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아, 이쪽은 바하마 코리아의 유진한 지사장.」

사람의 눈빛,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때 처음 알았던 거 같다.
혜준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살짝 당황한 듯, 멋쩍은 미소를 짓는 유진이 혜준의 눈앞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혜준입니다.」
「반갑습니다.」

서둘러 인사를 건네자 멋쩍어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해맑게 활짝 미소를 짓는 그.
이 남자,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그게 유진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

지잉.
휴대폰 액정 위로 보이는 이름을 보며 눈을 의심했다.
이 시간에..?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휴대폰 진동이 멈췄다.
그리곤 잠시 후 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게 한껏 긴장한 듯했다.

「네.」
「긴요한 용건이 있는데 좀 만나 뵙고 싶어서요. 저번 일 때문에 만나서 사과하고 싶습니다.」
「긴요한 용건이 그거라면 굳이 만나 뵙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채 국장님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으시겠어요?」
「....」
「....」
「어디로 가면 되죠?」




....

그가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깔끔한 차림새, 다부진 어깨, 당당한 눈빛.

「저번에 다친 데는 없었어요?」
「네, 특별히.」
「정신과나 뭐 이런 데 가보지 않아도 돼요? 치료비를 청구하시면 제가 다 감당하겠습니다. 위자료 같은 거 필요하시면..」
「용건이 뭔가요?」
「네?」
「용건이요. 채 국장님이랑 관계가 있다던..」

그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여유가 혜준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나를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왜 불러낸 건데요.

「아아.. 참...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혜준 사무관을 만나야 할 긴요한 용건? 아니, 핑계가 필요했습니다. 날 미친놈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그렇게 생각해도 좋지만.. 난, 이 사무관이랑 같이 식사하고 싶어요.」
「싫은데요.」
「왜요?」
「하.. 우리가 같이 식사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혜준의 말이 거슬리기라도 한다는 듯 유진은 눈을 감고 잠시 미간을 찡그리다 이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아.. 이런 게 아닌가? 한국에서는 연인이 되려면 밟아야 하는 절차, 프로세스가 있다고 들어서요. 연애는 공무집행이랑은 다르니까. 그런 절차는 쿨하게 다 생략하기로 하고 바로 침대로 가죠. 뭐, 이런 걸 원한 거예요? 이혜준 사무관님?」

그의 차갑게 식은 눈빛이 혜준의 마음속을 헤집어놓는다.
혜준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꼭 움켜쥐었다.
내가 만만한 건가? 괴롭히고 싶은 건가? 이 시간에 불러내서 이런 말을 지껄일 만큼?
두 눈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러려고 나온 게 아닌데.. 왜 자꾸..

유진은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듯 다시 눈을 감고 길고 곧은 손가락들을 뻗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곤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 이 사무관님 이런 타입이었구나. 죄송합니다. 미처 몰라뵀네요. 근데 나 좀 위험한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찰싹.
유진의 왼쪽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미친 새끼.」




....

「해요.」
「.. 네?」
「그 절차 생략하자고요. 지금 당장 지사장님이 원하는 곳에서.」
「....」

먼저 제멋대로 군 건 누군가 싶을 정도로 당황하는 눈치다.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가죠?」





....

누군가가 보면 마냥 화려해 보일 유진의 펜트하우스가 혜준에게는 그저 텅 비어 보였다.
그 어떤 수식어로도 완벽하게 표현이 안 되는, 이런 화려한 겉모습을 한 남자의 속도 사실은 이렇게나 텅 비어있을까.

띠리릭.
철컥.

어쩌면 안기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하지만 이렇겐 아니었다.

여기서 당장 변사체가 되어 실려 나간다고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겠지.
어쩌자고 여길 따라온 거야?
수백 번 속으로 되뇌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뉴욕에서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봤을 거잖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딱히 흥미로울 것도 없는 사실 본인에게는 적이나 마찬가지일 대한민국 기재부 공무원이랑 왜?

현관의 등이 꺼지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졌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느껴지는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혜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 딱 감고 한 번 하자는 대로 해주면 이제 더 귀찮게 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혜준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때, 유진이 혜준의 차가워진 손을 잡고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숨도 못 쉴 정도로 그녀를 꽉 껴안았다.

「고마워요. 이 사무관님. 좋아해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다치게 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그가 곧이어 혜준을 품에서 부드럽게 풀어주더니 두 손으로 혜준의 얼굴을 감싸며 눈을 맞췄다.

「그리고 미안해요. 아까 카페에서 했던 말들. 이 사무관님 쉽게 생각해서 한 말들 절대 아니에요. 그거 알아요? 이 사무관님, 이혜준이라는 사람은 나한테 정말, 진짜 어려운 사람이라는 거. 그래서 그냥 너무 화가 났어요. 자꾸 날 밀어내기만 하니까. 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이 사무관님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불러내는 거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
「아까 말한 연인이 되기 위한 절차란 거 난 이 사무관님이랑 하나씩 다 해보고 싶어요. 같이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손잡고 사람들 사이로 거리를 걷고. 왜, 남들 다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쪽.
유진이 혜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 코, 입에 차례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눈빛으로 혜준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다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Please.. please tell me you won't leave me alone ever again. You don't have to love me back. Just stay. Stay with me. Tonight. That's all I need right now.」

이러지 마. 자꾸 이러면..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 알게 될 것만 같아.
혜준이 유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요. 침대로.」






....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낯선 향기. 그리고.. 몸을 감싸는 낯선 온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잠든 유진의 얼굴을 훑었다.
이렇게 생겼구나, 한유진.
그의 눈앞까지 손을 가져갔다가 이내 그 손을 거두는 혜준이었다.

