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 꺼진 불도 다시 보자
1.
“다시는 널 상처 입히지 않을 거야.”
천천히 고개를 든 녀석이 말했다. 한 자 한 자 도장을 파듯 선명한 말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녀석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서찬형이 나오는 드라마에서 나왔던 비슷한 장면. 서찬형이 연기하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
단지 상대가 나인 것만 달랐다.
“그러니까 제발 거부하지 마.”
그러니까…… 다 의미 없었다는 말이다.
2.
그렇게 하면 내가 조금 더 특별해질 줄 알았다.
서찬형이 준 향수를 뿌리고 서찬형의 옆에 서 있으면 나도 그 애처럼 반짝거리고 특별해 보일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나는 그냥 나였다.
서찬형의 옆에서 더더욱 초라하고 작아 보이는 나.
3.
"(중략) 하지만 그때 나는 너 아니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었는데, 그것 때문에 니가 다친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앞으로 너에게 어떻게 보상해야 할까. 제발 부탁이니 말을 해줘. 차라리 욕을 하면 들을게. 때린다면 맞을게. 그러니까 제발,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게, 너한테 용서를 구할 수 있게, 그러면…….”
그 말끝은 점차 울음으로 뭉개지고 흐려져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나에게는 아주 오래된 체념과 포기가 녀석을 잠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건 상대방이 달라지길 기대해서 그러는 거잖아.”
나는 차분히 말했다. 어쩌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니가 바뀌는 걸 바라지 않아. 그냥 이대로 지냈으면 좋겠어.”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4.
그는 여태껏 정해진 말 외에 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어머니에겐 늘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둘러싸고 예쁘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제작자님, 감독님, 작가님들에게는 그저 잘 부탁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학교의 선생님과 친구들, 친구들…….
드라마에서는 늘 가만히 있으면 지들끼리 알아서 하던데.
5.
병실 밖에서 어렴풋이 상의하는 소리가 들려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눈만 껌뻑였다. 아무런 생각도 감각도 없었다. 그저 온몸이 물로 꽉 찬 수족관 바닥에 잠겨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씬 48.
나는 죽었어.
6.
“니가 왜 전화했는지도 모르면서 왔어. 혹시 니가 붙잡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보처럼. 다시 이렇게 왔잖아. 니가 백 번 밀어내도 한 번 불렀다고 결국 여기로 다시 온 거 봐. 나 결국 이런 놈이야. 니가 매주는 목줄에 묶여서 이리 가지도 저리 가지도 못하는 개새끼란 말이야. 나는 그때 너한테 종속됐어. 기억나? 니가 고등학교 때 나한테 미국 가지 말라 그랬었잖아. 그래서 나 결국엔 안 갔잖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결국 니 주변만 빙빙 도는 병신 머저리란 말이야. 니가, 니가…….”
나는 한마디도 못 하고 흐느끼는 그 애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 애는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니가 내 전부야.”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 일부 발췌
애증 여주/ 짝사랑+후회+집착 남주 (+학창시절) 는 언제나 옳다
+4, 5는 과거 남주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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