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5149133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3월 15일 인천에 있는 경기도립병원 응급실 앞. 열차에 치여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친 14세 소년 김주완이 피투성이로 널브러져 있었다. 소년에겐 돈이 없었고, 병원엔 수혈할 혈액이 없었다. 그 곁을 지나던 덴마크 남자가 이를 보고 수술비 보증을 서며 자기 피를 뽑아 수혈까지 해줬다. 이 남자는 덴마크가 파견한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의 간호사였다. 응급 수술로 목숨을 살린 그는 소년을 병원선으로 데려와 6개월 동안 두 차례 수술을 더 해준 뒤 무사히 퇴원시켰다.
인천항에 정박한 유틀란디아호에선 187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356병상을 갖추고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덴마크가 대서양을 오가던 상선을 개조해 급파한 민간 의료지원선이었다. 이 배에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999일 동안 치료한 환자는 부상병 5000명, 민간인 6000여 명이었다. 유엔에 보고하지 않고 몰래 치료한 민간인은 1만8000명에 이르렀다.
의약품 조달 등을 위해 세 차례 본국을 왕복하면서 인술을 베푼 의료진은 연인원 630여 명. 지원자가 몰려 100 대 1의 경쟁을 거친 실력자들이었다. 모두가 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떠올리며 극동의 약소국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안데르센과 인어공주의 나라에서 온 이들은 바다 위의 종합병원 유틀란디아호에서 김주완 소년을 비롯해 수많은 생명을 구하며 전쟁 속의 동화를 새로 썼다.
미국은 해군 병원선을 세 척이나 띄웠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 등 주요 전장에서 맹활약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첨단 수술실을 운영한 곳도 미군 병원선이었다. 전설적인 간호장교 릴리언 킨켈라 케일 대위는 부상자를 헬기로 후송하는 항공구호 비행을 175차례나 수행해 ‘공중의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차 세계대전에 이어 재입대한 케일은 군 복무 중 1만 명이 넘는 부상자를 치료한 공으로 19개의 훈장을 받은 최다 수훈 여군이 됐다.
스웨덴과 인도는 중립국인데도 의료진을 보냈다. 167명으로 구성된 스웨덴 의료진은 1950년 9월 14일 부산항에 도착해 옛 부산상고(현 서면 롯데호텔)에 400병상 규모의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을 차렸다. 정전협정 후에는 ‘부산스웨덴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료 진료를 했다. 이들은 1957년 4월까지 6년6개월간 진료하며 의료지원부대 중 가장 오래 머물다가 돌아갔다.
인도는 2차 세계대전 경험이 있는 60야전병원을 보냈다. 외과의사 4명, 마취의사 2명, 일반 의사 8명 등 341명은 1950년 11월 20일 부산에 도착한 날부터 진료에 나섰다. 1952년 9월에는 중공군 포탄이 떨어져 의료진 1명이 죽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후송을 거부하고 응급조치만 받은 뒤 아군 부상병 치료에 전념했다.
이탈리아는 당시 유엔 비회원국임에도 의료지원단을 급파했다. 서울 영등포구 우신초등학교에 68적십자병원을 열고 진료를 시작했다. 입원환자 7041명과 외래환자 22만9885명이 이곳에서 치료받았다. 노르웨이는 경기 동두천에 이동외과병원을 열고 1만5000명의 병을 고쳤다. 당시 분단국이었던 서독도 의료진을 보내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들의 헌신은 한국 현대의학 발전의 디딤돌이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수혈, 무균수술, 감염 관리, 마취 기술 등 응급의료체계의 뼈대를 확립했고, 내과 분야에서도 감염병 진단 및 격리 치료, 항생제 사용법 등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현대적인 환자 이송 시스템과 간호 교육 도입, 표준 간호 기록, 의무행정 병원 기록 관리 등의 노하우도 축적했다. 한마디로 한국 의학계의 근대화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것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5149133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3월 15일 인천에 있는 경기도립병원 응급실 앞. 열차에 치여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친 14세 소년 김주완이 피투성이로 널브러져 있었다. 소년에겐 돈이 없었고, 병원엔 수혈할 혈액이 없었다. 그 곁을 지나던 덴마크 남자가 이를 보고 수술비 보증을 서며 자기 피를 뽑아 수혈까지 해줬다. 이 남자는 덴마크가 파견한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의 간호사였다. 응급 수술로 목숨을 살린 그는 소년을 병원선으로 데려와 6개월 동안 두 차례 수술을 더 해준 뒤 무사히 퇴원시켰다.
