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정원

+ https://www.dmitory.com/novel/174133926

다른 건 다 리뷰쓴 적 있는데 글 정리하다보니 얘만 안써서 재탕하는 김에 리뷰 씀




나에게 이 소설은 벨이라기보다 한 남자의 스물부터 서른여덟까지의 생을 그린 일대기야.

또한 모리스 뢰슬러를 사랑했던 바스티안 울버리히의 기록이자 동시에 옌을 사랑했던 에른스트 셰르네크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하지만 책의 내용은 사랑보다 사람이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의의에 대한 고찰에 가까워.

시대는 혁명 성공 직후의 공화정으로, 아직 많은 것들이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한 때야. 작품의 중심에 있는 모리스 뢰슬러, 혹은 옌은 '혁명가,' 바스티안 울버리히는 '소시민,' 에른스트 셰르네크는 '전복체제 이전의 권력가'로 대변될 수 있어.


이 아리송한 주인공은 두 얼굴을 가진 남자야. 바스티안이 사랑한 모리스는 비록 피와 화약의 냄새가 묻었을지라도 빛나는 젊음과 향기, 반짝임, 열정과 순수함, 강인함과 신념 등의 아름다운 단어들을 인간으로 형상화한 것 같은 남자였어. 그러나 에른스트가 사랑한 옌은 그와 대척점에 있는 이미지를 가진 자로, 비천하고 한없이 바닥에 있는, 무지하고 타락하였으나 사랑스럽고 유혹적인, 그러나 때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보이는 속세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어.


독자에게 이 남자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아. 그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에 담지 않기에, 혹은 거짓된 속삭임으로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에, 그에 대해 독자가 확신을 가지고 알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선명한 신념뿐이거든. 독자는 바스티안의 수기를 읽고 '모리스 뢰슬러'를 짐작하고, 모리스가 흘린 에른스트의 일지를 바스티안이 읽는 것으로 '옌'을 짐작할 뿐이지. 둘은 정 반대의 인물 같으면서도 결국 동일인으로 합쳐져, 독자는 어렴풋이 그의 진짜 윤곽을 더듬을 수 있게 돼. 이 소시민과 몰락귀족의 시각으로 독자는 시대의 복잡함과 그들이 사랑한 한 남자의 다면성을 엿보게 되는거지.


아, 그러나 여기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과 진실이 담겨져 있을까!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신념과 시대, 운명과 선택 중에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들과 손에서 나온 글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는가에 대해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야했어.


옌은 에른스트의 손을 잡아 끌어 자신이 태어났던 곳을 보여주지.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소년을, 옛날 책으로 얼굴을 덮었던 '도련님'을, 그리고 자신이 입고있던 옷보다 부드러웠던 책의 감촉에 대해 말해. 그러나 모리스는 후에 옌이 왜 이 행위를 행했는가에 대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바로 그 감정이 아니라 '옌'은 거짓이며 그것은 질투였다고, 자신은 시인이 될 수 없지만 에른스트는 시집을 읽다가 잠들 수 있는 그가 부러웠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여기엔 얼마만큼의 진실된 그가 담겨있었을까? 그 자신은 시인이 될 수 없어서 분노했지만 새로 태어날 아이들에게는 똑같은 분노를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속물적 욕망'이라고 부르던 그는...


또한 모리스는 바스티안에게 그가 바스티안을 '특별히 대단하고 훌륭한 인간이어서 좋아한' 것이 아니며, 대단하고 훌륭한 인간들을 너무 많이 봐왔고 그들의 특별함이 어떤 최후를 맞는지도 지켜봐왔단 얘기를 하면서 그 특별함이 지겨웠고, 모리스가 사랑한 바스티안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사랑했다'고 말하지.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 얼만큼의 진실이 담겼을까...그는 육체의 고통에 굴복한 바스티안에게 배신당했고, 바스티안의 나약하고 비겁하고 평범함을 조소하고 경멸했는데.


그 모두가 거짓이고 동시에 진실이겠지. 질투도, 동경도, 조소도, 경멸도, 그리고 그 둘을 향한 사랑도....더이상 거짓과 진실은 이들의 이야기에서 중요하지 않아. 결국 바스티안의 말대로 그의 비극은 이 모든 것이었고, 그는 "자기가 가진 비극을 뒤에 남겨두고 정신없이 앞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남자"였기에 에른스트도, 바스티안도 끝내 잡지 못했을테고.



시간이 흘러 1902년 4월, 어느 봄날.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모리스에게서 온 편지였다. 또한 그와 내가 그나마 하던 서신 교환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다. 편지를 읽고 나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펜을 들어 이 글을 썼다.


