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 대부분이 서양 배경이고, 사실 서양사는 한국에선 깊이 공부하는 경우는 적은 대신 이미지는 무척 친숙한 학문임. 이미지가 친숙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아무리 우리가 한국 역사는 필수로 공부하고 명절 때 한복 입고 절했어도 우리가 어릴 때 되고 싶어 했던 '공주'는 첩지 머리에 한복 곱게 차려입은 게 아니라 왕관 얹고 퍼프 소매에 허리 꽉 조이고 치마 촤라락한 드레스 차림이었단 것임. 그리고 그 퍼프 소매 드레스가 어느 시대 물건인진 아무도 모름. 아무도 안 알랴줌. 사실 알아보려고도 안 함.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현재 한국은 왕이 없는 사회임. 왕족이었던 사람들 몇몇이 남아있긴 하나 마지막으로 다스렸던 왕이 워낙 대차게 나라를 말아먹어서 존경을 못 받아. 실제로 황제가 다스렸고 공후백남작 시스템의 원조인 (실제 서양 작위는 공후백남작 시스템이 아님. 그냥 번역하려니 동양에서 익숙한 직위를 빌려와 대충 매치한 것) 중국은 공산주의 시작하고 옛 문화는 다 때려엎은 거라 상황이 더 심각함. 일본이 왕족이 남아 있긴 한데 얘네는 안 쳐줄게...워낙 잽라파고스에다 서양식 따라하려고 기를 쓰는 애들이라서...결론은 로판 작가들이 왕족/황족이 등장하는 작품을 쓰려면 필연적으로 빌려오는 '이미지'는 유럽 왕정 쪽이라는 것임. 더 잘 알고 오래 공부한 한중 쪽은 왕족/황족들의 말로가 다 안 좋았거든.
문제는 이미지 자체는 익숙한데 그 이미지가 생성된 배경 지식이 없으니까 빌려온 이미지를 개연성 있게 작품에 녹여내질 못 하는 거야. 톨들이 흔히 말하는, 서양식 왕인데 정부가 아닌 후궁을 들이는 게 말이 안 된다가 왜 그렇냐면, 그게 말이 되려면 로설 자체의 근간이랄 수 있는 일부 일처제, 모노가미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임. 서양에선 기독교가 오랫동안 득세해 왔고 그 기독교는 일부 일처제를 중시하지. 그래서 기독교를 섬기는 왕도 왕비는 하나 뿐일수 밖에 없었던 거야. 후궁을 들인다? 그러면 일단 교황에 의해서 이단으로 몰릴거고 귀족과 백성들도 저런 이도교를 봤나, 사탄에 홀린 왕을 끌어내라 난리칠 것임. 그래서 서양 왕들은 '정부'를 들이되, 절대 처녀를 정부로 삼지 않았어. 유부녀 남편한테 작위 주면서 꼬시거나, 말 잘 듣는 신하랑 맘에 드는 처녀를 결혼 시킨 후 정부로 삼았지. 왕의 환심을 사려고 아내를 바치는 남자들도 많았고. 포인트는 뒤로는 무슨 짓을 하든, '일부 일처제' 자체는 유지해 왔단 것임. (수정: 8토리가 알려준 대로 처녀로 정부가 된 경우도 있긴 있었음. 다만 왕 자신이 일부 일처제를 유지해야 했던 것은 팩트. 괜히 헨리 8세가 국교 바꾸고 난리쳤던 게 아님)
근데 배경은 서양인데 왕이 후궁을 들였다? 이게 개연성 있으려면 그 나라 제도와 종교등의 설정을 세세히 짜야 함. 뭐 무슬림처럼 많은 아내들을 똑같이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부자여야 한다 같은 거. 아님 왕족은 고귀한 혈통이니 그 혈통을 최대한 많이 퍼뜨려야 하는 게 미덕이라 아내를 많이 들일 수 있다 라던가. 근데 그렇게 따지고 들면 로판 남주는 대부분 왕 못지 않은 부자인데요? 왕 말고 고귀한 혈통은 안 되는 거임? 아니 고귀한 혈통이면 오히려 근친을 해서라도 지키려고 하지 않나? 같은 반론들이 필연적으로 나옴. 그만큼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개연성 있는 설정은 짜기가 힘듬.
워낙 쓰는 사람들이 많은 장르라 오인하기 쉬운데, 판타지는 원래 쓰기 되게 빡센 장르야. 일단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쓰면서 현실 독자의 공감과 몰입을 끌어내야 하는 건데, 위에 쓴 서양 왕실 내 후궁 예시만 봐도 알겠듯이 사람들은 자기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의문점을 가지고 설명을 요구하는게 디폴트야. 그런데 거기에 대해 작가가 답을 안 주면 답답하고 몰입도 떨어지게 돼 있음.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개연성 있게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째는 작가가 존나 설정 덕후에, 오진 상상력에다 존나 천재라서 아주 세세한 설정까지 다 생각하고 쓰는 경우가 있음. 이 분야 갑은 반지의 제왕의 톨킨 옹임. 워낙 설정을 잘 해놔서 톨킨학도 있고 작품에 나오는 엘프어로 실제 사람들이 글 쓰고 대화도 할 수 있음.이 분 글은 아무리 드래곤 나오고, 엘프 나오고, 마법 나와도 아무도 개연성, 현실성 없다고 까지 않음. 작가가 설정 구멍을 다 막아버렸거든.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재가 아님. 아니, 천재더라도 설정 덕후가 아니던가, 상상력이 덜하던가, 장인 정신이 배경 쪽으로는 부족하다던가 뭐 여러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판타지를 쓰더라도 현실에서 각종 제도나 사례들을 빌려와서 각색하거나, 아니면 위에 톨킨 옹 같은 괴수들이 '정설'로 만든 설정들을 빌려서 글을 써. 근데 이런 걸 제대로 빌리려면 공부를 해야 되고, 그게 독자가 원하는 '고증'인 거야. 실제 역사랑은 안 흡사해도 돼. 마틴 옹이 왕겜 쓰는데 장미 전쟁 참고했다고 실제로 랭커스터 왕이 드래곤 타고 요크 왕 공격했냐고. 다만 원하는 '이미지'가 있으면 최소한 그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내 소설이랑 맞아드느냐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지.
자꾸 마법이니 드래곤도 나오는데 고증이 뭐 중요하냐고 하는데 누가 마법나오고 드래곤 나오는 것 갖고 뭐라고 했냐고. 오히려 그건 작가의 상상의 산물이니까 존중해 줘야지. 이런 부분들은 오히려 다른 사람 작품설정이랑 비슷하면 창의력 없다고 까이는 부분임.근데 누가 봐도 작가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을 틀리게 인용해서 뭐라 하는 건데 그걸 갖고 뭘 따지냐 하시면...
로판 고증의 문제는 마법 나오고, 회빙환 나오고, 중세 시대때 로코코 드레스가 나와서가 아니야. 누가 로판에서 톨킨 옹을 바라고 마틴 옹을 바라냐고. 이 양반들 작품엔 행복한 커플이 거의 없다고! 배경은 중센데 로코코 드레스를 입히려면 최소한 당시 죽여주는 천재 여혐 양재사가 아름다운 여체를 푸대자루 같은 것으로 싸는 것은 죄악이라는 신의 계시를 받아 산에 올라 코르셋 만드는 법을 새긴 돌판과 비단누에 한 쌍과 옷본을 받아왔다는 설정을 넣어줘! 그게 싫으면 그냥 상수리 작가님처럼 블리오를 입히라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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