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피겨선수 최다빈입니다. : )
먼저 ‘네이버 스포츠스토리텔러’라는 블로그 공간을 통해 여러분과 소통하며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게 돼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그동안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던 저의 진짜 이야기, '리얼 최다빈 스토리'를 들려드릴 예정인데요. 오늘은 지난 2022년 2월에 열린 제103회 전국동계체전 기간 중 있었던 저의 은퇴 선언과 번복에 관한 속사정에 관해 이야기해드릴 테니, 재밌게 읽어주세요. : )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난 이후, 저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올림픽 직후부터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스케이트 부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피겨를 시작한 이후부터 '에스피테리 부츠'의 한 모델만을 신고 뛰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한해 전인 2017년 5월 이후, 에스피테리사에 주문해 받은 부츠들은 이전에 제가 신던 것과는 다른 부츠들이었습니다.
피겨 선수들에게 스케이트 부츠는 경기를 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장비입니다. 따라서 선수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무척 큰데요. 저처럼 부츠가 바뀌면 점프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발목 부상 등 여러 부상에 시달리는 선수들도 있습니다. 심할 땐 선수들이 점프 자체를 무서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스케이트 부츠 하나가 선수들의 경기력과 컨디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때문에 올림픽을 앞두고 발에 맞는 부츠를 구할 수 없었던 저는 과거 제가 신던 부츠들을 모아둔 신발장에서 신을 수 있는 것들을 한 짝씩 골랐습니다. 2년 전에 신었던 왼쪽 부츠, 1년전에 신었던 오른쪽 부츠로 짝을 맞춰 신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짝짝이 부츠'를 신어야 했고, 평창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는 다시 아시안게임 때 신었던 부츠를 신고 나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나고 오른쪽 부츠가 무너지면서 발목 지지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가 됐습니다. 점프를 많이 하면, 부츠의 발목 부분이 힘도 약해지고 주름도 잡히게 되는데요. 이 상태에서 점프를 하게 되면 뛸 때 힘을 잘 못 받고, 충격 흡수가 안 되니까 발목이 아프고, 자칫 부상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럴 땐 부츠를 교체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저에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늘 해왔던 대로 테이프로 부츠를 칭칭 감으며 2018년 3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17/18 시즌 국제빙상연맹(ISU) 세계피겨선수권대회’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츠의 발목을 잡아주는 힘이 많이 떨어진 탓에 점프력이 이전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회전수 역시 부족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출전한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첫날 쇼트프로그램에서 저는 전체 출전 선수 37명 중 21위를 기록해 24명만이 오를 수 있는 프리스케이팅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경기를 앞두고 진행된 공식훈련 중 부츠로 인해 발목에 무리가 생겼고, 결국 저는 프리스케이팅 출전을 포기하고 기권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2018년 시즌은 기권으로 끝이 났습니다.
2018/19 시즌에도 부츠 문제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경기를 기권해야 하는 일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아니, 2018/2019 시즌의 모든 경기들이 다 이런 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저는 매 대회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제 의지가 아닌 부츠 문제로 경기를 하나씩 기권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기권을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저는 올림픽 다음 시즌을 통째로 쉰, '시즌 오프'를 한 선수가 돼버렸습니다. (많은 분들은 제가 평창동계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라는 큰 무대를 치른 이후 휴식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정반대였습니다.)
선수로서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선수로서 더 잘하고 싶었고, 더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다른 것도 아닌 부츠 때문에 경기에도 못 나가고, 기권을 거듭해 결국 시즌 오프가 돼버린 현실이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2019/2020 시즌을 앞두고 제 마음 속에는 오기와 승부욕이 일렁거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과거에 신었던 부츠들을 모아둔 신발장을 열었습니다. 수십 켤레의 부츠들을 뒤지며 신을 만한 부츠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1, 2학년 시절 신었던 부츠들 중에서 그나마 무너지지 않은, 아직 쓸만한 것들이 몇개 눈에 들어왔습니다.
꺼내 신어봤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신었던 부츠이다 보니, 현재 제 발 사이즈보다 반 사이즈 정도 작았습니다. 발가락을 구부려 억지로 부츠에 발을 집어넣어 봤습니다. 조금 아프고 불편하긴 했지만, 발가락을 구부리면 부츠를 신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게 신발에 발을 맞춘 저는 부츠에 새로운 스케이트날을 달고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발가락이 구부러져 있는 상태로 점프를 뛰다보니 발톱이 멍들고, 뿌리부터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발톱은 빠지고, 발가락은 늘 퉁퉁 부어있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이렇게라도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만도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2020년과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든 대회들이 연이어 취소돼 경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조용히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피겨선수로서 제가 출전해보지 못했던 유일한 대회,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끝으로 은퇴하겠다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2021년 12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막할 예정이었던 ‘2021 루체른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저의 마지막 무대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출국을 2주 앞둔 11월 30일, 대회 조직위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이유로 돌연 대회를 취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참 많이 속상하고 아쉬웠습니다. 당시 제 나이와 기량으로는 다음 유니버시아드 대회 출전권을 또 한번 확보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커다란 상실감이 밀려왔습니다. ‘나는 유니버시아드 대회와는 인연이 없나보다’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선수생활을 마칠지 아니면 다가올 ‘제103회 전국동계체육대회’을 저의 마지막 무대로 삼을지 좀 더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도 동계체전을 저의 마지막 무대로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덕분에 E채널의 ‘노는 언니2’에서는 저의 미니 은퇴식 장면이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2022년 2월에 열릴 동계체전을 저의 마지막 은퇴 무대라고 생각하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제 마음 속에는 이미 답을 정해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스케이트를 계속 더 타고 싶다는 답이...
