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재신이 악몽으로 기억 될 시간을 보내고 궐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모두의 모습에 웃고 싶었지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미소가 아닌 눈물이었다. 한동안 중전의 곁에서 시간을 보낸 재신이 왕위계승2위로써 옥쇄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은규태의 계획이 다시금 시행되었다.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시는 겝니까.”

 

편전. 내린 발 뒤에 앉아 있는 재신이 답답한 듯 말했지만 재신 앞, 양 옆으로 죽 서 있는 조정신료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며칠 전까지 아무도 등청하지 않아 재신을 당황케 하더니 이제는 논해야 할 조정 일에 대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아 당황케 만든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재신은 신료들에게 묻고, 물어야 일을 처리할 수 있는데 그 누구도 제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아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영상 대답해 보세요. 이 일은 이리 처리하면 되는 것입니까?”

“..........”

이래서 등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가.”

“.....?”

 

누군가가 불평 섞인 목소리로 툭, 하고 말을 내뱉는다. 재신이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자 병판 김천수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공식적으로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본디 나랏일이라 함은 전하께서 먼저 생각하시고 저희에게 말씀을 해주셔야 빨리 처리할 수 있는 것인데 공주 자가께오선 아모 것도 모르시니 일이 진행이 되지 않지요. 이래야 저렇게 쌓여 있는 상소문을 조회 시간에 전부 처리하실 수 있겠습니까?”

병판!”

이거 원 차라리 세 살배기 아이를 데려다가 가르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아무리 말씀드려도 자가께오선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시니..”

 

병판의 말을 이어 다른 누군가도 불평한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신료들이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하며 재신의 흉을 본다. 웅성거림이 커지자 용상의 팔걸이 잡은 재신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보다 못한 내관이 소란을 잠재우려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차라리 모든 일을 영상대감께 맡기십시오. 자가께오선 그저 옥쇄만 찍으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맞습니다!”

그럼요!”

아니, 차라리 왕위를 영상대감께 물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려고 오늘은 등청을 한 것일까. 이제는 모두 나서서 재신의 퇴위를 요구한다. 모욕감에 얼굴이 빨개진 재신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만다. 자신을 업신여길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리도 심할 줄은 몰랐다.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문다. 여기서 울면 아니 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나약한 모습이다, 를 되뇌며 눈물을 참던 재신은 은규태의 마지막 한 마디에 결국 눈물을 흘리며 편전을 나서고 만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더니..”

 



*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습니다...”

 

재신의 힘없는 목소리에 시경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매일같이 재하를 찾기 위해 다니는 터라 재신을 자주 만날 수도 없어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크다. 시경이 재신의 볼을 쓴다. 보드라웠던 볼이 어느 샌가 까칠해져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자가.”

“.......악몽입니다. 매일같이 저들의 조롱하는 말을, 비웃는 눈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싫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규태를 말릴 사람은 자신 밖에 없는데, 재신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을 들킨 것 마냥 재신이 용상에 오르자마자 집에서 쫓겨난 시경은 재신보다도 규태를 만나기가 더 힘들어져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재신이 고개를 젓는다. 자신을 위해 가문을 버린 시경이 고마우면 고마웠지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제일 원망스러운 것은 꽁꽁 숨은 채 나타나지 않는 재하였다.

 

얼마 전 승록대군마마께서 기거하셨던 곳을 찾았습니다.”

정말이옵니까?!”

. 허나 이미 떠나신터라 만나 뵙지는 못했사옵니다.”

 

반색하던 재신은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시무룩한 표정을 한다. 서찰을 남겼으니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올 것이라며 재신을 위로하는 시경이 고마워 재신이 시경의 손을 꼭 쥔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경이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

 



이제 슬슬 입질이 오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부터 유생들까지 공주의 퇴위를 성토하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이게 무언가 했는데, 이제 보니 참으로 묘책이십니다.”

허허. 다 경들의 공 아니오.”

