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심 작가 '천둥구름 비바람' 에서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줬던 대목들 발췌해봤어.
* 별 스포 없는 독백 위주긴 한데 몇몇은 작품의 정수처럼도 느껴져서... 이미 읽기로 마음 먹은 톨이라면 안 보는게 좋을지도 몰라!
사랑을 깨닫는 감각은 마치 머리 위에 핀 조명이 켜지는 순간과도 같았다. 무대 위의 어두운 막 안쪽,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무 바닥을 혼자서 더듬거리다가 갑자기 만난 밝은 빛에 고개를 내리면… 내 발치에는 빛을 무수히 반사하는 다이아몬드가 잔뜩 흩어져 있는 것이다. 정신없이 한참을 주워 담아도 차고 넘치도록.
내 발끝에 채이던 것이 돌멩이 따위가 아니라 작은 보석들이었다는 깨닫는 순간, 조명 없이 걸어온 지난날이 후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나는 애정이 쌍방향이 되었다고 그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 또한 인생은 소설의 챕터처럼 털어내기 딱 좋은 부분에서 멈추질 않는다는 것도.
실제 인간의 삶이란 챕터와 챕터의 사이, 해결해야 할 너절하고 자잘한 문제들이 잔뜩 산재해 있고 그걸 제대로 처리해야만 그나마 나은 분기로 흘러갈 수 있다.
*
“이런 건 그냥 더 가진 쪽이 하는 거야.”
“…그래?”
“그래.”
일조는 눈을 내리깔았다. 녀석이 납득한 건지, 아닌지는 그 표정만 봐서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럼 내가 너보다 더 가진 건 뭘까?”
“…….”
일조의 질문은 단순하지만 답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나와 동등하고 싶다는 소극적인 바람이 비쳐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내가 일조의 콤플렉스 같은 것을 건드리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잠시 후, 일조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더 좋아해 주면 되나.”
“어?”
“내가 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
*
유산처럼 물질적인 것이 아닌, 사랑하는 마음을 많이 받았기에 저는 배부른 사람이라는 녀석을 이해하려면… 아마도 내게는 훨씬 더 많은 깨달음이 필요할 것 같다.
일조를 이해하려면 가진 것 없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그렇게 없는 사람의 위치로 가라앉아서 같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녀석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나 같은 속물은 넘보지도 못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경외심일지도.
*
이별의 순간은 싱거워도 뒤따라 온 미련은 독했다. 일조의 사랑은 눈 녹듯 사라졌을지 몰라도 아직 내 마음속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다.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대로 걷는다면 미련으로 뒤덮인 진창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끔찍했다.
일조야. 이 눈을 다 맞으면서, 발이 푹푹 빠지는 미련의 진창을 나 혼자 걸어가라고.
*
“그냥, 안 가면 안 돼? 내가 더 잘할게.”
“…….”
“난 정말 너 아니면 안 돼.”
와, 끔찍하게 진부한 대사다. 전부 다 진심인데도.
*
천둥구름이 몰려온다.
도시의 빌딩 끄트머리까지 낮게 가라앉은 구름은 지면과 아주 가까워질 때까지도 좀처럼 제 무게를 덜어내지 않았다. 저 안에 얼마나 거대한 폭우가 담겨 있는지, 비가 내리기 전에는 짐작할 수 없다.
내가 품고 있는 마음이 얼마나 거대한지 나조차도 쏟아내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일조와 내가 한 건 한낱 연애 따위가 아니라는 생각.
내 안에 있는 것 역시 그저 사랑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뒤흔들어 댈 격변의 전조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왔다.
*
꼭 마주 안은 서로의 품 안에서 거세게 뛰던 심장이 맞닿았을 때, 두 삶이 몰고 온 각자의 천둥구름이 마주치며 짜릿한 번개를 정수리로 내리 꽂았다.
운명.
운명….
깨달음은 찰나였다. 일조를 감싸 안은 나의 등 위로 폭우처럼 행복의 비가 쏟아졌다.
*
“나는 네가 꿈이었어.”
고개를 들어 올린 일조가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렇게 말했다. 까만 눈 안에 담긴 내가 고스란히 보일 만큼 맑은 눈이었다.
평생 내가 목적이었다는 달콤한 고백, 내 귀에 그건 세상 그 어떤 시인이 지은 사랑 고백보다도 훌륭하게 들렸다. 꾸며낸 말은 할 줄 모르는 일조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귀했다.
나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로 일조를 구박했다.
“뭐야. 나보다 더 멋있게 말하면 어떡하냐.”
좀 새치름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기분이 좋아서 잘 안 된다.
*
우리는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햇살이자 공기이자 물이 되었나 보다. 하나라도 부족하면 생명을 이어 갈 수 없는 것처럼.
볕처럼 따스한 체온을 품에 가득 안은 채로 나는 일조의 귀에 속삭였다.
‘내 햇살.’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조의 이름 뜻은 햇살이 틀림없을 거라고.
천구비 보면 진짜 일상적이고 평이한 문장들로 이어져서 자칫 전체적으로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데,
한 번씩 저렇게 마음을 때리는 구절들이 나와서 작품을 묵직히 눌러주는 거 같음.
되게 마음이 몽글몽글 따뜻해져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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