인천항에 정박한 유틀란디아호에선 187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356병상을 갖추고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덴마크가 대서양을 오가던 상선을 개조해 급파한 민간 의료지원선이었다. 이 배에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999일 동안 치료한 환자는 부상병 5000명, 민간인 6000여 명이었다. 유엔에 보고하지 않고 몰래 치료한 민간인은 1만8000명에 이르렀다.
의약품 조달 등을 위해 세 차례 본국을 왕복하면서 인술을 베푼 의료진은 연인원 630여 명. 지원자가 몰려 100 대 1의 경쟁을 거친 실력자들이었다. 모두가 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떠올리며 극동의 약소국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안데르센과 인어공주의 나라에서 온 이들은 바다 위의 종합병원 유틀란디아호에서 김주완 소년을 비롯해 수많은 생명을 구하며 전쟁 속의 동화를 새로 썼다.
미국은 해군 병원선을 세 척이나 띄웠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 등 주요 전장에서 맹활약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첨단 수술실을 운영한 곳도 미군 병원선이었다. 전설적인 간호장교 릴리언 킨켈라 케일 대위는 부상자를 헬기로 후송하는 항공구호 비행을 175차례나 수행해 ‘공중의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차 세계대전에 이어 재입대한 케일은 군 복무 중 1만 명이 넘는 부상자를 치료한 공으로 19개의 훈장을 받은 최다 수훈 여군이 됐다.
스웨덴과 인도는 중립국인데도 의료진을 보냈다. 167명으로 구성된 스웨덴 의료진은 1950년 9월 14일 부산항에 도착해 옛 부산상고(현 서면 롯데호텔)에 400병상 규모의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을 차렸다. 정전협정 후에는 ‘부산스웨덴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료 진료를 했다. 이들은 1957년 4월까지 6년6개월간 진료하며 의료지원부대 중 가장 오래 머물다가 돌아갔다.
인도는 2차 세계대전 경험이 있는 60야전병원을 보냈다. 외과의사 4명, 마취의사 2명, 일반 의사 8명 등 341명은 1950년 11월 20일 부산에 도착한 날부터 진료에 나섰다. 1952년 9월에는 중공군 포탄이 떨어져 의료진 1명이 죽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후송을 거부하고 응급조치만 받은 뒤 아군 부상병 치료에 전념했다.
이탈리아는 당시 유엔 비회원국임에도 의료지원단을 급파했다. 서울 영등포구 우신초등학교에 68적십자병원을 열고 진료를 시작했다. 입원환자 7041명과 외래환자 22만9885명이 이곳에서 치료받았다. 노르웨이는 경기 동두천에 이동외과병원을 열고 1만5000명의 병을 고쳤다. 당시 분단국이었던 서독도 의료진을 보내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들의 헌신은 한국 현대의학 발전의 디딤돌이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수혈, 무균수술, 감염 관리, 마취 기술 등 응급의료체계의 뼈대를 확립했고, 내과 분야에서도 감염병 진단 및 격리 치료, 항생제 사용법 등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현대적인 환자 이송 시스템과 간호 교육 도입, 표준 간호 기록, 의무행정 병원 기록 관리 등의 노하우도 축적했다. 한마디로 한국 의학계의 근대화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것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5149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