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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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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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브로드웨이 신작이야!




이 뮤지컬은 20세기 초 미국의 여성참정권에 관한 얘기인데, 사실 이렇게 먼 시대와 내 조상도 아닌 사람들이 투쟁한 이야기가 현대 한국인인 나에게 공감을 얻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잖아.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뮤지컬은 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너무나 감격할만큼의 무언가를 보여줬어.


별로 슬픈 이야기는 없어. 적절한 유머도 곁들여져있고.

음악이 대체로 이지 리스닝으로 잘 빠진 것 외엔, 무대 미술이 엄청나거나 라이팅 디자인이 휘황찬란한 것도 아니야.

드라마가 엄청 탄탄한가 하면 그것도 좀 애매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해.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을만큼 매 씬의 하나하나가 내가 여성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하도록, 엄청 뽕차오르게 하더라고...


사실 20세기 초라는게 옛날이야기잖아...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의 미국 여성운동... 솔직히 별로 아는게 없었어.

나는 미국에서 자라긴 했고 AP US History / AP US Politics 고등학교때 다 수강했지만, 솔직히 간신히 낙제만 면하는 수준이었고 저 클래스들에서 이 주제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지도 않았어. 영국의 서프레제트에 대한 영화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김혜리 기자의 평론을 읽은 적은 있지만 그 영화도 실제로 보진 않았고, 내가 영국의 여성운동에 대해 알고있는 거라면 버지니아 울프 책을 몇 권 읽은 정도가 다란 말이야.

그래서 이 뮤지컬이 새로 올라왔을 때도 존재를 모르고 있었는데, 등록해둔 뉴욕 여성 모임에서 함께 보러가잔 이벤트가 떠있더라고.

아쉽게도 그 날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참여하지 못했지만 뭔가 여성에 관련된 뮤지컬이겠구나 싶어서 아무생각없이 티켓을 구매했고...


그리고 펑펑 울면서 나왔어. 다들 휘파람 불고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고 박수를 치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뺨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음.

슬퍼서? 아니... 오히려 기뻐서 눈물이 났다는게 맞는 것 같아. 어릴 땐 벅차오르는 기쁨에 눈물이 난다는게 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더라.

다섯 명의 여자들이 어떻게 여성참정권 운동을 하고 서로 다른 계파를 설득하고 인종을 넘어 하나의 목표를 위해 행진해왔는가의 이야기가 눈물나게 했음.

현실의 벽에 부딪혀 떠나려다가도 결국은 마음을 돌려 전국을 누비며 여성참정권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다가 결국 젊은 나이에 죽어버리는 여성도 있고, 전시에 사회를 어지럽힌다며 감옥에 갇혀서도 포기하지 않고 단식투쟁을 하고, 대통령 보좌관과 대통령 앞에서도 여성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을 당하는가에 대해 일장연설을 몇년에 걸쳐 하면서 끝내 설득시키기도 하고...


이야기의 초반에 앨리스 폴은 젊었고, 의욕에 가득차서 사람들을 모았고, 그리고 19세기 여성운동을 주도하던 여자들이 꼰대처럼 너희는 너무 급진적이라며 하나하나 해나가야 한다는 잔소리를 하는 걸 듣다가, 이야기의 후반부로 가자 모두가 각자의 삶을 향해 떠나고 이 운동의 주축이 된 앨리스 폴에게 찾아온 신세대 여자 대학생이 인터뷰를 하러 와서 그들을 꼰대취급하며 여성운동은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기엔 해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하고 소리치는 걸 보면서 이게 끝나지 않는, 우리의 현재진행형인 여성 인권을 위한 투쟁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것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더라고... 이렇게 수미상관을 맞추며 우리는 계속해서 행진해야한다(Keep Marching)는 노래를 부르며 끝나는데 정말 많이 행복했고, 벅차올랐고,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


20세기 초의 옛날 이야기니까 어느정도는 남자가 허락해준 페미니즘 같은 내용의 빻은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각오했었는데, 전혀!!!!! 단 한번도!!!! 그런 장면 없이 충분한 갈등과 투쟁을 그려냈고, 21세기인 2024년에 어느 모로 봐도 2시간 30분간 여성인게 자랑스럽기만 할 수 있는 완벽한 내용이었어. 다소 느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서사구조도 거의 거슬리지 않았고 모든 씬이 공들여서 잘 만들어졌더라. 여러인종의 여성들과 장애인 여성배우들까지도 캐스팅해서 내가 겪지 못한, 나와 관련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던 이야기를 전세계의 모든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현대의 페미니즘으로 완벽히 탈바꿈해놨어.


