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박훈정의 악마를 보았다나 브이아이피 같은 영화는 내 생애 최악의 영화 리스트에 있는 관계로 박훈정 영화는 보고싶지 않았음. 그래서 안보려고 안보려고 버티다가 대체 박훈정같이 여자를 같은 인간으로 보기 힘들어하는 감독이 여자를 주인공으로 쓰면 어떤 같잖은게 나올까 너무 궁금해서 봐버림. 그런데 진짜 대단한게 나오긴 나왔어. 오히려 박훈정이 여자를 해석하기 어려워하는게 이점으로 작용한 것 같았음.
다른 감독들처럼 여자를 이해한답시고 여성의 모습을 획일화하거나 억지로 남성과는 '다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대상화하는, 흔하디 흔한 영화판 위선과는 다른 부분이긴 한 것 같은게, 여자를 인간으로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바람에 진짜 '인간 같지 않은' 여자를 너무 잘 표현해버린거임. 바꿔말하자면 인간 여자에게 기대되는 일반적인 가치들이 놀라울 정도로 단 하나도 없는 여성파이터가 탄생한거. 극심한 여혐종자가 이런 여주를 만들어낸 아이러니함이라니.
2.
예를들어 옛날부터 최근까지 강한 파워의 여성 캐릭터는 많았지만 그 가치를 차치하고 어느 한 부분은 반드시 '여자' 였단 말이야. 여성스러운 모습을 부각시키는 코스튬은 가장 흔하고, 싸우는 방식이나 방법, 모습이 '섹시'하다던지, 싸우는 목적이나 원인이 '사랑', 혹은 '모성애', 혹은 '보석' 같이 흔히 여성의 담당으로 여겨지는 영역이라던지, 다른 '남성'동료들에 비교되는 다른 점이 대상화된다던지, 하다하다 못해 남성과의 연애나 대상화를 통해 여성이라는 점이 상기되기라도 한단 말이야. 그런데 마녀는 놀라울 정도로 그런 부분이 적음.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게 아니라면, 아예 없어.
여주는 섹시하지도 않고 세계관 내 다른 능력자들과 딱히 여자의 영역으로 구별되지도 않으며, 감성팔이나 사랑 같은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음. 여고생이랍시고 교복 코스튬으로 칼질하는 방식으로 싸우지도 않아. 그냥 존나 꽝꽝 패고 다녀. 여자라서 힘이 약해 대신 스피드로 싸우는~블라블라 같은 설정도 없어. 그냥 존나 세. 그리고 그 세계관 내 그 누구도 여주에게 '여자면서 잘 싸우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짱 센데' 같은 말을 하지 않아. 아예 머릿속에 세계관 최강자가 '여자'라는 인식 자체가 없어. 그 자리에 여고생이 아니라 남고생을 그대로 넣었어도 모든 대사와 상황, 장면이 똑같이 진행될 수 있음. 어떻게보면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젠더리스 무비.
3.
바꿔말하면 그것이 박훈정이 여성을 가장 극도로 '같은 인간으로서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여혐 상황에서 운좋게 스토리가 맞아 만들어낸 캐릭터 일 수도 있음. 그렇다하더라도 어쨌든 이 영화가 탄생시킨 여주의 가치는 높음. 왜냐하면 한국은 물론 세계로 풀을 넓혀봐도 이 정도로 주인공이 여자임을 잊은 채로, 혹은 의식하지 않은 채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드물거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액션 판타지장르물이라는 점에서 확실히 젠더리스한 감수성은 큰 가치가 있지. 여자도 별로 불쾌하지 않고 볼 수 있는 오락영화라는게 사실 너무나 찾기 힘든거니까. 박훈정의 과거와 지금을 잊지 않은 채로 미래를 지켜보고 싶어지긴 했음.
물론 단점은 있어. 한국영화판 남감독 아니랄까봐 또또 악역은 죄다 양아치 말투, 성격인 것도 짜증이고, 양아치 남캐는 못잃겠는지 우겨넣은 박희순한테 시간을 지나치게 할애하는 것도 이상함. 솔직히 여기서 박희순이 빠지거나 캐릭터가 바껴서, 조민수의 미치광이 과학자 느낌을 보다 더 잘살리면서 분량도 같이 줄여버리는게 길이었는데... 그놈의 카리스마 양아치 남자 캐 못잃어서 조민수랑 자주 붙는 씬에 박희순 카리스마 살려주려고 끙끙대는 바람에 조민수나 박희순이나 둘 다 캐 어정쩡해져버림. 영화 안에서의 박희순 캐릭터 역할과 스토리 상 말해야하는 부분, 위치를 따져봐도 조민수랑 둘이서 그렇게 카리스마 대결하고 앉아있어야하는 이유가 단 1도 없어. 오히려 그 히스토리를 가졌으면 그렇게 양아치면 안돼. 한국 영화판 남감독들의 카리스마 양아치 중독증은 마초이즘적인 사회에서 자란 일종의 도착증이라고 봄. 그러나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가진 힘은 확실히 있어. 만화같은 상황을 영화적으로 왠만큼 잘 풀었어.
4.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여자애가 사랑스러운 미소+교복 or 짧은 스커트 차림으로 러브빔 같은거 날리면서 미소녀 전사로 싸우는게 아니라, 그냥 추리닝 입고 남자들 쾅쾅 때리고 다니는게 당연한 세계관을 보고싶으면 꼭 봐. 최약자가 한 순간에 최강자가 되는, 그 여성 주인공만이 가능한 카타르시스가 분명히 있어. 확실히 이런 설정은 찾기 힘들거임. 손익분기 잘 넘어서 2탄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별은 만점드림.
토리야 박희순 오타난 것 같아! 박휘순은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