 

신료들의 말에 규태가 미소 짓는다. 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용상에 오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계획이 어디 있는가. 봉구에게서 꼬박 오는 서찰 속 재하는 겨우 숨만 붙어 있다 하니 옥쇄를 빼앗은 후 대비와 재하, 그리고 재신까지 처리하면 될 것이다.

 

공주의 표정을 보아하니 당장 오늘이라도 옥쇄를 내놓을 것 같습니다.”

허허허. 아녀자의 몸으로 그 높은 곳에 있는 것이 힘들기도 하겠지요.”

오늘 밤.. 어떻습니까.”

 

김천수의 말에 모두의 눈이 탐스러운 먹잇감을 앞에 둔 짐승들처럼 가늘어진다. 제각기 머릿속에는 제가 얻을 수 있는 관직들이 떠다닌다.

 

좋소. 오늘 밤 편전에서 봅시다.”

 

이미 그 탐스러운 먹잇감을 한 입 베어 문 은규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 밤. 왕조가 바뀐다.

 



*



 

...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러운 신료들의 행동에 놀란 재신이 한달음에 편전으로 달려온다.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무장을 한 장정들이 편전을 둘러싸고 있다. 겸사복들은 날카로운 검을 찬 채 신료들의 뒤에 기립해있다. 재신이 그들을 지나쳐 용상에 앉는다.

 

이만 물러나시지요, 자가.”

 

병판 김천수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말한다.

 

더 이상 하늘은 자가의 편이 아닙니다.”

 

예판 이기승 또한 한 발 앞으로 나온다. 그 뒤를 이어 신료 한 명 한 명씩 앞으로 나오며 재신의 퇴위를 요구한다. 경황이 없어 보지 못한, 편전 앞 부복하고 있는 유생들의 성토 소리가 들린다.

재신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진다. 유생들의 성토 소리가 귀에 가득하다. 보이는 것은 자신을 노려보는 수많은 눈들이다. 시경은 어디 있지, 재신이 눈만 굴려 주변을 살핀다. 이럴 때 자신을 지키지 않고 어디로 가버린 거지? 겸사복들이 쥐고 있는 검들이 크게 보인다. 저 칼로 자신을 벨 수도 있다는 공포가 심장을 압박한다. 이제는 호흡이 눈에 띠게 거칠어 졌다. 덜컹, 거리는 소리로 소스라치며 놀란다. 보니, 옥쇄를 든 판관이다. 재신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용상에서 내려온다.

 

불필요한 살생은 원하지 않습니다, 자가.”

 

영의정 은규태가 마지막으로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말한다. 불필요한 살생이라니? 정녕 나를 죽이려는 게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규태를 바라본다.

 

이미 소신에게 선위하겠다는 교지를 적어두었습니다. 그저 저 옥쇄를 찍으시면 될 뿐입니다.”

영상..”

그러면 살려는 드리지요.”

영상!!!”

 

재신이 분노와 공포를 담아 소리친다. 옥쇄를 든 판관이 규태와 재신에게 다가온다. 재신이 두려운 눈으로, 규태가 탐욕이 가득한 눈으로 옥쇄를 바라본다. 재신이 버티자 근처 겸사복이 다가와 억지로 재신의 손에 옥쇄를 쥐어준다.

 

놓거라!”

 

겸사복에게 잡힌 손을 빼지 못한 채 그저 이끄는 대로 교지 위로 향한다. 빼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언제 온 것인지 또 다른 겸사복이 재신의 어깨를 쥔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재신의 발악이 심하지만 사내들을 이길 수 없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교지 위 옥쇄를 찍으려는 순간, ! 하는 소리와 함께 재신을 누르고 있던 겸사복이 옆으로 고꾸라진다. 화살이다. 하나의 화살을 시작으로 여러 발의 화살이 날라 오자 놀란 모든 이들이 제 몸을 숨기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본다.

 

“.....오라버니..”