아, 그리고 이 뮤지컬은 모든 남성역을 여자 배우들이 해!! 그것까지 너무 좋았어!! 남자답게 거드름피우고 말도 안되는 개소리하고 거짓말 해대고 공수표 날리고 이러는 것도 진짜 남자인 배우가 했으면 너무 재수없었을거 같은데 여자분들이 하니까 풍자로 느껴지고 웃기더라고.


1막만 봐도 너무 좋아서 수비니어 프로그램 북 사려고 인터미션에 달려나갔는데 새로 올라온 뮤지컬이라 아직 없다고 했어 ㅠㅠ

앞으로 두세번은 더 볼 생각이니 프로그램북 나오면 바로 사야지 ㅠㅠㅠ



덧붙임.

나는 처음에 서프스(Suffs)가 서프레제트(Suffragette)의 줄임말인가? 했는데 뮤지컬 도중에 작가 역할을 하는 배우가 대사로 이 단어들에 대해 설명해주더라고. 서프레지스트(Suffragist)가 자신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고 서프레제트는 남자들이 여성운동을 과소평가하기 위해 작고 귀여운(diminutive) 멸칭으로 ette를 붙여서 만든 단어래. 영국인들은 서프레제트란 단어도 포용하고 함께 쓰기로 했지만 미국여성들은 이 단어를 거부하고 서프레지스트/서프스라고 스스로를 부르기로 했다나봐.


덧붙임 2.

앨리스 폴 역할을 맡아 주연배우로 열연한 샤이나 타웁이 북도 쓰고 음악도 모두 작곡했대. 엄청난 재능인거 같아!

  • tory_1 2024.04.16 10:20
    보고싶다! 유튜브에서 클립 있나 봐봐야지
    그리고 원톨 덕분에 어원도 잘 알게 되서 고마워! 이제부터는 서프레지스트라고 불러야지!
  • W 2024.04.16 10:49
    공연클립이 브로드웨이 올라오기 전 소규모 공연장 꺼밖에 없더라구 ㅠㅠ 얼른 더 많이많이 흥하고 티져도 때깔좋게 뽑아줬음 좋겠다 ㅠㅠㅠ 공연클립도 브로드웨이 버전으로 두세개 풀어주고... 프로그램북도 팔고 ㅠㅠㅠㅠ
  • tory_3 2024.04.16 11:04

    아직 우리나라에서 안하는거지? 우리나라에서도 하면 좋겠네. 토리 글 너무 잘써서 보고 싶다 

  • W 2024.04.16 11:17
    글 잘쓴다고 해줘서 고마워 ㅋㅋ 맞아 한국에도 가져갔으면 좋겠어 ㅜㅠ 처음엔 나 미국역사랑 정치 알못이라 (늘 낙제를 면치못했을 정도고 헌법 수정헌법 국가 구조 이런거 거의 기억도 못함 ㅠㅠㅠ) 아 너무 자세한 내용 나오는거 아니겠지 어려울거 같은데 하면서 봤다가 응 그런거 다 필요없고 당신이 여자기만 한다면 그냥 보고 뽕에 한가득 찰 수 있어~~ 이런 느낌이라 넘 좋았어 ㅠㅠㅠㅠ 처음엔 나도 좀 삐딱하게 우리나란 일제강점기에 전국민이 박해받던 시절인데 배가 부른거 아니냐 같은 기분으로 보기 시작하다가 나중엔 엉엉 울면서 여자는 위대하다!! 여자는 대단하다ㅜㅜㅜㅜ 이러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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