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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결혼식 날짜보다 몸을 튼 날이 먼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진은 에너지가 강한 남자라는 것까지.
이제까지 유진의 에너지는 돈에 대한 소유욕, 돈에 관해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일에 치중되어 있었다. 생각이 바뀐 지금, 그 소유욕과 집착을 받아낼 대상은 돈이 아니라 이혜준이었다. 한 마디로 혜준은 유진과 많이 했다.
그래서 나온 결과는.
“...두 줄이면 뭐지?”
아침부터 화장실에 틀어박힌 혜준은 테스트기 설명서를 다시 읽었다. 한 줄이면 비임신. 두 줄이면 임신. 심플한 설명이었다. 두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진정되었다. 차라리 확실한 게 나았다.
둘의 스케쥴 문제로 결혼식은 여섯 달 남았지만 혼인 신고는 이미 했다. (직장 동료들은 모른다.) 문제될 건 없었지만 혜준은 팔짱을 낀 채로 서서 곰곰이 생각했다.
‘이혜준 사무관 결혼했대. 부뚜막에 고양이가 먼저 올라간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야.’
‘뭐, 그 유진한과?’
‘이 사무관. 진짜야? 이 사무관이 애를 가졌다고? 안 그렇게 생겼는데.’
‘자, 다들 일하세요. 다들 하셨고, 앞으로 하실 일인데 왜들 그러십니까. 이혜준 사무관. 신경 쓰지 말아요.’
직장 동료들의 반응이 절로 상상되었다. 그러나 혜준이 걱정하는 쪽은 따로 있었다. 유진이었다. 임신을 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일지. 확실한 건, 지금 당장 미국에서 날아올 게 뻔했다. 유진이 지금 맡은 프로젝트는 백만 달러짜리였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을 나왔다. 혜준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영상 통화를 요청하는 화면이 떴다. 혜준은 요즘 들어 얼굴 안 좋아보인다던 동료들의 말을 떠올렸다. 유진이 보면 뭐든 한 소리 나올 것 같았다.
바로 수신 거부를 눌렀다. 그리고 혜준이 일반 통화로 다시 걸었다. 유진이 바로 받았다. 왜 얼굴 안 보여주냐는 말이 나오기 전에, 혜준은 미리 설명했다.
“아침이라 얼굴이 푸석푸석해요. 말로 해요.”
[그런 거 상관 안 해요. 이혜준 씨는 내 얼굴 안 보고 싶어요?]
“실물이 낫잖아요. 다음 주면 볼 수 있어요.”
혜준의 당근 같은 말에 유진이 잠시 잠잠했다.
[나는 지금 보고 싶은 건데.]
“사람 크게 안 바뀌어요.”
[...혹시 다른 사람과 같이 있어요?]
“장난이어도 불쾌하네요.”
[이혜준.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안 보여주는 거지?]
“그냥 피곤해서 얼굴이 별로예요.”
[많이 안 좋아요?]
“아니오. 일 잘 마무리하고 오세요.”
모닝콜은 살벌하게 끝났다. 통화를 마친 혜준은 그대로 소파에 늘어졌다. 인식하고 나니 몸이 진심으로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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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길어졌다. 덕택에 퇴근도 멀어졌다. 하필 바쁜 시기에 출장을 간 동료 몫까지 일을 처리하느라 혜준은 밥도 못 먹고 일을 처리했다. 굳어버린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미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곧 유진에게서 전화가 올 시간이었다. 조명 좋은 곳에서 전화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눈앞까지 깜깜했다. 혜준은 책상을 붙잡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차 시야가 돌아왔다.
기립성 저혈압인가.
조금 안일한 생각과 함께, 야근을 하는 동료에게 인사를 했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가려 했다. 그러나 혜준의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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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준은 눈을 떴다. 찬찬히 눈을 깜박이며 상황을 판단해보니 병원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혜준이 정신 차린 걸 알고 여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혜준아! 이혜준! 정신 들어? 어떻게 된 거야?”
“어.... 마리야.”
“기재부에서 너 쓰러졌다고 연락 와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비상연락망에 마리 번호를 썼던 게 기억났다. 혜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마리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간호사가 너 임신한 거 같다던데.”
“응?”
“그래서 방사선 검사 같은 거 못했어. 피 검사만 했는데 빈혈이 심하다고. 근데 어떻게 된 거야? 한유진 씨 만나는 거 아니었어?”
“어, 어.”
“그럼 제부의....?”
“응.”
그새 호칭 바꿔 부른 마리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식 날짜 아직 멀었잖아. 한유진 씨도 알아?”
“지금은 너만 알아.”
“왜?”
“미국 갔어. 일 때문에 바쁠 거야. 나중에 말할게.”
“아니, 일보다 자기 새끼가 우선 아냐?”
마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혜준은 마리에게 눈치를 주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유진이었다. 이번에도 영상 통화였다. 혜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원 건물이 혜준의 뒤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수신 거부를 누르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왜 안 받아요?]
“아직 밖이라서요.”
[한국 시간으로 많이 늦은 시간인데.]
“그렇게 됐어요. 이제 퇴근해요.”