 

기둥 뒤에서 나타난 재하가 유유히 신료들을 지나쳐 재신에게 다가온다. 아픔에, 놀라움에 눈물을 흘리는 재신을 일으킨 재하가 눈을 찡긋해 보인다.

 

늦어서 미안.”

“.....바보.”

 

상궁이 다가와 재신을 부축해 뒤로 빠진다. 바닥에 떨어진 옥쇄를 주은 재하가 몸을 돌려 신료들을 바라본다.

 

, 왕위계승1위인 승록대군의 등장이오.”

...어찌!!”

이럴 수가!!”

 

신료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진다. 봉구의 감시를 받으며 숨만 붙어있어야 하는 재하인데, 어찌 이곳에.. 모두가 재하가 아닌 은규태를 바라본다. 하지만 공황에 빠진 은규태는 재하에게 보낸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재하가 규태가 적어 놓은 교지 위 은규태라는 이름을 지우고 이재하라는 이름을 적고는 무심하게 옥쇄를 떨어뜨린다.

 

.’

 

뚜둑뚜둑, 굳은 목을 한 바퀴 돌리며 용상에 앉은 재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팔걸이를 툭툭 친다.

 

이 의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리 무서운 일이 벌이시는 겁니까, 영상.”

“......승록대군...”

어차피 영상과 나는 출발 자체가 다릅니다. 괜한 짓입니다.”

“..........”

그러니 이제 그만 하시지.”

 

능글맞게 말하던 재하의 목소리가 극도로 낮아지며 군주로써의 첫 명을 내린다.

 

이 나라 조선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거라!!!!”

 

신료들이 재하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신료들의 뒤에 기립하고 있던 겸사복들의 칼날이 그들을 벤다. 문답무용.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은 채 모든 이들의 목숨을 거둔다. 단 한 번의 반항조차 하지 못한 신료들이 단말마를 내며 쓰러진다. 오직 한 사람, 은규태 만이 살아남아 재하를 마주한다. 수 개의 칼날이 은규태의 목에 겨누어지고 무릎을 꿇은 규태가 선 재하를 올려다본다.

 

이것이 당신과 나의 위치요. 나는 당신을 내려다보고, 당신은 나를 올려다보는.”

“.............후후..”

이미 당신이 저지른 역모의 증좌는 확보했소. 윤택수의 역모 누명, 윤의공주의 납치, 그리고 선왕전하의 독살까지. 이대로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소신은 ..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윤택수의 역모 조사는 선왕전하께서 윤허하신 일이었으며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공주자가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독살이라니요. 소신은 그 누구보다 이 나라를 위해 충심을 보였습니다! 헌데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규태가 대응하자 재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역시, 괜히 조정에 오래 몸을 담고 있는 자가 아니다. 노련하고 능숙하게 빠져나가려는 규태의 앞에 색이 변한 은 숟가락이 떨어진다.

 

승하하신 선왕전하께서 내게 직접 주신 것이오. 그리고 이리 은 숟가락의 색을 변하게 만든 장본인 또한 내 손 안에 있으니 발뺌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



 

이게.. 뭐야..”

 

재하는 제 손에 들린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재강은 쓸쓸한 미소를 흘린다.

 

오늘 저녁 수라상에 사용한 숟가락이다. 이전에는 그저 막연히 생각만 해왔는데 그걸 보니까 확실해졌다.”

.....”

, 독에 중독되었어.”

 

재하의 눈이 커진다. 그저 제 안부를 말하는 사람처럼, 재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중독되었다 한다. 덜그락. 결국 손에 들린 숟가락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누구야.. 누가 이리도 잔인한 짓을..”

오래전에 영상의 천거로 수라간의 사람들이 바뀌었다. 그 때부터겠지..”

“....개자식...”

난 얼마 남지 않았어. 뒤를.. 잘 부탁한다, 승록대군. 아니, 재하야.”

 

툭툭. 힘없는 손으로 재하의 어깨를 두드린다. 오랜만에 만나는 형에게서 곧 있으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충격은 얼마나 클까. 재하는 한참을 재강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울고 또 울었다. 지키지 못해 미안해서, 너무 늦게 와 미안해서, 그리고.. 떠나는 곁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해서.

