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토리들
나는 오늘 버닝을 보고 너무 짜증이 난 토리야...
솔직히 안보고 싶었는데 과제라서 어쩔 수 없이 봤고 보고 나서 교수님을 깊이 원망했어.
이 영화의 장점이 하나 있는데, 너무 짜증이 나서 글을 쓰고 싶어진다는 거더라고.
그래서 과제인 비평도 집에 와서 다다다다다 썼어.
사실 내 글도 그렇게 친절하지 않아서 누가 볼까 싶지만... 그래도 너무 짜증이 나면 어디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잖아 ㅠㅠ?
그래서 여기 조심스레 올려봐..
사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괜찮아 왜냐면 정말 내가 그냥 너무 뭔가 내 의견을 표현하고 싶은? 그런 순간이라 올리는 거거든!
굉장히 장문이고 또 내 주관적 의견이니까, 영화 보지 않은 토리들 중 볼 토리들은 꼭 스킵해!! 안 그래도 재미없는데 스포당하면 큰일나ㅠㅠ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난 이 영화가 너무 싫고 이 영화를 좋다고 하는 이 평론가들이나 칸도 싫다는 거야...
<버닝 리뷰>
개봉 전부터 요란했다. 배우가, 언론이, ‘칸’을 운운하는 기사가 버닝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다.
이창동이라는, 소위 ‘예술’하는 감독 중 꽤 호감도가 높고 팬층도 두터운 감독의 작품인데다,
칸에 갔고, 또 가서 좋은 평을 받은 한편, 배우와 관련된 여러 사건사고가 있었다.
덕분에 나는 영화 자체에 대한 궁금증도, 이 영화를 바라보고 구성하는 사회/대중의 시선에 대한 흥미로움도 꽉 찬 상태로 영화를 보러 가야했다.
그리고 상영관을 나오며 도대체 그놈의 ‘예술’이 뭔가, 생각했다.
묻자. 예술이란 이토록 인간성을 배제하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
<버닝>이 다루고자 하는 바는 제법 명백해 보인다.
인간의 인식에 대한 모호성, 사실/진실의 확정 불가능성,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인간.
영화는 이 모호성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전시하며, 해미의 입을 통해 무슨 얘기를 할 것이라고 거의 선포하기까지 한다.
(해미와 종수가 첫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가, 도대체 오랜만에 조우한 고향 친구 둘이 나눌 대화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고양이 보일이는 정말 있는가? 해미가 빠졌다던 우물은 있었는가? 벤(스티븐 연 분)은 정말 해미를 죽였는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확정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 답을 확정하고 행위하는 인간(종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관객에게도 이 인식의 모호성을 느끼게 하고자 하는 듯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종수는 해미네 고양이 보일이를 본 적이 없지만, 어느 순간 그 고양이가 정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미가 살던 방 아래층 할머니는 “여기서는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며 고양이는 없다고 말하고, 실제 종수는 보일이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보일아’라고 부른 순간 자신에게 안긴 고양이를 보일이라고 ‘확정’한다.
그러나 정말 그 고양이가 보일이인가? 어떻게 알겠는가?
우물도 마찬가지다.
해미는 우물에 빠진 자신을 종수가 구해줬다고 말하지만, 해미네 가족은 그런 우물은 없었으며 해미가 그곳에 빠진 적도 없다고 얘기한다.
반면, 오랜만에 나타난 엄마는 종수에게 마른 우물은 있었다고 말한다. 엄마의 말은 일견 우물이 ‘있었음’을 확정하는 듯하지만, 사실 이렇게 판단이 갈린다면 그 우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확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정작 종수는 해미와 관련된 어떤 일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물에 대한 진술은 있다/없다로 갈리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가 미장센과 연결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종수가 불투명한 비닐하우스 안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잡아놓은 <버닝>의 포스터는 인상적이다.
흙먼지가 날린다거나, 안개가 끼는 등의 방식으로 구성된 씬은 이와 조응한다.
동시에, 영화는 종수가 벤을 자동차의 창 너머로 보는 장면을 배치함으로써 그가 어떤 관점(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버닝>은 이런 질문을 연쇄적으로 던지며 이동진이 평한 것처럼 ‘인식의 토대’를 되짚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미장센과 메시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같고, 그 촘촘한 구성이 영화를 판단하는 지표라면 그래, 잘 만든 것도 같다.
그러나 되물어볼 질문은 바로 그 ‘구성’을 만들어내는 방식,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선택하는 그 방식에 있다.
솔직히 말해 이 영화의 여성혐오적 색채는 너무 노골적이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가야하는 수준이다.
영화는 그 낡고 고리타분한, 판단하는 이성 주체로서의 남성과 그런 남성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성적이고, 종잡을 수 없고, 감성적인 여성이라는 구도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종수가 받게 되는 역할은 자본도, 이렇다 할 직장도, 그렇다고 패기도 없는 젊은 남성 노동자로 우리가 소위 찌질이라고 부르는 그런 남자다.
영화는 언뜻 그가 해미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영화가 정말 ‘시작’하는 지점은 이 여성을 통해 다른 남성(벤, 스티븐 연 분)을 만나는 그 순간이다.
왜냐하면 종수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는 부분, 감정적 동요를 느끼기 시작하는 부분이 바로 이 벤의 등장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종수는 자신과 달리 자본을 가지고 있는 벤과의 비교하면서 자신의 처지와 위치를 인식하며, 그를 의식하고 사실상 거의 그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극을 진행해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해미는 그냥 ‘이상한’ 여자,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가 되며, 영화 중반부부터는 아예 사라진다.
