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해외거주

휴가를 내고 산에 다녀왔다.

불과 몇 년 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정말 피같은 휴가를 내서 나는 산에 올라갔다.

아주, 조금은 어른들이 왜 산에 가는지 이해했다.

30여년밖에 살지 않은 나도 이렇게 세상에 지치고 사람이 지겨운데, 어른들은 어떨까.

그래서 이렇게까지 적막한 곳을 찾아가나.



아주.. 아름답고 고요하고.. 그리고 더럽게 힘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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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도립공원으로 향하는 길.

굽이 치는 낙동강을 끼고 달리면서, 아, 나 이런거 좋아하네. 깨달았다.

바다가 아닌 호수를, 해변이 아닌 강변을 좋아하는 건가, 생각하면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곳으로 더욱 더 깊숙하게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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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코스는 입석-청량산-하늘다리-장인봉의 원점 회귀 코스.

입석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겹겹이 옷을 껴입고, 엄마의 등산 양말과 장갑, 스틱을 챙겼다.

차부터 시작해서 이번 여행에서도 역시 엄마에게 빌린 게 많다. 엄마 없인 살 수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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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정작 사진 찍을 땐 몰랐는데 이런 글귀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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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장엄한 산세가 나를 맞아줬다.

수북히 쌓인 낙엽들, 장대하게 뻗은 나무들, 기이할 정도로 낯선 고요함..

5분도 안돼서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섣불렀다.


산에 오르기로 결심하고 바란 것은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었다.

음.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산에 오르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속세에 두고온 직장인으로서의 삶, 

우리 엄마의 딸로서의 삶, 

그냥 내 자신으로서의 삶,

앞으로 살 날이 (아마도) 많이 남은 30대 여성으로서의 삶.. 

뭐 이런 것들을 한데 짬뽕시켜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 생각을 안 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

바로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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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에 가기까지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20분 정도 산세를 즐기면서, 등산을 하는 나 자신에 한껏 뿌듯함을 느끼면서 가다보니 청량산에 폭 안겨있는 절에 닿았다.

듣던대로, 아니 인터넷으로 보던대로 아주 아름다웠다.

딱 한 달 전에 왔더라면 정말 더 좋았겠다. 그때는 단풍이 아주 절정이었을텐데, 

다음 번은 단풍 산행을 기약하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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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진정한 산행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양가감정이 들었다.

오르고 싶지만 더럽게 힘들고, 힘들지만 그래도 올라는 가야겠고.

어떤 이상한 인간들이 산에다 그런 걸(하늘다리) 만들어서 기어코 올라가게 만들지.

근데 너무 예쁘긴하던데.

그런 이상한 양가감정..

쉬엄쉬엄 오르긴 했지만 아주.. 매우 힘들었다.

설상가상 스틱 하나가 똑 분리되어 버렸다.

이리저리 끼워보려고 애를 썼지만 시간만 버리고 실패했다.

결국 다리 하나를 잃고 오르는 수밖에. 분리된 스틱은 가방에 집어넣어버렸다.

청량사에서 이미 겉옷 두개도 벗어서 가방에 집어 넣은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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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 가다 뒤를 돌아보니 청량사는 저만치 멀어져 자취를 감췄고

위를 올려보면 까마득한 계단과 난간이 보였다.

어디쯤인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그냥 산길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이다.

위와 아래를 두어번쯤 번갈아 보다가, 알아서 무엇하겠느냐..라는 생각에

곧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 찾기도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산을 올라갈 때면 그 적막이 좋다가도 금세 외로워졌다.

그러면 에어팟을 끼고 음악을 들었는데 아주 힘에 부치는 어느 순간엔 그게 그냥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에어팟을 빼고 적막 속에서 잡념에 빠진다.

그때는 오직 내 숨소리와 저 밑에서부터 역동적으로 피를 뿜어대는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게 살아있는 사람이 내는 소리구나.

이렇게 갑자기 운동하기 있냐.. 준비는 해야되는거 아니냐.. 라고 저항하듯 몸이 말을 걸어온다.

그러면 또 그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곧 지쳐서 멈춰서고 만다.

그렇게 온갖 이상한 생각들을 하다가,

어디인지 모를 곳에서 온 (아마 업무 관련) 전화를 '감히 휴가날 나를 방해해..?' 하고 내적 분노를 하면서 두어 번 씹어주고,

오르고 쉬고 다시 오르고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더이상 위가 보이지 않는 구간에 다다랐다.

그래, 이 정도 왔으면 이제 나올 때가 됐지, 하고 (내 마음 속의) 목적지에 오르는 순간

힝~ 속았지? 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정표.

하늘다리(0.5km)

음..이때였나..욕을 했던게.

500미터라니. 이 산길에 500미터라니..

방도는 없으니 그냥 속으로 욕 하면서 올라갔다.

그래도 어느 정도 다 왔다.. 다 와 간다.. 일단 하늘다리까지는 가는데 장인봉은..어떡하지? 하면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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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늘다리에 도착했다.

오르기 직전까지 어마어마한 경사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되다가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 이런데다가 이걸 놓을 생각을 했을까..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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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세상이었다.

불과 800미터 정도 올라왔는데, 땅에 내려놓고 온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주에서 푸른 별 지구를 보면 저 작은 곳에서 뭘 그렇게 복닥거리며 사나,, 싶은 그런 종류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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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서, 나도 모르게 장인봉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코 앞(은 아니었지만)에 있는 봉우리를 안 가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래서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구나.

다시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고 도착한 봉우리엔 별 거 없었다.