2022년 2월 25일, 제103회 동계체전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 경기 하루 전, 당시 저의 소속사는 “최다빈 선수가 이번 동계체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열린 쇼트프로그램 경기에서 저는 확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니버시아드 출전권을 또 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또 기량이 올라올지 안 올라올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저는 여전히 스케이트를 좋아하고, 앞으로도 더 타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결과에 관계없이 유니버시아드 대회라는 목표에 계속 도전하고 싶어 하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쇼트 경기가 끝난 후, 소속사측에 제가 얻은 확답을 전했고, 소속사에서는 “최다빈 선수는 스스로의 선수 생활에 깊은 애정을 느껴 은퇴를 미루기로 결정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통해 하루만에 저의 은퇴를 번복했습니다. 이것이 ‘최다빈 은퇴 번복 사건’의 전말입니다. : )
이후 “하루만에 은퇴 번복”이란 제목으로 언론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좀 많이 놀랐습니다. 솔직히 저는 저의 은퇴 여부에 대해 그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실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많은 분들이 “은퇴 번복 결정, 너무 잘했다”는 응원을 많이 해주셔서 지금까지 더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
은퇴를 번복한 이후, 저에게 거짓말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동계체전을 마친 어느 날, 갑자기 정말 갑자기, 그냥 에스피테리에 주문을 넣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계신 외숙모님께 연락을 드려 에스피테리 부츠 하나만 주문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얼마 뒤, 에스피테리가 보낸 부츠 박스를 연 순간, 저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박스 안에는 과거 제가 신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부츠가 들어 있었습니다. 가죽도, 굽 높이도, 모든 것들이 예전 제가 신던 것과 똑같았습니다.
부츠를 들고 연습장으로 갔습니다. 스케이팅을 시작하는 순간, 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느낌마저 예전 제가 신었던 그때의 부츠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점프를 해봤습니다. 예전에 제가 뛰었던 느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행복했기 때문인지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아... 이젠 내가 노력만 하면 되겠구나...’
이후 저는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다시 너무 재밌어졌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훈련하러 가는 길도 매일매일 설렘으로 가득한 행복한 길로 바꿨습니다. 덕분에 저는 이후 제가 그렇게 원했던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2023년 1월 4일 오후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2023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선수단이 결단식을 가졌습니다. 저는 목표했던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출전권을 따냈지만, 결단식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부츠 때문입니다.
과거 저는 에스피테리에 1년동안 신을 수 있는 강한 부츠를 주문 제작해 신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에스피테리는 주문 제작을 받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금은 3개월에 한 번씩 교체를 해줘야 하는 약한 부츠들만 판매하고 있습니다. 약한 부츠들은 3개월 정도 신으면 점프를 뛸 때 충격을 흡수하지 못 해서 발목이 아파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츠를 교체해줘야 합니다.
원래 제 계획은 지난 12월초에 끝난 ‘2022 KB금융 전국남녀 피겨스케이팅 회장배 랭킹대회’ 직후 새로운 부츠로 교체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츠가 도착하지 않으면서 다시 또 부츠에 대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난 주말, 1월 7일과 8일 이틀간 치러진 ‘제77회 전국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새 부츠를 받아들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신고 연습해 본 결과, 적응에 조금 시간이 필요할 듯해 이번 시즌 내내 계속 신어왔던 부츠로 다시 바꾸는 선택을 했습니다.
피겨 선수들의 경우, 자신이 과거에 오랫동안 신었던 부츠라고 해도, 바로 직전에 신었던 부츠가 다른 부츠였다면 새롭게 감각을 익혀야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며칠동안 새로운 부츠를 신고 연습했기에 저는 또 다시 부츠의 느낌과 감각을 익혀야 했습니다. 또 이번 시즌 내내 신어왔던 부츠를 바꾼 이후에는 다시 또 이 부츠에 적응하기 위해서 감각을 계속 익혀 나가야 했습니다. 사실 결단식에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단식보다 부츠의 느낌과 감각을 익혀가는 것이 더 중요했어요. 그래서 결단식에 참석하는 대신 훈련에 참석하는 선택을 했어요. : )
1월 10일 화요일, 벌써 내일이네요. : ) 내일 오전 10시 저는 2023년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리는 미국 레이크플래시드로 출국할 예정입니다. 생애 첫 유니버시아드 대회이자 저의 대회 출전 이력서의 하나 남은 마지막 빈칸이라 그런지, 솔직히 긴장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네요. : )
저의 이번 유니버시아드 대회 준비과정을 잠깐 소개해드리면, 비록 예전만큼 높은 점프 구성은 아니지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점프 구성들로 구성하는 동시에 프로그램의 전체 완성도를 높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울러 시즌 초반에는 점프가 안정되지 않아 회전수 부족으로 감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회전수가 부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처음 쓰는 글이라 그런지, 아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인지 글이 너무 길어지고 말았네요. 이번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제가 세운 목표를 소개해드리며 오늘은 이만 저의 이야기를 맺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연습 때처럼 할 수 있는 것들 다하고, 경기에서의 긴장감과 짜릿함을 느끼고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