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감독이 기생충 만들 때 몰두한 게 ‘침투한다’라는 감각이라고 했잖아?
기택이네 가족들이 박사장 가족의 공간에 침투한다고 했을 때, 침투를 하면서도 그런 감각이 희박했던 게 기택 같음
기택은...계획이 없잖아
문광 쫓아내는 데에 계획대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기정, 기우가 세운 계획에 따른 거였지
모두가 침투에 집중하고 주도적으로 움직일 때, 기택은 가족의 등 위에 올라타고 함께 들어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봄.
굳이 따지자면 온전히 기택 자신의 의지였던 건 침투가 아니라 공감이었던 것 같아
어떤 의미로는 천성이었을 수도 있지
현실감도 뿌리도 계획도 없이 둥둥 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도 공감하고 저 사람에게도 공감하고...
부잣집에도 공감하고 자기들이 쫓아낸 윤기사한테도 공감하고...
기정이는 가족한테나 신경쓰라고 소리쳤는데 그런 아버지의 성향이라고 해야 하나 현주소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비난하고 호소한 거라고 생각함
기정이 아무리 영악하다고 해도, 그 비오던 밤에 기택의 ‘나한테 계획이 있다’라는 막연하고 답 없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집으로 향했을 정도로 아직은 부모의 한마디에 의지하고 싶은 나이란 말이야
아무튼 다시 기택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기택은 그렇게 계획이 없는 걸 떠나서 자기 아이덴티티도 없는 상태였다고 생각해
자기 정체성도 놓아버려서 뭘 보든 와 이것도 신기하고 저것도 신기하고 와 저것도 공감이 되고 저것도 공감 되는 백지 같은 상태였던 거 아닐까
나침반이 고장나버려서 여기도 N극이고 저기도 N극이고 그냥 죄다 동서남북 다 되는 거..기준이 없는 거. 내가 없는거.
뭔가에 기분이 나쁘려면, ‘나’라는 사람이 침해되고 모욕당했다고 여겨야 하는데 바로 그 ‘나’를 놓아버린 상태면 뭘 기준으로 기분이 나빠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지. 뭐에 집중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는 거고, 뭐에 공감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게 되지
어차피 나나 걔나 다 같은데 뭐
‘나’라는 게 없는데 ‘너’라는 것의 경계라고 있겠어?
그러다보니까 공감을 넘어 박사장한테도 자신과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꾸 선을 밟으려 드는 게 ‘사모님 사랑하시죠?’ 였던 거라고 생각함
모든 면에서 기택과 박사장은 동일시할 할 만한 부분이 없지만, 사랑이라는 분야는 그게 가능하잖아?
몹시 내밀한, 한 순간에 선을 넘다 못해 그 자리에 함께 서는 게 가능한 기준이 사랑이니까
하지만 비오던 날 탁자 밑에서 박사장 부부의 대화를 엿들으며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아주 뚝배기가 깨져나가는 강도로 알게 됐지
같긴 누가 같다는 거지? 저렇게 혐오스러워 하는데?
그렇게 결코 그들과 자신은 같지 않으며, 같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들에게 자신은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걸 깨달으면서 강제적으로 잠들었던 자아에 상처를 입고 어거지로 알을 깨버린 것 같은 상태가 된 거 아닌가 싶음
기택도 처음부터 그렇게 기준도 계획도 없이 사는 사람은 아니었겠지
그동안 사업실패 등을 거치면서 고통스러우니까...계획을 세우면 무조건 실패하는 그런 삶이었으니까 알 껍질 속으로 들어가 자기 방어적으로 그렇게 아이같은 상태로 날마다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며 살았던 거라고 생각해
체육관에 피난해서 얼굴을 팔로 가린 채 씹어뱉듯 기우에게 들려주던 그게 알껍질 안에 숨는 기택의 변이었을 테니까...
어쨌든 알 속으로 꼭꼭 숨은 기택의 자아는 그렇게 박사장 부부의 대화와 냄새, 폭우 이후의 삶의 차이 등을 보면서 강제로 깨어나면서 극도로 긴장되고 상처입어서 어떤 생존의 위협 같은 걸 느끼는 갓난애 같은 상태로 인디언 놀이의 한 가운데에 섰던 것 같음
그러니까 기정이 죽어가는 것보다도 근세의 냄새가 박사장에게 혐오의 대상이라는 걸 적나라하게 확인하는 순간 그게 곧 기택의 아무 방어막도 없이 깨어난 자아에는 더 중요한, 자기를 아프게 하는=죽이려 드는 존재로 인식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존재의 위협을 느끼는 아이 같고 원초적인 자아는 원인을 제거한다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수단을 선택할 테니까
그러니까 박사장에게 달려들어 칼을 꽂은 순간 기택은 남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었던 거겠지
그냥 위협을 제거하려는 갓 깨어난 어떤 존재인 거지
+ 그런 기택의 행동이 옳다는 글은 아님ㅋㅋㅋㅋㅋ
+ 그렇게 공감하고 타인과 나를 굳이 나누지 않는 게 기택의 천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그게 나쁜 건 아닌데..참.
그리고 보통 소위 알을 깨는 캐릭터는 그 세계에서 사라지거나 밖으로 나아가는 이미지가 강한데
기택은 지하에 들어가는 그 이미지가 강렬했음 그 고요하고 따사로운데 서늘한 대나무숲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