 

 


*


 

 

“.......”

죄인을 하옥하라. 대역죄인 은규태는 사흘 후 광화문 광장에서 능지처참에 처하고 은규태의 장자는 연좌제를 적용하여 그 역시 참수 할 것이며..”

 

거침없이 말하던 재하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과 함께 궐에 들어와 저 문 너머에서 모든 것을 다 듣고 있을 시경이 생각나서였다. 주먹을 꾹 쥔 채 말을 이었다

 

그 이외의 가족들은 관노가 될 것이다. 또한, 이번 역모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찢어 짐승의 먹이로 줄 것이니 운검과 겸사복은 저 시신들을 거두어라.”

!”

 

운검과 겸사복들이 재하의 명을 받들어 분주히 움직인다. 이윽고 편전에는 재하와 운검 두 명만이 남았다. 저 멀리 문이 열리고 굳은 얼굴의 시경이 들어온다.

 

“....시경아.”

마마, 아니 전하.”

 

옥쇄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한 나라의 군주가 된 재하에게 사배를 올린 시경이 무릎을 꿇는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시경아.”

저 역시 아버지의 자식이니 참수를 당해야 마땅하겠지요.”

 

재하가 눈을 감는다. 제 아무리 가문을 버린다고는 했지만, 가문의 죄를 짊어지려는 시경이 안타까워 미칠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자가의 모습을 보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

자가께.. 제가 연모했다, 아니 연모한다 그리 전해주시겠습니까.”

“...........”

혹 내세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때도 다시 연모해도 되는지 여쭈어 주십시오.”

 

시경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제 사랑하는 정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그 고운 얼굴에 입맞춤을 하고 싶다. 고운 손을 한 번만 더 잡고 싶다. 여린 어깨를 한 번만이라도 더 안아주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사형.. 강녕하십시오.”

 

사형, 이라는 호칭에 결국 가슴 속 뜨거운 응어리가 울컥하고 만다. 재하도, 시경도 눈물을 흘린다. 재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시경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한다. 시경이 다시 재하에게 사배를 올린 후 운검들과 함께 편전을 나선다.

홀로 남겨진 재하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린다.

 

 


*



 

“...........”

 

 

울고 또 울었다.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그럼에도 자리에 누운 재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은규태와 그의 자식이 참형을 당한 후, 벌써 이틀 째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비뿐만 아니라 모든 상궁들이 발을 동동 구른다.

 

결국 또 혼절을 하고 말았다. 놀란 재하와 어의가 내궁을 찾는다. 심각한 얼굴로 재신의 맥을 짚던 어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재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어떻소.”

“....주변을 물리쳐 주시겠습니까.”

 

심각한 일인 것 같다. 재하가 얼른 주변을 물린다. 대비는 한사코 자신도 함께 듣겠다고 했지만 완고한 어의의 태도에 결국 대비 또한 내궁을 나선다.

 

이제 말해보시오.”

 

재하가 재촉하자 어의가 한숨을 쉬고는 작게 활맥이 느껴진다, 아뢴다. 활맥이라는 말에 재하의 눈이 얼떨떨해진다. 활맥이라니, 혼인조차 치루지 않은 재신이 임신이라니.

 

소신이 잘 못 짚은 듯하여 여러 번을 짚어보았으나... 활맥이 맞사옵니다, 전하.”

“...., 이거 참..”

 

어이가 없어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재하는 이 일을 함구하라 명하고는 어의를 내보낸다. 때맞춰 재신이 정신을 차린다.

 

.... 회임... ”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었지만 재신은 이해했다는 듯 제 아랫배를 손을 쓰다듬는다.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다.

 

회임.. 맞구나..”

“...?!”

달거리가 끊긴 지 한참이 돼서 긴가민가했는데, 방금 어의 말을 들으니 맞구나.”

