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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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다 리뷰쓴 적 있는데 글 정리하다보니 얘만 안써서 재탕하는 김에 리뷰 씀




나에게 이 소설은 벨이라기보다 한 남자의 스물부터 서른여덟까지의 생을 그린 일대기야.

또한 모리스 뢰슬러를 사랑했던 바스티안 울버리히의 기록이자 동시에 옌을 사랑했던 에른스트 셰르네크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하지만 책의 내용은 사랑보다 사람이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의의에 대한 고찰에 가까워.

시대는 혁명 성공 직후의 공화정으로, 아직 많은 것들이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한 때야. 작품의 중심에 있는 모리스 뢰슬러, 혹은 옌은 '혁명가,' 바스티안 울버리히는 '소시민,' 에른스트 셰르네크는 '전복체제 이전의 권력가'로 대변될 수 있어.


이 아리송한 주인공은 두 얼굴을 가진 남자야. 바스티안이 사랑한 모리스는 비록 피와 화약의 냄새가 묻었을지라도 빛나는 젊음과 향기, 반짝임, 열정과 순수함, 강인함과 신념 등의 아름다운 단어들을 인간으로 형상화한 것 같은 남자였어. 그러나 에른스트가 사랑한 옌은 그와 대척점에 있는 이미지를 가진 자로, 비천하고 한없이 바닥에 있는, 무지하고 타락하였으나 사랑스럽고 유혹적인, 그러나 때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보이는 속세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어.


독자에게 이 남자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아. 그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에 담지 않기에, 혹은 거짓된 속삭임으로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에, 그에 대해 독자가 확신을 가지고 알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선명한 신념뿐이거든. 독자는 바스티안의 수기를 읽고 '모리스 뢰슬러'를 짐작하고, 모리스가 흘린 에른스트의 일지를 바스티안이 읽는 것으로 '옌'을 짐작할 뿐이지. 둘은 정 반대의 인물 같으면서도 결국 동일인으로 합쳐져, 독자는 어렴풋이 그의 진짜 윤곽을 더듬을 수 있게 돼. 이 소시민과 몰락귀족의 시각으로 독자는 시대의 복잡함과 그들이 사랑한 한 남자의 다면성을 엿보게 되는거지.


아, 그러나 여기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과 진실이 담겨져 있을까!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신념과 시대, 운명과 선택 중에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들과 손에서 나온 글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는가에 대해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야했어.


옌은 에른스트의 손을 잡아 끌어 자신이 태어났던 곳을 보여주지.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소년을, 옛날 책으로 얼굴을 덮었던 '도련님'을, 그리고 자신이 입고있던 옷보다 부드러웠던 책의 감촉에 대해 말해. 그러나 모리스는 후에 옌이 왜 이 행위를 행했는가에 대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바로 그 감정이 아니라 '옌'은 거짓이며 그것은 질투였다고, 자신은 시인이 될 수 없지만 에른스트는 시집을 읽다가 잠들 수 있는 그가 부러웠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여기엔 얼마만큼의 진실된 그가 담겨있었을까? 그 자신은 시인이 될 수 없어서 분노했지만 새로 태어날 아이들에게는 똑같은 분노를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속물적 욕망'이라고 부르던 그는...


또한 모리스는 바스티안에게 그가 바스티안을 '특별히 대단하고 훌륭한 인간이어서 좋아한' 것이 아니며, 대단하고 훌륭한 인간들을 너무 많이 봐왔고 그들의 특별함이 어떤 최후를 맞는지도 지켜봐왔단 얘기를 하면서 그 특별함이 지겨웠고, 모리스가 사랑한 바스티안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사랑했다'고 말하지.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 얼만큼의 진실이 담겼을까...그는 육체의 고통에 굴복한 바스티안에게 배신당했고, 바스티안의 나약하고 비겁하고 평범함을 조소하고 경멸했는데.


그 모두가 거짓이고 동시에 진실이겠지. 질투도, 동경도, 조소도, 경멸도, 그리고 그 둘을 향한 사랑도....더이상 거짓과 진실은 이들의 이야기에서 중요하지 않아. 결국 바스티안의 말대로 그의 비극은 이 모든 것이었고, 그는 "자기가 가진 비극을 뒤에 남겨두고 정신없이 앞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남자"였기에 에른스트도, 바스티안도 끝내 잡지 못했을테고.



