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대상으로 하면서, 정작 사람을 관찰하지 않는 만화가들. 자기 자아 밖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상속의 인간만 그리는 편협한 오타쿠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저 말은 지금 영화계나 소설계 문화 전반에 다 통용되는 말 인것 같음.
아랫글에 '가난하지만 예술뽕 찬 남자+순수하고 도발적인 여자' 이 조합은 진짜 오조오억개임. 스케일이 큰 대중 영화가 대중의 기호에 맞춰서 천편일률적인 것도 문제지만. 소위 새로운 시선과 마이너한 감성을 보여줘야할 예술영화들도 이따위라는게 정말 환멸남.
이런거 보면 힙합계의 여혐 문제도 생각이 나는데. 뭔가 사회적으로 의미있고 내적인 어두움을 랩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본인은 그만큼의 성찰도 없고 과거도 없음. 미국 래퍼처럼 총맞아 보길했나 슬럼가에서 굴러보길 했나 위협이 느껴질 정도로 차별을 당해보길 했나. 가사를 보면 요즘 한국남자들에게 세상 억울하고 힘든 일은 여자문제 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대체 얼마나 할말이 없고 자기 인생에서 돌아볼 만한 뭔가가 없으면 그 놈의 '가난한 예술가 남자, 순수하지만 도발적인 여자'만 오조오억개 복제하고 있는지.
이번에 영화 '버닝'의 평론가 평에서도
"어쩌면 ‘진짜 청춘의 얼굴’을 관찰하고 그렸다기 보다는, 이 감독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관념적인 생물은 아닐까란 의문도 든다." 라는 평에 공감 했음.
저 위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처럼 과연 버닝이 이시대의 청춘을 '관찰'하고 그린 작품일까?
만약 그게 맞다면 세상의 반인 여성의 삶은 그 '청춘'에서 배제되었다는 걸 잘 알겠다.
"저는 일차원적인 여성 캐릭터를 맡을 수 없어요. 저에게는 견딜 수 없어요. 저는 제 주변의 복합적인 여성들을 보고 영화 속의 평면적인 캐릭터를 봅니다. 저는 더 이상 이걸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 거의 10줄만의 대사를 읽고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까요?"
- 줄리 델피
버닝이라는 영화도 청춘을 돌아보는 작품이라지만 거기에 나오는 단 한명의 여성은 잠시 나오고 사라짐. 너무도 단편적이고 남자를 위해 소모되는 캐릭터로. 여자도 자기 삶이 있고 남자와 똑같이 고뇌하고 불완전하고 복합적인 존재라는 걸 그누구도 표현해 주지 않음. 지금 한국영화 속에서 나오는 여캐들은 오직 남자들의 자기애로 가득찬 오타쿠적인 상상 속에서만 존재함.
이래서 여자 감독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건데, 애초에 여자 감독들이 활발하게 나올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아님. 충무로에서도 배우는 많은데 감독이 모자라고 할 판인데도.
위에 줄리델피도 감독으로서 정말 오랫동안 준비하고 겨우겨우 투자금을 만들어서 영화를 찍으려는 타이밍에, '감정적인 여자에게 영화를 맡길 수 없다'라는 이유로 투자금을 회수 당하고 영화 자체가 엎어졌음. (감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본인은 과연 이성적인가?)
그리고 어렵게 겨우 만들어진 여성 영화들도 본인의 기준에 차지 않으면 '역시 여자가 만든건 이래서 안돼' 라는 편견에 시달리기도 하고. (남자 감독이 만든 영화는 오조오억개 망해도 그러려니 하고, 수많은 실패작 속에서 명작이 나오는데도.) 오죽하면 최근에 미셸 오바마가 '계속 실패해도 멀쩡한 남자들을 보면 화가 난다. 여자들이 남자들만큼 실수하고 실패해도 괜찮은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했을까.
예전에 나온 여성 주연의 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여자 배우들이 자기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내도, 현장의 남자 제작자나 스탭들이 '여자는 그렇지 않아, 엄마가 그렇게 하는 건 말이 안돼' 라면서 여성의 의견을 묵살하기도 했다고 함. 애초에 현실의 여자들이 자기 배역에 색과 음영을 입히고 싶어도, 결국은 남자의 상상속 단편적인 인물로만 그려지도록 무시 당하는 거.
암튼 버닝 개봉한 걸 보면서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데,
주연 배우가 미투 운동을 조롱한 인물이라는걸 떠나서
'이시대 청춘의 얼굴'을 그린다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어디에도 리얼한 현실 속 사람의 얼굴은 없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