듣고.. 있었어?”

 

재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꿈에서 시경이 나왔다며, 기쁜 듯이 웃으며 무어라 하는 모습을 보다 눈을 떴는데 때마침 어의가 자신에게서 활맥을 느껴진다는 말을 했다고 말한다.

 

너 그럼...”

. 시경 도련님의 아이야.”

 

재신이 묘한 미소를 짓는다.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한 미소. 재하는 그 미소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슬쩍 제 손을 재신의 아랫배에 가져다 댄다.

 

오라버니, 나 청이 있어.”

무슨 청?”

.. 궐을 나가고 싶어.”

 

뜬금없는 재신의 말에 재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어느새 묘한 미소는 사라지고 굳은 얼굴만 남았다. 딱딱한 표정으로 재신이 다시 궐을 나가고 싶다, 한다.

 

어째서..?”

이미 내 뱃속에 정인의 아이가 있으니 난 더 이상 혼사를 치르지도 못할 텐데.. 이대로 궐에 있으면 오라버니의 위상에 흠집이 날 거야.”

그런 거 신경 쓰지마.”

오라버니는 할 일도 많고.. 혼사로 치러야 하고.. 나와 우리 아이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을 거야..”

이재신.”

 

혼잣말처럼 내뱉는 재신의 말에 재하가 낮은 목소리로 재신을 부른다.

 

난 널 내보낼 생각 없으니 그런 말 하지 마.”

오라버니..”

네게 네 아이가 소중한 만큼 나는 네가 소중해. 그러니까 네 청은 기각이야.”

하지만 여기선 내 아이는 대역죄인의 아이가 되잖아! .. 나는 그런 거 못 참아.. 우리 아이까지 그런 아픔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아..”

“........”

오라버니.. ? 그냥 나 보내줘.. 내가 누구인지, 내 뱃속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는 곳에서... 그냥.. 그냥 조용히 살게.... ?”

 

결국 재신이 눈물을 흘리고 만다. 절박한 심정으로 재하의 손을 잡은 재신은 그대로 무너져 엉엉 울고 만다. 아비 없이 살게 되는 것도 미안한데, 이렇게 외로운 구중구궐에서 대역죄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까지 달게 하고 싶지 않다.

 

재하가 한숨을 쉬며 재신의 등을 다독인다. 깨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다 또다시 혼절을 할까 걱정된다. 한참을 재신의 여린 등만 바라보던 재하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몸을 추스른 후에 다시 이야기 하자며 재신을 설득한다. 딱 이레만, 이레만 내궁에서 기거하며 몸을 추스르라며, 그 후에 어찌할지 결정하자 하고는 내궁을 나와 대비전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주상.”

, 대비마마.”

 

많이 야위었다. 재강의 승하 이후 나날이 야위어 가는 대비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재강에게서 받은 옥가락지가 그냥 빠질 정도로 가늘어진 손가락이 민망한 것인지 얼른 당의 뒤로 숨겨 버린다. 재하가 설픈 미소를 짓는다.

 

“...윤의공주가 회임을 했다 합니다.”

?! 그것이 무슨...”

방금 어의가 활맥을 짚었나이다.”

..혼사로 치루지 않은 자가께서.. .. 누구의 씨입니까..”

은규태의 차남인..”

안됩니다!”

 

, 상을 내리치며 대비가 소리친다. 재강을 승하하게 만든 장본인의 핏줄이라니. 대비가 바들 떨며 재하를 바라본다.

 

주상은.. 선왕께서 어찌 승하하셨는지 잊어버리신 겝니까..”

 

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어찌 잊겠습니까. 하루도 마음 편히 숨조차 쉴 수 없었던 형님을 어찌 잊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아는 이는.. 그 아비와 많이도 다릅니다. 참으로 올곧았고, 참으로 정 깊었고, 참으로 맑은 눈을 가졌었습니다.

 

“....대비마마께는 송구하오나.. 전 윤의공주의 청대로 공주를 궐 밖으로 보내려 합니다.”