내가 이것을 쓴 이유는 어떤 평가나 판단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밝혀 둔다. 모리스 뢰슬러라는 한 개인에게 내가 갖는 감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혁명가로서 그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사람들이 내릴 일이다. 여기에 언급된 다른 인물들…… 벤야민 베른하르트와 파비안 오르프를 비롯한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다. 기억을 되돌아본 지난 몇 주간, 나는 에른스트 셰르네크가 국경을 넘기 전에 했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우리가 진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나는 모르겠다. 진보일 수도 있고, 퇴보일 수도 있다. 세상은 옳은 것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간 대신 옳지 않은 것들을 수없이 많이 탄생시켰다. 지나간 길목이 모조리 핏자국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떠올린다. 모리스와 거닐었던 사과 농장의 풍경을 말이다. 우리가 진실로 평온했던 단 한 때. 멋쟁이처럼 차려입은 모리스, 내가 서툴게 운전하던 자동차, 그리고 글자를 읽을 줄 안다며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어린아이. 그때 그 아이와, 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책과, 그를 바라보던 모리스의 뿌듯한 얼굴.


그러면 지금의 이 시대가 진보한 것이든 퇴보한 것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진보든 퇴보든 인간은 쉬지 않고 어딘가로 나아갈 것이고, 나는 여기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있으니, 다만 살아가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은 달리 또 없다.


4월의 햇빛이 글자 위에 떨어진다. 만개한 꽃향기가 감각을 일깨우고 집 안에서는 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일 년 전부터 나는 아이들에게 다시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기초학교가 많이 세워졌다고는 해도 빈민층의 아이들을 돌보는 손길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제 나는 서재로 향할 것이다. 잉크 냄새와 낡은 책 냄새가 가득한 그 문을 열고 빛나는 눈동자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 바스티안 울버리히의 수기 마지막 부분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사람은 결국 계속해서 살아가더라. 바스티안은 혁명 이전과 이후가 다를 것 없는 소시민으로, 고귀하고 찬란하여 모든 것이 스러지기 전에 스스로 마감하는 생에 대해 말했던 에른스트는 후회와 비참함이 가득한 채로. 모리스는 마지막으로 바스티안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 "하지만 서른 이후에도, 마흔 이후에도, 어쩌면 여든이 넘어서까지도 계속되는 게 삶이 아닙니까. 본인의 예상보다 짧을 수도 있지만, 아주 질기게 이어질 수도 있는 것." 그는 자신이 망가져서 끝끝내 투쟁의 한복판에 서있어야만 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열렬히 갈망했고, 서른 여덟의 나이로 전쟁터에서 불꽃같았던 생을 마감해. 모리스야말로 아름답고 찬란한 죽음을 조소했으며, 추하게나마 끝까지 살아남는 생을 추구하던 이인데 그만이 가장 고결한 죽음을 맞다니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지...


이 소설에서는 아무도 제대로 된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아. 사랑, 어쩌면 이 단어는... 어떤 의미에서는 많은 감정들을 축소하고 한정시키고 마는 게 아닐까. 이 셋이 얽혀있는 감정은 그보다 더욱 짙고 참혹하면서도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여린 꽃잎같이...형용하기 어려운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끝까지 울지 않을줄 알았어. 캐릭터 각자의 서사며 시대상이며 전체적인 구성이며 문장이며 모든 것이 훌륭하고 애틋했지만 이것이 읽는 동안 나에게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않았거든. 오히려 한발자국 떨어진 관찰자의 시점으로 내내 그들을 바라보았기에 냉정한 느낌마저 들었지. 그런데... 책을 덮는 순간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는 그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 이거 쓰면서 발췌하려고 책 펼쳤다가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모리스, 옌, 그곳에서는 이제 편히 쉬고있나요.

