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정에 있던 이동진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칼럼이 너무 좋아서,

거기서 27톨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칼럼도 좋다길래 찾아본 김에 올려.


5cGEeZIglW4C88SWoUE2Q0.jpg



중세 독일의 전설에 이런 게 있지요. 독일 바덴 지방의 어느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가 
아름다운 성의 정원에서 오라뮨데 백작 부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합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면서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살아가던 오라뮨데 백작 부인과 깊은 사랑을 나눕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네 개의 눈이 있는 한 당신을 바덴으로 데려갈 수 없다오.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네 개의 눈이란 자신의 부모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반대할 줄 알았던 부모로부터 수 개월 뒤 의외로 쉽게 허락을 받자 기쁨에 들떠 덴마크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이 아이들을 살해한 뒤 죄의식에 몸져 누운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백작 부인은 '네 개의 눈'이 새로운 사랑에 방해가 되는 자신의 아이들인 걸로 오해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독일 백작은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백작 부인의 그 처참한 사랑으로부터 말입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대학생 츠네오가 다리를 쓰지 못해 집에만 틀어박힌 조제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을 나누다가 서로 다른 처지 때문에 헤어지게 된 츠네오는 조제의 할머니가 죽자 이를 계기로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 함께 삽니다.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조제와 자동차를 타고 떠난 츠네오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갈 수 없게 됐다고 고향에 전화를 합니다. 전화를 받던 동생은 "형, 지쳤어?"라고 되묻지요. 

그 여행 후 결국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집니다. 영화 속 이별의 순간은 의외로 너무나 깔끔합니다. 조제는 담담히 떠나보내고, 츠네오는 별다른 위로의 말 없이 그냥 일상적인 출근이라도 하는 듯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섭니다.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옛 여자친구는 그를 만나자마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합니다. 묵묵히 들으며 함께 걷던 츠네오는 갑자기 무릎을 꺾고 길가의 가드레일을 잡은 채 통곡합니다. 그 순간 츠네오의 독백이 낮게 깔립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결국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우리가 도망쳐 떠나온 모든 것에 바치는 영화입니다. 
한때는 삶을 바쳐 지켜내리라 결심했지만, 결국은 허겁지겁 달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처참한 결말을 논외로 한 채 사랑 자체의 강렬함만으로따지면, 오라뮨데 백작 부인만큼 온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없겠지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조제만큼 절박하게 사랑이 필요한 경우도 드물거고요. 공포 때문일 수도 있고 권태나 이기심 탓 일 수도 있겠지요. 동생이 되물었듯, 츠네오는 그저 지쳤던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떠나갑니다. 

모든 이별의 이유는 사실 핑계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긴, 사랑 자체가 홀로 버텨내야 할 생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사랑에만 해당되는 문제일까요. 

도망쳐야 했던 것은 어느 시절 웅대한 포부로 품었던 이상일 수도 있고, 세월이 부과하는 책임일 수도 있으며, 격렬하게 타올랐던 감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번번히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지 않기를.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05092270375#Redyho

  • tory_1 2019.02.08 17:20

    복습하기 너무 힘든 영화 조제 ㅜ.ㅜ 이동진 글로 많은 위로 받음. 

  • tory_2 2019.02.08 17:22
    마지막 문장이 너무 좋다. 고마워 ㅜ
  • tory_3 2019.02.08 17:23
    와 마지막 문단 울컥한다 글 너무좋다..
  • tory_4 2019.02.08 17:27

    이동진 영화 칼럼중에 가장 좋아하는 거 ㅠㅠ...

  • tory_5 2019.02.08 18:22
    미니홈피에 긁어놨던 거.. 진짜 오랜만이다 너무 좋으다
  • tory_6 2019.02.08 18:46
    영화는 그저 그렇게 봤는데 칼럼아 너무 좋다 ㅠㅠ
    알바하다 울뻔했어
  • tory_7 2019.02.08 19:02
    영화는 그저 그랬는데 칼럼읽으니 좋다
  • tory_8 2019.02.08 19:04
    마지막 문단의 한 문장 한 문장이 따뜻하다ㅜㅜ
  • tory_9 2019.02.08 20:49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3/10/25 12:43:32)
  • tory_10 2019.02.08 22:55

    나도 영화는 그냥저냥봤는데 이 글 읽으니까 없던 여운도 생겨나네.

