠 정도로 다이어트도 함ㅠㅠ

뭐 그러면서 전쟁 후유증으로 몸 아팠던 여주네 아빠도 하늘나라로 떠나고 여주네 집엔 빚이 차곡차곡 쌓임


 그러던 어느날 전쟁이 나면서 여주네 엄마랑 넘나 천재인 첫째언니가 전쟁에 차출당함.

여주랑 남주도 따라간다고 했지만 어려서 안된다고 거부당함 너네는 집을 지키라고 소리들음.

그러다가 엄마랑 언니가 전장에서 고립당해서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주가 에라 모르겠다 구하러 감. 남주는 안데려가려고 했는데 세상 징징대면서 조르고 몰래 따라와서 어쩔 수 없이 데려감.

사실 여주는 특별히 세진 않았으나 다행히 다른 사람들 몰래 남주가 친엄마(=토사구팽당한 공작) 장비 꺼내들고 잘 구함.

거기서 황태자도 만나고 황태자는 섭남답게 여주한테 관심있어서 맴도는데 남주가 연막쳐서 여주는 황태자가 남주한테 관심있는 걸로 착각함.

그리고 신데렐라 원작 떠올리면서 원래 운명은 저렇게 끌리는건가^^ 방해하지 말아야지^^ 착각 거하게 함ㅋㅋ 남주 혼자 속터짐...

여튼 꽤 힘들었던 전황은 정체를 숨긴 남주의 활약으로 승리함

그렇지만 민심은 흉흉함. 남주가 친엄마 장비 풀장착해서 죽은 공작이 돌아와서 복수할거라는 헛소문이 돌았기 때문


 결국 황제는 관대한 척 함정을 짬, 전쟁에서 공을 세운 용사를 찾겠다며 막대한 상금과 공작위를 걸고 무투회를 개최함.

빚많은 여주네도 여기 참가하기로 하는데 남주도 참가하고 싶어했으나 다들 얘가 싸울 줄 아는걸 모르기 때문에 반대함.

결국 남주는 또 정체 숨기고 참가하고 1등함 뭐 그럼서 본인 남자라는 거 밝히고(알고보니 여주가 젤 늦게 알음) 폭풍 대쉬해서 사귐 결혼

황제 권선징악 해피엔딩...


 사실 남주는 황제의 애첩(황제가 무너뜨린 나라의 왕자, 무심함, 황제 트루럽)과 공작이 가면무도회에서 원나잇해서 생긴 아이고 이를 질투한 황제가 공작을 토사구팽하게 되었다는 출생의 비밀도 있음^^ 황제 권선징악은 대충 이 출생의 비밀로 여차저차함.


 여기까지 쓰니까 넘 길다^^ 연재 시작했어도 완결까지 몇 년 걸렸을 듯ㅋㅋ 괜히 구상만 1년 걸린거 아니넹ㅋㅋ

끝까지 읽어줄 토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너스로 본편 쓰기전에 신나서 써재낀 여주 심리랑 남주 외전도 놓고 감ㅋㅋ

앞으로는 좋은 아이디어 생기면 완벽하게 한답시고 뒤엎지 말고 진도나 빨리 빨리 빼야지ㅠㅠ 글쓰는 토리들 모두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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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심리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다.

 사랑스러운 공주, 늠름한 왕자, 특별한 힘을 가진 영웅,

 혹은 부당하게 구박받는 가엾은 아이.

 때로는 혹독한 시련이 겨울바람처럼 몰아치지만

 선한 성품을 잃지 않고 꿋꿋이 버티면

 결국 언젠가는 따스한 봄날처럼 아름다운 결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일상은 평화롭다 못해 무미건조하며


 나는 사랑스럽지도 늠름하지도 않고 특별한 힘도 없으며 구박받는 일도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므로.

 

 하지만 여기,

 

 주인공이 있다.

 

 나는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며 정성껏 마룻바닥을 닦고 있는 아이를 곁눈질해보았다. 빛바랜 금발과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운 푸른 눈동자, 얼굴은 무척 아름답지만 차림새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한 때 그것은 청명한 여름하늘처럼, 쏟아내리는 햇살처럼, 갓 피어난 장미 봉우리처럼 눈부시게 빛났건만 지금은 색채를 잃고 생기를 잃고 우울의 밑바닥에 깊게 가라앉아 있다.

 

 짜증스러운 기분에 펼쳐둔 동화책을 거칠게 덮었다. 그 서슬에 아이가 어깨를 움찔거린다. 나는 잠시 그녀의 보잘것없는 행색을 감상하듯이 바라보다가 다시 동화책의 표지로 시선을 옮긴다. 표지의 그림은 아름다웠다. 새벽빛을 닮은 푸른 바탕에 섬세한 은색 덩굴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한 가운데에는 투명하고 신비롭게 반짝이는 유리구두가 한 짝, 그려져 있다. 그 위에는 은박을 입힌 제목이 멋들어지게 그려져 있다.

 

 '신데렐라'

 

 13살 생일선물로 어머니를 졸라 만든 이세계에 단 하나뿐인 동화책.

 

 더러운 앞치마를 걸치고 얼룩덜룩한 머릿수건을 두른 아이가 바닥을 닦는 자세 그대로 이 쪽을 힐끔거린다. 아마 눈치를 보는 거겠지만 그럼에도 눈빛은 당당하다. 그래, 너는 그렇게 시련에 굴하지 않고 선한 성품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 행복한 결말을 손에 넣으렴.