시간이 흘러 1902년 4월, 어느 봄날.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모리스에게서 온 편지였다. 또한 그와 내가 그나마 하던 서신 교환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다. 편지를 읽고 나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펜을 들어 이 글을 썼다.


내가 이것을 쓴 이유는 어떤 평가나 판단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밝혀 둔다. 모리스 뢰슬러라는 한 개인에게 내가 갖는 감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혁명가로서 그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사람들이 내릴 일이다. 여기에 언급된 다른 인물들…… 벤야민 베른하르트와 파비안 오르프를 비롯한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다. 기억을 되돌아본 지난 몇 주간, 나는 에른스트 셰르네크가 국경을 넘기 전에 했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우리가 진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나는 모르겠다. 진보일 수도 있고, 퇴보일 수도 있다. 세상은 옳은 것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간 대신 옳지 않은 것들을 수없이 많이 탄생시켰다. 지나간 길목이 모조리 핏자국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떠올린다. 모리스와 거닐었던 사과 농장의 풍경을 말이다. 우리가 진실로 평온했던 단 한 때. 멋쟁이처럼 차려입은 모리스, 내가 서툴게 운전하던 자동차, 그리고 글자를 읽을 줄 안다며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어린아이. 그때 그 아이와, 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책과, 그를 바라보던 모리스의 뿌듯한 얼굴.


그러면 지금의 이 시대가 진보한 것이든 퇴보한 것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진보든 퇴보든 인간은 쉬지 않고 어딘가로 나아갈 것이고, 나는 여기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있으니, 다만 살아가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은 달리 또 없다.


4월의 햇빛이 글자 위에 떨어진다. 만개한 꽃향기가 감각을 일깨우고 집 안에서는 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일 년 전부터 나는 아이들에게 다시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기초학교가 많이 세워졌다고는 해도 빈민층의 아이들을 돌보는 손길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제 나는 서재로 향할 것이다. 잉크 냄새와 낡은 책 냄새가 가득한 그 문을 열고 빛나는 눈동자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 바스티안 울버리히의 수기 마지막 부분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사람은 결국 계속해서 살아가더라. 바스티안은 혁명 이전과 이후가 다를 것 없는 소시민으로, 고귀하고 찬란하여 모든 것이 스러지기 전에 스스로 마감하는 생에 대해 말했던 에른스트는 후회와 비참함이 가득한 채로. 모리스는 마지막으로 바스티안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그런 얘기를 하거든. "하지만 서른 이후에도, 마흔 이후에도, 어쩌면 여든이 넘어서까지도 계속되는 게 삶이 아닙니까. 본인의 예상보다 짧을 수도 있지만, 아주 질기게 이어질 수도 있는 것." 그는 자신이 망가져서 끝끝내 투쟁의 한복판에 서있어야만 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열렬히 갈망했고, 서른 여덟의 나이로 전쟁터에서 불꽃같았던 생을 마감해. 모리스야말로 아름답고 찬란한 죽음을 조소했으며, 추하게나마 끝까지 살아남는 생을 추구하던 이인데 그만이 가장 고결한 죽음을 맞다니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지...


이 소설에서는 아무도 제대로 된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아. 사랑, 어쩌면 이 단어는... 어떤 의미에서는 많은 감정들을 축소하고 한정시키고 마는 게 아닐까. 이 셋이 얽혀있는 감정은 그보다 더욱 짙고 참혹하면서도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여린 꽃잎같이...형용하기 어려운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끝까지 울지 않을줄 알았어. 캐릭터 각자의 서사며 시대상이며 전체적인 구성이며 문장이며 모든 것이 훌륭하고 애틋했지만 이것이 읽는 동안 나에게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않았거든. 오히려 한발자국 떨어진 관찰자의 시점으로 내내 그들을 바라보았기에 냉정한 느낌마저 들었지. 그런데... 책을 덮는 순간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는 그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 이거 쓰면서 발췌하려고 책 펼쳤다가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모리스, 옌, 그곳에서는 이제 편히 쉬고있나요.

  • tory_1 2021.02.24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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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 2021.02.24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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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3 2021.02.24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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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 2021.02.2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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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4 2021.02.2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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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4 2021.02.2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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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 2021.02.2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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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5 2021.02.2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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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 2021.02.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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