「으음...」

그가 몸을 뒤척인다.
혜준은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옷을 주워 입었다.

이혜준, 정신 차려.
마치 어젯밤 누가 있기라도 했냐는 듯 아무 흔적도 없이 도망쳐야 했다.
머리칼 한 올조차 그의 집에 남기기 싫었다.
혹시 두고 가는 물건이 없나 주변을 한 번 더 살폈다.

이걸로 된 거야.
혜준은 그렇게 깊게 잠든 유진을 뒤로하고 그의 집을 나섰다.




....

부재중전화 36통.

오늘도 어김없다.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유진의 펜트하우스에 다녀온 후 그의 전화도 만남도 모두 피하고 있는 혜준이다.
매일 매일 부재중전화를 서른 통 이상씩 남기는 게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 할 짓이냐며 마리가 자꾸 캐묻는다.

「이 사무관. 한유진이가 찾아온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어?」
「아, 아닙니다.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조심해. 저거 미친놈이야. 분명 무슨 시커먼 꿍꿍이가 있어서 이 사무관 찾아온 거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혜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실수였다. 착각이었다.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
내 밥줄이라도 끊어놔야 속이 시원하겠나 싶어서 화가 났다.

수군대는 동료직원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뗐다.
저 멀리 검은색 코트를 입고 화분을 든 유진이 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갈 곳 잃은 그의 눈길이 이내 혜준에게 닿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며칠 동안 본인의 연락을 모조리 무시해서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든 사람이라는 것도 잊은 것처럼 유진은 환하게 웃는다.
그동안 단단하게 쌓아 올렸다고 믿었던 그녀의 세상을 둘러싼 벽이 그의 미소 한 번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이혜준, 침착해.

「그래서 또, 뭡니까?」
「이혜준 사무관님, 왜 자꾸 절 피해 다닙니까?」
「그쪽, 아니 유진한 지사장님 피해 다닌 적 없고요. 더 볼일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만 가주시겠어요? 여긴 제 직장입니다.」
「우리.. 좋았잖아요.」

유진이 조심스럽게 혜준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 날밤의 기억이 떠올라 혜준은 얼굴을 붉혔다.

아직도 당신 품 안에 있던 그때가 생생한데.
하지만 이내, 혜준은 유진을 밀쳐내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얼굴을 1초라도 더 보고 있으면 정말, 정말로 무너질 거 같아서.

「하.. 미친 새끼.」

그냥 모든 걸 버리고 아무도 우릴 모르는 곳으로 떠나자고 해줘요.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 지금도.

혜준은 차마 다시 뒤돌아보지 못한 채 그렇게 유진에게서 멀어져갔다.


  • tory_1 2020.02.24 13:07
    ㅠㅠㅠㅜㅜㅜㅜㅠㅜㅜㅠ 두사람 사이의 섹텐이 퍽발하네 ㅜㅜㅜ 작까님의 그 쓰레기통 ㅋㅋ 다 오픈해주세여 ㅋㅋㅋ
  • tory_2 2020.02.24 13:08
    혜준 왜 밀어내!!!!! 그만큼 유진이가 당겨라!!!
  • tory_3 2020.02.24 13:12
    좋다좋다 ><
  • tory_4 2020.02.24 13:29
    용암 폭팔했구나ㅜㅜ
  • tory_5 2020.02.24 14:14
    ♡♡♡♡♡♡♡♡♡♡
  • tory_6 2020.02.24 14:57
    무너져 모래성처럼 이혜준!!!!!!!!!!아아아아!!!!!!!!!! 우린 언제든 오픈되어있는 쓰봉이니까...마음껏........선생님의 창의력..글빨을 펼쳐주시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tory_7 2020.02.24 15:41

    ㅠㅠ넘 좋아,,,,,

  • tory_8 2020.02.24 16:29
    너무 좋아요 ㅠㅠ
  • tory_9 2020.02.24 16:57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2/03/12 13:38:41)
  • tory_10 2020.02.24 18:14
    아니 선생님 ㅠㅠㅠㅠㅠㅠ 다음 어딨어요ㅠㅠㅠㅠㅠ
  • tory_11 2020.02.24 21:45
    우와우아아우아우ㅏㅇ우 이혜준 무너지는데 왜 내 심장도 같이 무너지죠ㅠㅠㅠㅠㅠㅠ
  • tory_12 2020.02.24 22:32
    어우야~~~너무좋다~~~~ㅜㅜ 대사가 절로 재생되네
  • tory_13 2020.02.25 10:20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1/10/23 09:23:09)
  • tory_14 2020.02.26 06:17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구성 넘 좋아! 다시 와 줘서 고마워!
  • tory_15 2020.02.27 02:23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20/05/25 17:05:47)
  • tory_16 2020.02.27 16:20
    좋으다 좋으다 ㅜ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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