 

 나는 발이 잘리고, 눈을 잃을 거야.

 

 안녕. 내 동생,

 

 신데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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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전. 엘라 드리아스의 새벽 *남주 원래 이름이 릭스임







 또 아침.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지만 릭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종종 새벽잠을 설치는 드리아스 남작-새어머니-를 제외하면 아마 그가 남작가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이리라.

 

 그는 능숙한 손길로 이불을 개고 시트를 정리한 후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그의 폐부에 스며들었다. 얼마간 심호흡을 한 그는 엘라가 되기 위해서 서둘러 세수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다지 선명하지 않은 거울 속에는 누구나 놀라 뒤돌아볼만큼 아름다운 미소년이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릭스는 날카롭게 각이 서기 시작한 턱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손가락 끝에 보송한 금빛 솜털이 몇 가닥 걸린다. 그는 은빛 족집게를 꺼내 그것을 모두 뽑아버린 후 알코올을 묻힌 거즈로 소독했다.

 

 다음 차례는 굵고 짙어지기 시작한 눈썹이었다. 진한 눈썹은 엘라를 '너무' 잘생겨보이게 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매일 다듬어야 했다. 눈썹이 뽑힌 자리는 따가웠고 화끈거렸으며 이따금 뾰루지가 생기기도 했다. 아우카는 면도날로 밀어버리면 될 걸 아프게 무슨 짓이냐며 타박했지만 그는 고집스레 족집게 사용을 고수했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머지않아 성장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건장하게 자란 몸으로 면도날을 든 모습을 보면 가족들은 자신에게서 분명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 앗, 따가워. "

 

 다른 생각을 하다보니 무심코 여러 가닥을 한 번에 뽑아버렸다. 붉어진 부분을 차가운 물수건으로 문지르자 통증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눈썹 정리를 완료하고 다시 거울을 보자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가 우울한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라다.

 

 언제나처럼 순하게 처진 눈매에 연분홍색 도톰한 입술이 사랑스러운 그녀를 보자 새삼스레 기골이 장대한 어머니를 닮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는 지금도 자매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어깨도 더 넓었다. 그러나 -친어머니의 말에 따르면-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는 미인이었다던 아버지와 똑닮은 얼굴 덕택에 성장이 좀 빠른 애 취급을 당하며 간신히 엘라로 있을 수 있었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금빛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공들여 올리고 입술에 장밋빛 연지를 바르자 중성적인 분위기의 소녀는 순식간에 조숙한 여자애가 되었다. 그녀를 기준으로 왼쪽 입꼬리 위의 애교점이 매혹적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굴을 완성한 다음에는 차림새다. 엘라는 갈라진 곳 하나 없이 찰랑이는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고 흰 머릿수건을 썼다. 속바지나 속치마 따위를 빈틈없이 챙겨입은 뒤 목깃이 높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차분한 색상의 롱스커트 위로 귀여운 자수가 놓인 앞치마를 매자 그녀는 이제 제법 맵시 좋은 시골 처녀처럼 보였다.

 

 엘라는 옅게 미소했다. 드리아스 남작가의 여자들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화장을 하지 않는다. 속치마를 갖추어 입지 않는 것은 부지기수고 때로는 속바지마저 잊는다. 그 뿐일까. 잠옷 차림으로 저택을 활보하거나 바지를 입고 텃밭이나 정원을 자유로이 활보한다.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저택에서 가장 여성스럽게 꾸미는 사람이 남자인 자신뿐이라는 점이 우습다.

 

 차라리 자신이 진짜 여자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양아들이라도 되었더라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릭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짜 자신으로서 가족들을 대하는 나날. 제일 먼저 일어나 요란스레 단장을 하거나 몸이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다이어트를 빙자한 절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

 

 자라는 키를 감추려 허리를 굽히고 벌어지는 어깨를 움츠리며 이상하게 변한 목소리를 숨기려 일부러 감기에 걸리지 않아도 되는 인생. 한계까지 빠진 몸무게를 유지하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여름에도 목감기 탓을 하며 목깃이 긴 옷을 입거나 스카프를 매고 상의 안에 패드를 덧대지 않아도 되는 일상.

 

 더이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꿈에 번민하여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는 새벽.

 

 거울 속 엘라의 흠잡을 데 없던 미소가 이지러졌다.

 

 릭스는, 릭스 시그니페르는 엘라 드리아스가 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겉보기라도 이상하지 않도록 여자 흉내가 완벽해야 하는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몸으로는 그것조차 힘들었다.

 

 드리아스는 보잘 것 없던 자신을 거두어 주었는데, 반역자로 처형당한 여자의 아이를 남몰래 입양하여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었는데.

 

 은혜도 모르는 자신은 배은망덕하게도 그 애를, ...아우카를, 감히...

 

 마음에... 품고...

 

 눈시울이 홧홧해졌다. 나이 먹는 것이 무섭다. 어릴 적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두려움이었다. 언젠가 결국 자라는 몸을 감추지 못하고 남자라는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바뀌게 될 상황들, 더이상 자매로서 가족으로서조차 함께 하지 못할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를 좀먹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남자로서 그녀의 앞에 서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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