이 영화에서 해미는 사실 구체성을 가진 여성 개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대마를 피운 뒤 갑자기 옷을 벗으며 춤을 추는 그녀는 그저 이국과 같은, 낯설어서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인 동시에 쉽게 대체되는 대상이다.
춤추는 해미의 뒷모습을 잡은 장면이 끝난 뒤, 곧바로 잠든 해미를 옮기는 종수와 벤의 모습은 이를 증명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영화가 춤추는 것을 끝마친 해미를 ‘의식 있는’ 존재로 재현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해미는 그저 거기서 춤추며 조용히 사라지고 싶어 하는 미지의 것을 상징했으면 그만이지,
춤을 춘 이후의 어떤 인간적 반응을 내보이는 한 인간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옷을 벗은 해미에게 종수가 다음날 창녀 운운하는 장면은 마치 종수와 해미의 인간적 갈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화 초반부에서도 그토록 쉽게 옷을 벗었던 해미에게 종수가 보였던 반응(섹스)을 생각한다면 이때에도 해미는 그저 영화가 하고 있는 얘기를 위한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해미는 그때나 지금이나 옷을 벗었는데, 종수는 상황에 따라 이를 ‘사랑’의 행위 혹은 ‘창녀’의 행위로 생각한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종수의 발언은 따라서 어떤 감정적 발화라기보다는 주제에 부응하기 위해 그때 그가 해야하는 대사에 가깝고,
해미는 여기서 그저 그 발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동시에, 이는 자신보다 잘난 남성에게 여성을 빼앗긴 듯한 느낌을 받은 남성이 해당 여성에 대하여 취하는 전형적인 폭력이기도 하다.
(그 찌질함만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해미가 그저 ‘자연’과 같은 이국적인 무엇이기 때문에, 벤은 그녀를 쉽게 대체한다.
(해미의 대타가 된 중국어를 하는 어린 여성을 기억하자. 해미도 그녀도 이국에 대해 말한다.)
종수는 마치 그게 아닌 해미 자체에 집착하는 듯하지만 그는 사실 해미에 대해 아는 것이 벤보다도 없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해미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것 같다.)
해미는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인간이라는 빅 헝거의 춤을 추지만 그녀가 고뇌하는 그 ‘삶’에 대해 이 영화는 전혀 알지 못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그들이 고뇌하는 삶은 해미의, 혹은 여성의 삶이 아닌, 인식 주체인 남성의 삶인데.
이런 방식의 여성 재현이 여성을 때리거나 소거하거나 혹은 대상화하는 방식으로밖에 예술을 하지 못했던 남성 주류 예술 및 문학에서 수백 번 반복되던 방식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그런만큼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이 영화가 이런 구성을 피해가기 어려웠을 거라고 백 번 양보해준다 한들, 이 영화는 실망스럽다.
이 영화에는 이성이 넘쳐나지만 인간이 부재하며, 당대의 삶에 대한 이해 역시 너무나 조악하다.
이 시대 청춘이 가진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사실상 본인이 상상하는 이 시대 청춘의 분노를 보여주겠다는 말에 가깝다.
여기 대체 ‘이 시대 청춘’이 어디 있는가?
종수가 과연 이 시대의 청춘인가?
종수는 2018년의 청춘이라기보다, 사실 80년대에서 건너온 청춘 같다.
흙수저라는 그의 상황이, 즉 가난하다는 것이 곧 이 시대의 청춘을 이르는 말이 되었나? 대체 언제부터?
종수가 진짜 이 시대의 가난한 청춘이었다면, 그는 사라진, 사실 자신과 별 관계도 없는 해미를 찾아 헤매느라 일자리를 박차고 나갔을까?
근근히 일해서 먹고 사는 노동자임에도 그는 해미가 사라진 이후 일하지 않는다.
고뇌하고, 벤을 쫓고,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게 다다.
이런 모습은 그가 이 시대 청춘이 아니라, 오래 전 과거에서 건너온, 경제력도 능력도 없는데 고뇌는 많은 룸펜 남성처럼 보이게 한다.
청춘을 남성 청년으로 대표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실 여기에서의 청춘은 그저 창작자의 상상일 뿐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여기 종수와 벤, 해미가 나누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거나 지나치게 철학적인 대화도 더해진다.
현실에서 청춘들이 나눌법한 대화는 없다.
그들은 모두 주제를 얘기하기 위한 얘기만, 그것도 아주 문학적이고 비유적이어서 도통 어색하기만한 방식으로 한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느니, 빅 헝거의 춤이라느니...) 여기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들은 그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내려온 영상 속 인형들 같다.
하고 싶은 말이 철학적이고 의미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좋지 않다.
영화에 머리는 있고 사람은 없다.
하고자 하는 말은 있는데, 그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러니까 인생을 살며 어느 순간 아,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영화는 차갑다.
영화에서 벤은 종수에게 가슴을 치는 것, 바운스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감정을 암시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영화 내내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청년이라는 이 남성의 열등감, 그게 그나마 선명하게 전해지는 감정이다. 그 이외에는 없다.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사람에게서 나온다.
인류가 살면서 느낀 것, 생각한 것이 철학이 되고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된다.
<버닝>은 이 선후관계를 망각한 듯하다.
인식, 예술, 관념은 있고 사람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살면서 언젠가 그 말을 절실하게 체험해본 사람은 없는 셈이다.
그러니까, “배고파”라는 말을 한 번도 배고파본 적 없는 사람이 하면 공감이 되겠는가?
영화를 내가 본거같아서 정말 돈주고 볼일은없겠어
대신 봐주고 좋은 글써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