    글 참 좋다.

  • tory_11 2019.02.09 17:43

    제일 좋아하는 영화인데 이 칼럼도 영화만큼 좋아 정말... 가끔씩 생각나 이 글 

  • tory_12 2019.02.11 22:11
    글 좋다 잘 읽었어
  • tory_13 2019.02.12 18:09
    좋은 글 가져와줘서 고마워 뭔가 울컥해지네
  • tory_14 2019.03.20 23:05
    도망쳐야 했던 것은 어느 시절 웅대한 포부로 품었던 이상일 수도 있고, 세월이 부과하는 책임일 수도 있으며, 격렬하게 타올랐던 감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번번히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지 않기를.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조회
전체 【영화이벤트】 <링> 나카다 히데오 감독 작품 🎬 <금지된 장난> 구마 시사회 16 2024.05.21 892
전체 【영화이벤트】 여성 공감 시사회 🎬 <다섯 번째 방> 시사회 6 2024.05.21 1316
전체 【영화이벤트】 이주승 X 구성환 찐친의 카자흐스탄 힐링 여행기! 🎬 <다우렌의 결혼> 무대인사 시사회 43 2024.05.17 4503
전체 디미토리 전체 이용규칙 2021.04.26 577477
공지 🚨 시사회 관련 동반인 안내사항 2024.02.23 292
모든 공지 확인하기()
188 잡담 항거:유관순 이야기' 진심 통했다...오늘(10일) 100만 관객 돌파 15 2019.03.10 661
187 잡담 CGV 보이콧 선언한 감독에게 스크린 많이 열어주겠다며 회유한 CJ CGV 19 2019.03.10 2410
186 잡담 캡틴마블 보고 왔는데 제일 후련했던 장면(ㅅㅍ) 27 2019.03.09 2220
185 잡담 캡틴마블 욘로그(스포) 19 2019.03.08 1524
184 잡담 캡틴마블 개봉 후 네이버 네티즌 평점vs관람객평점 31 2019.03.07 1375
183 잡담 <캡틴 마블> 엠바고 풀린 본격 리뷰들 13 2019.03.05 1898
182 잡담 마블 영화들 공중파에서 방영해줄거면 더빙판으로 좀 해줬으면 좋겠다 (스압) 47 2019.03.04 2746
181 잡담 어벤져스 히어로들에 대한 타노스의 평가 14 2019.03.04 7078
180 잡담 영화 "미 비포 유" 주인공 루이자의 패션과 컬러차트.jpg (스압) 64 2019.03.03 6713
179 잡담 [캡틴마블] 독과점 어마어마한 수준이네 65 2019.03.02 2978
178 잡담 항거 후기 : 이런 사람에게 추천 (약스포) 20 2019.02.27 1420
177 잡담 주관적인 사바하 해석 (강강강스포!!) 69 2019.02.25 12374
176 잡담 <사바하> 진짜 좋지 않아? 이런 영화 더 많아졌으면 (강력 스포) 21 2019.02.22 2092
175 잡담 다들 모르고 지나친 검은 사제들 속에 숨겨진 특별한 존재 96 2019.02.16 8759
174 잡담 토리들이 본 영화중에 가장 야했던 영화가 뭐야? 151 2019.02.15 10621
173 잡담 "캡틴 마블 안봐".. 남성들 거세진 '페미니즘 콘텐츠 불매' 163 2019.02.10 5469
172 잡담 경성 덕후의 <해어화>(2015) 후기 (스포有) 18 2019.02.10 1502
» 잡담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을 위하여 (이동진 칼럼) 14 2019.02.08 2337
170 잡담 <항거:유관순이야기> 스틸컷.jpg 33 2019.02.01 2081
169 잡담 아동 대상 그루밍 성범죄를 다룬 영화 <이야기> 5 2019.01.31 1249
목록  BEST 인기글
Board Pagination 1 ...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25
/ 25

Copyright ⓒ 2017 - dmi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