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by 쏘날개, 발췌
늦은 밤의 대형할인매장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무진은 곧 잘 술래잡기 놀이를 하듯 문득 사라져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획 하니 앞을 지나가며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속력으로 카트를 밀고 달려가 그에게 엎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와 부딪쳐 폭발하고 싶었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 죽을래?'
열 뜬 얼굴을 거북이처럼 목 안으로 집어넣은 채 눈만 댕그라니 치켜뜨며 소심하게 속삭이면,
사나운 얼굴의 그는 또 어느새 바짝 다가와 이마를 맞댄 채-
'죽을라고'
위협적으로 뇌까린 뒤,
'이렇게 하는 거야.'
덧붙이며 또 씨익 웃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얼른 카트를 밀고 식료품 칸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
내 의기소침한 대답에 무진은 게으른 짐승처럼 졸린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가지고 놀던 빈 카트를 아무렇게나 버려두곤,
냉동고에서 달걀 등을 고르는 내 등뒤로 달싹 달라붙어 어깨 위에 턱을 얹었다.
'저리 가, 사람들이 봐.'
어깨를 흔들며 떼어내려 하면, 그는 악귀처럼 더 바짝 들러붙어 내 목덜미에 코를 비벼댔다.
'괜찮아, 형제라고 하면 돼.'
'...하나도 안 닮았어.'
'그러면 부부라고 하면 돼.'
'...네가 여자 해.'
손끝으로 콧등을 비비며 하는 내 대답에 무진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요란하게 웃어댔다.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나는 얼른 카트를 밀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
"... 그만하자, 무진아."
대신 힘겹게 목 안을 조이며 가까스로 말을 전했는데, 머저리처럼 목소리가 꺾여 나와 버렸다.
그는 웃지 않았다.
이마에 그가 씩씩 내뿜는 숨이 와 닿았다.
권무진을 흥분시키는 방법은 이리도 간단하고 또, 아프다.
전동 드릴에 뚫리는 것처럼 아파, 나는 결국 슬그머니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린 채 말을 이어야 했다.
"내가... 내가 미안했다."
"죽을라고?"
무진은 기껏 삼류 건달처럼 건들거리며 대꾸하곤, 꼴깍 소리가 나도록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마를 가린 내 손을 덥석 붙들어 치우곤, 바짝 붙어 선 채 말의 진위를 가리려는 듯 곧게 시선을 맞추어왔다.
그런 부지런한 개미처럼 내 얼굴에서 장난이나 거짓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시선을 샅샅이 이동시켰다.
...
"그만 미워하고, 이제 그만 좀 잊자. 그리고 우리 좀, 살자."
"...죽을라고?"
무진은 한쪽 무릎을 반쯤 굽혀 삐딱하게 선채 불량스럽게 반복해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미 굽혀진 무릎만큼 기가 꺾여 있었다.
권무진답지 않아서 나는 그 헛된 물음에도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해주었다.
---------------------------
"네가 대단한 집 여자랑 결혼하고, 애를 열 명 낳아도 괜찮고...
그리고 가끔 나한테 와도... 그냥 와서 얼굴만 보고 가도 되고,
좀 그런 기분 들면 자고 가도 되고,
나는 그 정도라도 괜찮을-"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어느새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선 무진이 뒷말을 자르며 선뜩하게 질책했다.
그리고 대뜸 내 뒷덜미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뒤통수에 소름이 돋았다.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퍼뜩 고개를 숙이자, 그는 잡은 내 뒷덜미를 끌어 올리며 쿵-
하고 서로의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죽을라고."
작게 속삭여 위협하곤, 턱을 내밀어 입술 끝을 슬쩍 부딪쳐왔다.
--
죽을라고
[숙어]
1. 까불지마.
2. 너와 끝까지 함께이고 싶어.
3. 사랑해. 떠나지마.
4. 아파, 제발 그렇게 말하지마.
죽을래? 쓰읍 죽을라고
평소 유치하다고 싫어하는 표현인데
이렇게 가슴아프게 애절한 말이 될 줄은 몰랐어.
쏘날개 작품 처음 읽어 본건데 프롤로그가 감정과잉이라 하차할 뻔 했었지만 작품 다 읽고 다시 처음 부분을 읽으니 너무 가슴아프다.
(그나저나 오늘 자로 인생작에 등극한 그불을 완독하고나니 김밥이 먹고 싶어졌다...)
로그인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