[옆에 누구 있어요? 혹시 채이헌?]
“마리 있어요.”
[진마리 씨가 지금 시간에 왜?]
“같이 밥 먹기로 했어요.”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듣고 있던 마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혜준의 핸드폰을 확 빼앗아 들고 소리쳤다.
“혜준이 임신했어요! 빈혈 심해서 응급실 갔다오는 길이니까 영양제 사갖고 오세요!”
고모부 딸 아니랄까봐. 마리는 가끔 이렇게 앞뒤 안 가리고 급발진을 했다. 혜준의 악문 입술 사이로 아이씨, 소리가 절로 나왔다.
혜준은 전화기를 낚아채고 다시 귀에 댔다.
“혹시 걱정할까봐 말 안 했어요. 걱정마시고, 끊을게요.”
유진도 일할 시간이었다. 혜준은 핵심만 말하고 빨리 끊었다. 그리고 사촌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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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정신없이 자고 있던 혜준은 번호키 누르는 소리를 들었다. 시계를 보았다. 유진과 통화를 마친지 정확히 21시간 후였다. (그 통화 이후로 유진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캐리어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을 가로질러 걷는 발걸음 소리. 옷을 소파에 던지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혜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처 방을 다 나가기도 전에, 유진과 문에서 마주쳤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 유진이 서 있었다. 검은 롱코트 안에 선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수트가 보였다. 아마도 출근 준비를 했을, 그러다가 한국으로 바로 직행했을 모습이 그려졌다. 혜준은 이성적으로 상황부터 파악하려 들었다.
“일은 어떻게 했어요?”
“하고 왔어요.”
“그렇게 빨리요? 다음 주에나 온다고.”
“이혜준 때문에 오백만 달러도 날려봤는데.”
이혜준으로 인한 한유진의 실패 역사에 백만 달러가 더해졌다. 혜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혜준.”
화가 난 듯한 목소리와는 달리, 유진은 두 팔을 크게 벌려 혜준을 덮듯이 안았다.
“왜 말 안 했어.”
그의 품에 파묻히고 나서야 감정이 전달되어 왔다. 유진은 화가 난 게 아니라 서운했구나. 혜준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렇게 올까봐요.”
“내게 무엇이 더 긴요한지 아직 몰라요?”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 아니어서. 괜찮았어요.”
“내 실적으로 하고 싶었는데. 공을 넘긴 것뿐이에요. 일 이야기는 그만해요.”
그만하라 해도 혜준이 더 아쉬웠다. 더 말하지 않고 유진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 했다. 그러나 유진은 혜준의 뒤통수와 어깨를 감싸 안고 더 깊이 안았다.
“혜준아.”
“....”
“엄마가. 나를 낳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했는데.”
유진은 중요한 감정을 표현할 때 엄마 이야기를 하곤 했다. 멋없는 말이었지만. 그가 진심으로 행복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다 해줄게.”
“....”
“내가 다 해줄게....”
어느새 누그러진 그의 목소리. 그에게서 전달되는 뜨거운 온도. 흘러넘치는 벅찬 감정. 혜준은 그것들을 느끼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혜준이 좋아하는 평정심과 비슷했지만, 가슴 속도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 안정과 들뜬 설렘이 공존하는 그 분위기를 혜준은 계속 느끼려 애썼다.
부모의 부재로 언제나 혼자 헤쳐나가야 했다. 말 한 마디에 바다를 건너와 걱정하고, 함께 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새삼 가슴 벅차게 느껴졌다. 유진도 그러할까. 바다를 건너는 내내 걱정해야할 이혜준과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행복할까.
부모의 부재로 비슷한 고통을 겪었던 두 사람이었다. 지금도 비슷한 감정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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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들 산전휴직에 대해서 알아봤어요.”
기분 좋게 침대에 누운 혜준의 옆에 걸터앉은 유진이 말을 꺼냈다. 셔츠도 벗지 않은 채 꺼낸 말은 정말 앞서가 있었다. 혜준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일이 많아서 쉴 수 없어요.”
“응급실까지 가 놓고도?”
“그 날 정신이 없어서 밥을 못 먹어서 그래요.”
유진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혜준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그 때는 나도 몰랐어요. 아니까 조심할게요.”
“이혜준이 쉬지 않으면 기재부 일이 늘어날 수도 있는데?”
“왜요?”
“정인은행으로 다시 뒤흔들 수도 있고. 신용등급도. 방법은 많으니까. 바하마를 떠났어도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어요. 그러면 허 부총리가 급해서 이혜준 사무관은 공가 쓰라고 하지 않을까?”
“미친 소리하지 말고요.”
“채이헌한테는 내가 말할까요? 내 여자가 쉬어야할 것 같다고?”
“사양하겠습니다.”
환장할 법한 대화가 오갔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전의 어느 때와는 달리 무겁지 않았다. 결혼식도 앞당겨야 한다며 여전히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유진을 혜준은 천천히 달랬다. 어느 순간 자신의 배 위에 올라온 그의 두툼한 손을 느낀 순간, 혜준은 살포시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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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라도 즐거웠으면 좋겠어.
같이 달려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