  • tory_1 2021.02.24 03:20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W 2021.02.24 03:22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3 2021.02.24 07:56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W 2021.02.24 08:17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4 2021.02.24 09:25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9/10 14:13:32)
  • W 2021.02.24 09:42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4 2021.02.24 10:36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9/10 14:13:32)
  • W 2021.02.24 10:37
    @4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tory_5 2021.02.24 19:03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 W 2021.02.24 20:19
    비회원은 댓글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조회
전체 【영화이벤트】 허광한 주연 🎬 <청춘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 단 한번의 시사회 29 2024.04.25 1834
전체 【영화이벤트】 7년만의 귀환을 알린 레전드 시리즈✨ 🎬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예매권 증정 95 2024.04.23 2923
전체 【영화이벤트】 F 감성 자극 🎬 <이프: 상상의 친구> 예매권 증정 70 2024.04.22 2833
전체 【영화이벤트】 두 청춘의 설렘 가득 과몰입 유발💝 🎬 <목소리의 형태> 시사회 15 2024.04.16 5958
전체 디미토리 전체 이용규칙 2021.04.26 567576
공지 로설 🏆2023 노정 로설 어워즈 ~올해 가장 좋았던 작품~ 투표 결과🏆 36 2023.12.18 13612
공지 로설 🏆 2022 로맨스소설 인생작&올해 최애작 투표 결과 🏆 57 2022.12.19 164906
공지 로설 가끔은.. 여기에 현로톨들도 같이 있다는 걸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63 2022.06.17 186830
공지 비난, 악플성, 악성, 인신공격성 게시물은 불호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2022.05.04 225620
공지 BL잡담 딴 건 모르겠는데 추천글에 동정 여부 묻는건 제발ㅠㅠ 63 2022.04.08 178066
공지 기타장르 💌 나눔/이벤트 후기+불판 게시물 정리 💌 (+4.4) 135 2021.11.05 226225
공지 정보 BL 작가님들 포스타입 / 네이버 블로그 주소 📝 228 2020.10.21 237950
공지 정보 크레마 사고나서 해야할 것들 Tip(1114) 49 2018.12.28 216128
공지 노벨정원은 텍본을 요청/공유하거나 텍본러들을 위한 사이트가 아닙니다. 57 2018.11.13 296408
공지 노벨정원 공지 (23년 09월 13일+)-↓'모든 공지 확인하기'를 눌러주세요 2018.07.16 453504
공지 나래아/톡신/힐러 리뷰금지, 쉴드글 금지 135 2018.03.13 226151
모든 공지 확인하기()
7734 BL잡담 장공안 작가 대풍괄과, 한국출판사한테 한국역사 비하내용 삭제요구받고 웨이보에 피코+댓글 한국 까판열기 23 2021.02.25 548
7733 로설 이 불호 리뷰 필력 개쩐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54 2021.02.25 3065
7732 기타잡담 마이너 키워드 뉴비 볼때 공감하는 짤 ㅋㅋㅋㅋㅋㅋㅠㅠ 12 2021.02.25 385
7731 BL잡담 조아라 선작란에 산소호흡기 달기 <청게물편> 14 2021.02.25 2054
7730 BL잡담 공맘을 위한, 공맘의 의한, 공맘의 그 이름 서한열ㅠㅠㅠㅠㅠㅠ(ㅂㅊ多) 12 2021.02.24 701
7729 로설 오랜만에 기승전결 넘 만족스러워서 올리는 로설 추천글 3 2021.02.24 549
» BL리뷰 어떤 몰락의 역사 - 아름답고 참혹한 인간의 초상 (ㅂㅊ, ㅅㅍ) 10 2021.02.24 549
7727 로설 + 이북 나눔 이벤트 당첨자 발표 (26, 65, 175) 10 2021.02.24 336
7726 로설 🏆 2021 로맨스소설 인생작 투표 결과 🏆 (BGM, 스압) 92 2021.02.24 65103
7725 BL잡담 미필고 토리들아 나 자랑 하나만 해도 될까?😆 15 2021.02.24 483
7724 BL잡담 열락군자 우이채가 우리채가 된 순간 14 2021.02.23 372
7723 BL리뷰 서사가 잘 짜인 찌통물 좋아하는 톨들에게 추천하는 책 4종 25 2021.02.23 1434
7722 기타잡담 오타 신고하면서 빡쳤던 수많은 경험 이야기... 14 2021.02.23 436
7721 BL잡담 국서 우이채 졸라 귀엽잖어 ㅂㅊ 16 2021.02.23 221
7720 BL잡담 코로나를 이겨내요! 12 2021.02.23 374
7719 BL잡담 나톨이 최근 웃겼던 노정글들 12 2021.02.23 702
7718 기타잡담 불호리뷰들 보면 진짜 못된 사람 많은 거 같아 24 2021.02.23 647
7717 기타잡담 몇달전에 쓴 발췌글 지우려다가 추천수박혀있길래 안지움 6 2021.02.23 213
7716 BL잡담 천구비 ㅂㅎ ㅅㅍ 4 2021.02.22 410
7715 정보 🌙YES24 달빛 스탬프🌝 22 2021.02.22 1124
목록  BEST 인기글
Board Pagination 1 ...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 496
/ 496

Copyright ⓒ 2017 - dmi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