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무관 요즘 얼굴이 까칠한데?”
요즘 따라 팀원들이 혜준의 낯빛을 짚었다. 혜준은 그 때마다 단정하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바쁜 시기니까요.”
“누가 보면 이 사무관이 기재부 일 다 하는 줄 알겠어. 쉬어가며 해.”
“네.”
사람들이 뭐라해도 무례하다기보다 으레 할 수 있는 스몰토크 정도로 생각했다. 실제로 혜준은 몸과 마음이 모두 분주했다. 내년도 경제정책방향 때문에 아이디어를 내고, 정책국과 의견을 교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골반뼈 옆 아랫배에 쿡쿡거리는 통증이 있어도, 일로 인한 스트레스성 복통으로 여겼다.
***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캘린더 알림 때문이었다. 생리 주기 시작을 예측하는 어플 알림이 떴다. 그러나 혜준은 생리를 하지 않았다. 매번 주기가 딱딱 맞는 혜준이었다. 이번에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혜준은 피곤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원래도 넓은 집은 어느 때보다 어둡고, 넓은 채로 혜준을 맞이했다. 피로감에 고독함이 덧씌워질 때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유진이었다.
“네.”
반가운 전화였지만 혜준의 목소리는 짧고 담담했다. 혜준의 대답에 핸드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혜준 씨.]
“네.”
[오늘 잘 지냈어요?]
“네.”
[식사는?]
“먹었어요. 지사장님은....”
[아직도 지사장이에요?]
유진이 웃으며 놀려댔다. 사실 혜준은 다정한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았다. ‘허니, 달링’정도는 아니더라도 ‘자기’정도는 부를 수 있는 사이인데도 ‘한유진 씨’, ‘유진 씨’라고 부르지 못했다.
처음 ‘유진 씨’라고 불렀을 때 느낌이 지금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욕정으로 빛나던 유진의 눈빛. 혜준을 내리누르던 무게, 깊숙하게 파고들던 그것, 거친 몸짓과는 반대로 귓가를 간질거리던 섹스 토크까지. ‘유진’이라는 말 한 마디로 몸에 새겨진 그 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평정심을 중요시 여기는 혜준에게는 낯선 느낌이었다.
혜준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요?”
[어느 정도.]
“네.”
[빨리 끝내고 갈게요.]
“네.”
유진은 뉴욕 출장 중이었다. 바하마를 나온 후 제일 좋은 조건을 내건 펀드 매니지먼트에 들어갔다. 스스로 회사를 차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건 혜준 때문이었다. 일에 함몰되어 혜준과의 시간을 뺏기는 건 싫어했다. 그런 유진이 이번만큼은 이주째 미국에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매일 같이 안부 전화는 아침 저녁으로 해왔다. 혜준이 단답을 하든 말든 간에.
[보고 싶어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혜준은 침을 삼켰다. 혜준이 답이 없자 유진이 한 번 더 던졌다.
[love you to the moon and back.]
“...영어 잘 못해요.”
[음. 한국말로....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
그걸 못 알아들을 혜준은 아니었지만 굳이 해석해서 대답할 수 없었다.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데. 피곤해요?]
“조금요.”
[힘 들이지 마요.]
일 안 해도 된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혜준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유진은 보지 못할.
“원래 매년 이맘때 바빠요.”
[내일은 화상 통화해요.]
“네?”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피곤한지 안 피곤한지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말을 돌려봤자 의미 없을 듯했다. 혜준은 그러라고 말하려 했다. 유진의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괜히 혜준의 마음까지 간질거렸다. 잊고 있던 아랫배가 또 쿡쿡 쑤셔왔다.
문득 혜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게 있었다.
갑자기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유진. 미뤄진 생리.
혜준은 핸드폰을 든 채 현관 앞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
둘의 관계는 주로(사실 절대적으로) 유진이 주도했다. 대시를 한 것도 유진이었고, 프로포즈를 한 것도 유진이었다. 결정권은 혜준에게 있었지만 유진은 자기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혜준을 따라다니고 매달렸다.
물론 불을 지른 건 혜준이었다. 유진이 손 한 번 잡으려 들면 부끄러운 혜준이 주먹을 쥐었다.
- 아직 손 잡을 사이가 아니에요.
혜준의 말에 유진은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 사귀면 되잖아요.
그렇게 사귀게 되었다. 생각보다 유진은 다정하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주었다. 결핍을 안고 악착같이 살아남은 남자는 어른 남자로서 어린 여자를 리드할 줄 알았다.
스킨십을 리드한 것도 유진이었다. 호텔 라운지에서 데이트를 하던 날, 와인을 마시던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저 세계 경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유진의 눈빛은 축축했고, 혜준은 온 몸이 눈빛으로 덮인 듯한 착각을 받았다.
하필 장소가 호텔 라운지였다. 혜준이 예스만 외치면 비어 있는 호텔방이 하나쯤은 있을 게 뻔했다. 조여드는 분위기에 혜준은 저도 모르게 선수를 쳤다.
- ...아직 할 사이가 아니에요.
목적어가 빠졌지만 유진은 잘 알아들었다. 이번에도 대답은 같았다.
- 결혼하면 되잖아요.
결혼 안 해도 할 수 있는 행위였지만, 자유를 외치는 국가에서 자란 남자는 상상 외로 보수적인 대답을 내어놓았다.
당황스러운 대답인데도 혜준은 더 이상 벽을 치지 못했다. 유진이 내미는 손을 잡아버렸다. 그 날 비어 있는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거기서 ‘유진 씨’라고 처음 불렀다.
그 다음 날, 조식을 먹을 때 유진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얼굴로 결혼 이야기를 했다. 망설이는(사실 당황스러운) 혜준에게 유진은 집요하게 말해왔다.
- ‘혜준 한’으로 살라고 안 해요. ‘이혜준’을 포기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과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 달라지는 게 없다면 왜 결혼을 해야 하죠?
- 이혜준의 남자로 살고 싶어요.
그는 매번 솔직했다. 역시 미친 새끼였나 싶다가도 그의 리드를 끝까지 반대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아마도 한유진을 좋아해서. 그 이상으로.
- 나한테로 와요.
언젠가 했던 말이었다.
- 이번만큼은.
사양한다는 말은 또다시 듣고 싶지 않다고.
유진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혜준도 거절하지 않았다.
- 그렇게 해요.
담백하다못해 딱딱한 승낙의 말에 유진은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가. 혜준 자신도 모르게 유진을 따라 웃었다.
쇠뿔을 당기듯 유진은 결혼을 진행시켰고, 결혼 날짜까지 잡아버렸다. 그게 두 달 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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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져서 중간에 끊을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