장인봉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있었고 그 뒤엔 주세붕 선생의 글이 있었다.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햇빛은 머리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다시 황학을 타고 신선세계로 가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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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에 올라서는 야호라고 소리 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디선가 산에서 내는 야호~와 같은 종류의 소리가 동물들에게는 아주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생태계 교란(?)까지는 아니어도 그들의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런 마음 반, 조금 창피하고 부끄러운 맘 반, 이 합쳐져 결국 나는 입을 다문 채로 봉우리를 내려왔다.

아주 조금은, 조금은 아쉬웠다.

야호!! 혹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 꺼져라!!! 크게 외치고 왔으면 조금 더 후련했을까?

그냥 그때는 내려가기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내려왔던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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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대라는 전망대로 가는 길이었나, 장인봉으로 가는 길이었나,

딱따구리도 봤다. 엄마한테 말했더니 산에 다니면 자주 본다고 했다. 별거 아니었다 보다..



내려오는 길엔 정말 다리가 후들거려서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었다. 지금도 아닌 것 같다.

쉽게 내려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만큼 경사가 있어서인지 올라가는 것만큼 힘들었다.

올라갈 때 쉬어가던 내리막길이 내려갈 때는 오르막길이 되어 있었다.

인생은 어쩌면 (좋게 말해) 이런 산길인 것 같기도. (나쁘게 말하면.. 심한욕 심한욕)

후기인지 일기인지 모를 글을 적으면서 그때 뒤죽박죽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상기시켜봤다.

전에도 여러번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번에 등산을 하면서도 참 나는 경험이 일천하구나. 경험이 부족하구나.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그런 생각들을 또 다시 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산을 올라본 것도 인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니, 산은 내게 한참 알아가야 할 것이 많은 미지의 공간이다.

삶은 늘 경험할 것들 투성이다. 내 세계는 너무 좁다. 

뭐 어떤 것들을 해봐야 나는 뭔가 경험해봤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제쯤 나는 뭔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무튼.. 그렇게 쉬었다 서다를 반복하며 겨우 올라가서 겨우 내려온 3시간 반의 산행이 끝났다.

아침밥도 제대로 안 먹고 와서 얼른 산 타고 내려가서 산채비빔밥 먹고 가야지~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밥은 무슨 물만 한 통 마시고 내려왔다.

하늘다리에서는 라면이 정말 먹고 싶었으나.. 그래도 이상하게 별로 배고프지도 않고, 그렇지만 힘들고, 그래도 좋았던 여행이었다.


결론은 차가 갖고 싶다.. 어디라도 갈텐데..ㅎㅎ....이게 무슨 개똥같은 결말이지.

정말 도움될 것 하나 없는 후기이지만 그때 머금었던 생각들은 쓰지 않으면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릴테니까 기록한다.



  • tory_1 2020.11.26 04:03
    난 딱 저 사찰까지만 올라갔었는데도 좋더라
    봉화 자체가 참 좋았어!
  • W 2020.11.26 22:30

    봉화라는 지역 자체가 처음이었는데 낙동강 길만 끼고 달려도 넘 좋더라구ㅠㅜ..

  • tory_2 2020.11.26 11:10

    우와 뭐야 산 싫어하는데 풍경이 너무 예뻐서 올라가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다! 너무 예뻐

  • W 2020.11.26 22:29

    나도 산 제대로 가본 적이 없는데 정말 예쁘고 좋더라. 추천!

  • tory_3 2020.11.26 11:24
    청량산 좋아
    절까지만 가도 괜찮고 다리 생기고서는 정상찍는 사람이 더 많아졌음
    예전 아빠 어디가에서 송종국이 지아를 안고 산행해서 깜짝 놀랐던 거 생각나네
  • W 2020.11.26 22:28

    아 그 산이 이 산이야??? 몰랐어 내적친밀감 상승.. 다리가 생긴지 얼마 안됐나보구나

  • tory_3 2020.11.27 10:30
    @W 다리가 생긴지는 이제 10년 넘었는데 나는 그 전부터 다녀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다리라서 화제가 되니까 청량산 정상 산행이 늘었거든
    그러다가 아빠어디가 때문에 등산객 아니어도 많이가고
  • W 2020.11.27 16:04
    @3

    오우 그렇구나.. 전혀 몰랐네

  • tory_4 2020.11.26 12:17
    톨 글 잘쓰네. 추천.
  • tory_5 2020.11.26 12:49

    톨 글 잘 읽었어!! 나도 산에 가고 싶은데 (힘들거 알아서 포기)ㅋㅋㅋ ㅜㅜㅜ

  • tory_6 2020.11.26 19:10
    글 넘 잘 읽었어 청량사 내 최애사찰
    운동화 신고 엄빠랑 하늘다리까지 올라갔던 기억난다
  • tory_7 2020.11.26 19:24
    진짜 좋더라!
    청량사부터 하늘다리까지....... 헉헉 거리면서 갔디만 진짜 풍경이랑 완전 ㅜㅜ
  • tory_8 2020.11.26 20:36
    사진도 글도 너무 좋다
  • W 2020.11.27 16:05

    도움 1도 안될텐데 읽어준 토리들 고마워~ 다들 시간 될 때 가보길 추천드림!

  • tory_10 2020.11.27 18:07
    사진 넘 좋다 언젠가 꼭 가보리...
  • tory_11 2020.11.29 20:26
    글좋다.. 나도 가야지
  • tory_12 2022.05.14 17:33
    꼭 가보고싶다..멋진 사진 고마워!
  • tory_13 2022.06.24 08:14
    와 풍경 좋다 글도 에세이 읽는것 같아 잘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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