주상.”

제가 가장 신뢰하던 이와 제가 가장 사랑하는 누이의 아이입니다. 윤의공주처럼, 저 역시 그 아이가 아무 것도 모른 채.. 행복 속에서만 살기를 바랍니다.”

“........”

송구하옵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절.. 용서치 마소서.”

 

재하가 붉어진 눈시울로 대비에게 예를 올리고는 대비 전을 나선다. 문 너머, 대비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한 사람이 만든 이 참혹한 결과가 재하가 주먹을 쥔다. 가장 참혹한 능지처참에 처했음에도 분은 풀리지 않는다. 아마 그 분노는 누군가가 만든, 재하가 죽을 때 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일지도 모른다.

 



*



 

“...건강해야 돼.”

 

이레 후, 재신은 마련 된 가마 앞에서 재하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재신을 보필 할 상궁과 나인들도 재하에게 예를 올린다.

 

연통이나 자주해.”

“.....”

가끔.. 궐로 오고..”

 

재신은 대외적으로 대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몇몇의 유생은 아녀자의 몸으로 대국에 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재하의 굳건한 태도에 결국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물론 그 굳건한 태도는, 재하가 대국에서 데려 온 자들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대비마마는..?”

충격이 크신 것 같다.”

 

재신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자신을 친 딸처럼 여긴 대비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 너무나 송구했다. 재하는 자신이 잘 말씀드리겠다며 재신을 달래준다.

 

어여 가. 배 놓치겠다.”

 

재신이 상궁들의 도움을 받아 재하에게 배를 올린다. 재하는 쑥스러운 지 코를 매만지고는 재신이 가마에 탈 수 있게 도와준다.

재신을 태운 가마가 문을 넘으려 할 때 저 멀리 상궁 하나가 재신을 부르며 달려온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재신이 창문을 열어 본다.

 

하아.. 하아.. 다행입니다.”

 

다름 아닌 대비전의 조상궁의 등장에 재신이 의아하게 바라본다. 숨을 고른 조상궁은 품에서 작은 보자기를 꺼내며 대비가 재신에게 주는 것이라 한다. 열어 본 재신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쿨쩍. .. 그 배냇저고리는 대비마마께오서 중전마마셨을 때, 직접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낡은 저고리라 미안하시다며 부디, 순산하시기를 바라신다 하셨사옵니다.”

“.......대비마마..”

자가, 대비마마를 원망치 마시옵소서...”

내가, 내가 어찌 마마를 원망하겠소. 조 상궁.. 고맙소, 정말 고맙소..”

 

조상궁이 재신에게 예를 올리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다시 가마가 움직인다. 재신은 대비가 전해 준 배냇저고리를 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꼬박 하루가 걸려 대국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내리니 앞으로 재신을 모실 이들이 마중 나와 있다. 대국인임에도 유창한 조선말에 재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런 반응이 웃긴 것인지 재신 또래의 여인이 쿡쿡 웃으며 어릴 적부터 조선말을 배웠다 설명해 주고는 재신의 짐을 받아든다.

 

피곤하시지요? 얼른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 댁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니,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화영의 말에 재신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선물은 재하나 대비가 보냈을 지도 모르겠지만 손님이라니? 재신이 화영에게 무엇이냐 물었지만 화영은 웃기만 한 채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궁금한 채로 화영과 가신들과 함께 집에 도착한 재신은 먼저 들어가라는 그들의 말에 따라 제일 앞에 섰다. 양 옆에서 문을 열어주고 조심스레 집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이는 이가 있었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매일 밤 꿈에서나 만났던,

죽을 때 까지 연모하리라 마음먹었던,

제 뱃속의 아이가 아비라 부를... 이가 서 있었다.

 

 

자가.”

 

 

 

 

 

 

 

칼과 꽃. --

 

 

 

  • W 2020.01.16 23:32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3/23 09:23:49)
  • tory_2 2020.01.1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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