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는 메마르고 황량한 냄새가 났다.
* * *
코를 훌쩍거리며 얼떨떨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조금 가다가 뒤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가게 앞에 서서 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또 조금 걷다가 이제는 갔겠지, 싶어서 돌아보면 그대로였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볼 때도 그는 같은 자리에서 내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눈물이 나는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 * *
“누가 이랬어.”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자 그가 애써 인상을 풀고 얼렀다.
“너한테 화내는 거 아냐. 괜찮으니까 말해 봐.”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그의 손을 가져왔다. 손바닥에 ‘할머’까지만 쓰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흐윽.”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눈물이 터졌다. 눈앞에 있는 그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하므… 하므가.”
“…….”
“하므가아.”
복받치는 서러움과 속상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더듬더듬 울먹였다. 이것도 말하고 저것도 말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서 뒤엉키고, 터지지 못한 말은 입에서 뱅뱅 맴돌아 답답함에 눈물 콧물만 마구 쏟아 냈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품에 끌어당겨 꼭 안아 주었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손으로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너무 따뜻하고 다정해서, 나는 그 애정 가득한 손길이 너무 좋아서, 그저 그의 목을 부둥켜안고 마구 흐느꼈다.
그는 한참을 나를 안고 있었다.
* * *
그는 이상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웃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냥 위태롭게 보였다.
* * *
마당 한구석에서 할머니가 쫒아 나올까 경계하며 속에 든 것을 웩웩 게워 내었다. 눈물 콧물도 함께 질질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할머니가 가슴을 탕탕 치고 통곡했다.
저거는 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지웠어야 했다고, 지 엄마가 고아원에 내버린 걸 다시 주워 오는 게 아니었다고, 뭐할라고 생겨서 내를 이래 힘들게 하냐고.
가끔 약주를 드시거나 엄마와 싸우고 나면 꺼이꺼이 울면서 내게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였다.
나는 슬픈 눈으로 할머니를 보았다.
그렇지만 할머니,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도로 엄마 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원래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한 줌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은걸요.
누구보다 내가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 * *
“너 정말 예뻐서 미치겠다.”
달콤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황홀했다. 나는 그의 손을 가져와 정신없이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볼에 가져다 대어 마구 비볐다.
나는 사람의 온기에, 애정에, 너무 많이 굶주려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쭉 집 안에만 머무른 지 수년째. 아주 많이 외로웠고 내게 닿은 그의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확실히 넌 스스로를 학대하는 경향이 있어.”
의문 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정신은 온통 이 감각을 어떻게 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의 손과 몸짓에 쏠려 있었다.
“좋지 않은 거야.”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나까지 휩쓸리게 돼.”
그가 내게로 허물어졌다. 나를 눕혀 놓고 다리를 크게 벌려 그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그게 문제야.”
* * *
나는 그의 방에서 매일같이 다리를 벌렸고, 헐떡였고, 그의 여자가 되어 갔다.
할머니에게 빗자루로 맞아 멍든 얼굴을 그가 아픈 얼굴로 봐 주는 게 좋았고, 저녁밥은 먹었는지 궁금해하고 챙겨 주는 게 좋았다. 가끔 늦은 밤 얼큰하게 술에 취해 먹을 것을 사 와 내게 안기는 그도 좋았다.
나와 자고 싶어 하고, 나를 만지고 싶어 하는 그가 눈물 나게 좋았다.
(......)
그는 내 외로움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하루해가 얼마나 긴지 내 지난 외로움과 서러움을 모두 그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 * *
나는 영은이가 마음으로 나를 버렸다는 걸 안다.
* * *
나는 흘러내리는 빗물에 연신 눈을 깜빡이며 그를 마주 보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캄캄한 눈은 다른 언어처럼 어려웠지만, 한편으로 익숙했다. 엄마와 할머니는 종종 나를 말없이 저런 눈으로 보고는 했다.
내 삶 어디쯤 가면 저 시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말없이 내게 등을 돌리고 앉았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너른 등에 몸을 실었다.
잔잔한 흔들거림이 자장가처럼 편안했다. 정신이 멀어졌다 가까워지다 어느 순간 까무룩 의식의 끈을 놓았다.
* * *
[있지... 그 사람 목소리 어땠어?]
"누구?"
[...옆방 남자.]
"목소리가 어떻긴.... 그냥 아저씨 목소리지."
(......)
"그냥 평범해. 아저씨 목소리야."
평범하다고....
그 말을 곱씹었다. 그는 색으로 표현하면 파란색이다. 차갑고 각이 지고 날카롭고. 그런데 그 목소리가 평범하다고?
(......)
이상했다. 들리지 않는다는 게 어두운 바닷속에 혼자 떠다니는 것처럼 심심하긴 했어도 외롭진 않았다. 이렇게 비참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 * *
“사람이 위만 보고 살믄 불행한 기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내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순간이 영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레 알게 되는 사실이다. 귀머거리에 조그마한 동네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인생을 배우게 된다.
지금 이상의 인생이 나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을 것을, 나는 자연스레 미련도 억울함도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 * *
할머니는 사람이 위만 쳐다보고 살면 불행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불행해도 좋았다. 이보다 더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좋았다. 그의 옆에 있고 싶어 온 마음이 흐느껴 울었다.
* * *
나는 알고 있다. 영은이처럼, 엄마처럼, 그도 마음으로 나를 버렸다는 걸.
* * *
나는 그가 머물렀던 옆방으로 기어들어 가 구석에 몸을 끌어안듯 웅크리고 앉았다. 문 너머 붉은 너울이 어른어른 비쳤다.
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가볍게 나를 던져 가뭇없이 사라지고 싶다.
빨리 와서 나를 집어삼키렴. 그래서 흔적도 없이 나를 없애 다오.
해가 갈수록 나의 슬픔은 커져만 갔다. 그는 슬픔의 모서리를 만져 주었고 나는 그 따듯한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벗어 놓고 간 재킷에 얼굴을 묻고 지친 몸을 바닥에 뉘었다. 없는 계집. 이름의 의미를 곱씹으며.
역시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존재를 없애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떠나고 또다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사는 건 싫었다.
더는 싫어. 더는 못 하겠어.
나는 늘 죽고 싶었다. 엄마 앞에서, 할머니 앞에서, 그리고 그 앞에서… 죽어 버리고 싶었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대들보에 목매달아 버리든지 농약 마시고 콱 죽어 버리고 싶었어.
*
오랜만에 무희 복습하다가 마음에 남는 구절들이 많아서 발췌해왔어.
일루션 작가의 가장 정제된 작품이 무희라고 생각해.
농아에 백치인 희의 독백이 1부 내내 이어지는데 너무 절절해서 보다가 눈물 찔끔 흘렸네...
승권이 뻗은 온기가 희에게는 절박했고, 승권마저 자길 마음으로 놓았다는 걸 느끼고 마침내 삶을 내려놓으려고 했던 희라서
결말에 희랑 승권이 행복하게 지내는게 참 좋았어.
호불호가 클 작품이지만 난 참 좋아하는 작품이야~
일루션 작가 신작은 어디까지 왔나...^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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