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정원



1. 삶에 짙은 순간들이 있다.

삶에 짙은 순간들이 있다.

잔잔히 흐르던 물살이 막다른 길을 만나 거세게 굽이치듯이, 크게 베어 물었던 빵에서 생각지도 못한 크림이 와르르 쏟아지듯이, 영원할 거라 믿었던 고향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듯이,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이 전신으로 닥쳐오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내게 짙은 순간은 항상 힘들었는데.


"선배, 이거 봐요. 예쁘죠."

유은우가 오목하게 받친 손아귀 위로, 흰 꽃이 연잎처럼 떠 있었다. 유은우가 손을 요령 있게 움직이자, 꽃은 빙그르르 돌다가 흩어져 사라졌다. 서재희는 그 꽃 너머로 유은우를 보았다. 눈은 활짝 웃고, 뺨은 상기되고, 뽀얀 이마에 앞머리가 흩어진, 반짝이는 생기로 찬란한.

서재희도 마주 웃었다.

"응. 너무 예쁘다."





2. 너무 힘들어서.

"선배 저 좋아해요?"

"아니?"

이번엔 대답이 즉각 나왔다. 자판기 버튼 누르면 캔 음료가 툭 떨어지듯이 아주 단박에. 그리 대답함으로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동시에, 갈 데 없이 흔들리던 서재희의 동공이 제법 초점을 찾았다. 유은우 어깨를 잡은 그의 손에도 한결 힘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유은우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의문문이에요?"

"나는 그런 거 안 해."

"그런 게 뭔데요."

"누구 좋아하고 아끼고 그런 거."

"왜요?"

"너무 힘들어서."





3. 찬란하여 도리가 없었다.

그 차가운 금속 호수 위에, 유은우가 완전히 드러누워 있었다. 늘 힘이 넘치던 사지를 무방비하게 늘어뜨리고, 눈을 부드럽게 감고, 입술은 틈을 두고, 까만 머리칼은 시계 판 밑으로 나붓이 흘러 떨어졌다. 둥근 가슴이 호흡을 따라 천천히 오르내렸다.

오후의 빛이, 시계 판의 표면에서 번쩍이다가, 유은우의 전신을 휩쓸었다가, 바람을 타고 나무로 떨어져 잎사귀를 스쳤다가, 서재희 발밑으로 자비 없이 밀려왔다. 유은우가 서재희 삶으로 쏟아졌다. 찬란하여 도리가 없었다.





4. 삶이 전복되기까지 찰나였다.

항상 들러붙어 있던 묵직한 불쾌감이 어느 날 갑자기 깨끗하게 증발하였을 때란. 후련하기보다 두려웠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나. 온통 어두운 내게 왜 갑자기 볕이 드나. 더 큰 불행의 암시일까. 잠깐의 빛으로 내 그늘을 더 짙게 하려는 걸까.

그러나 유은우의 대답과 마주하자 용기가 생겼다. 조심스럽게 유은우의 빛을 디뎌 보았다. 아주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여기 좀 안전한 것 같아. 어쩜 이렇게 따뜻할까. 나답지 않지만 한 번만 더 기대도 될까. 그리고 그녀를 중력으로 잡아 삶이 전복되기까지 찰나였다.

보고 싶어.

더운 숨이 울음 대신 왈칵 쏟아졌다. 마지막 가는 순간에 유은우의 손길만 남아있었으면 했다.





5. 익사하는 기분이 들었다.

익사하는 기분이 들었다.

서재희는 안전 바에서 손을 떼고 몸을 바로 했다. 숨 쉬듯 표정을 정돈하며 살아 온 그였으나 지금은 너무 힘들었다. 감정을 비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렇게 애쓰는 것 또한 갈무리하며 서재희는 고요하게 유은우를 마주 보았다.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6. 그녀의 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유은우의 키스는 조심스러웠다. 누가 이길지 어디 한번 붙어보자고 외치던 호언장담에 비해. 입술을 물고 미끄러지는 숨이 따뜻하여 눈물이 났다. 서재희는 불가항력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유은우의 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저 선배 좋아해요."

폐허가 된 고향, 부모님의 죽음, 임유현의 그림자가 해묵은 사슬로 엮여 서재희의 발목에 채워져 있었다. 과거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러나 지금, 그 사슬이 힘차게 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삶에 대한 의지로 반짝반짝 빛나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서재희의 쇠사슬을 쥐고 혼이 부르트도록 제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서재희는 속절 없이 과거에서 건져졌다. 현실에 발붙였다. 처음으로 복수가 아닌, 자신을 위한 욕심을 부렸다. 사실은 옆에 있고 싶다고.





7.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니.

"선배, 제발……."

유은우가 가냘프게 속삭였다.

"……나 두고 가지 마요."

서재희는 유은우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빛이 온전히 품에 들어찼다. 눈부셔 눈을 감았다. 고개를 기울였다.

아아, 은우야.

서재희는 유은우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니.



****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사랑을 하지 않는다던,

그러나 손 쓸 틈도 없이 빠져버려

익사하는 기분이 들었다던 그 모습이

너무나 숨 막히도록 사랑에 빠진 남주의 모습 그 자체라서

보는 나까지 숨 막혔던 <낙원의 이론> 서재희의 감정선.



그나저나 다음화 언제 와... 기다리기 힘들다...


  • tory_1 2018.12.14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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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2 2018.12.14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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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3 2018.12.1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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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4 2018.12.1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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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5 2018.12.14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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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y_6 2018.12.15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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