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신기한 구경이었다.

 

[합리적인 추론이에요, 대행님.]

[대행님, 법률자문단 말인데요.]

[대행님은 진정성 있게 다가가고 싶으신 거예요.]

 

순진하다 못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박무진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저 말간 얼굴. 무진은 물론 좋은 사람이었지만 정치판에서 인격이 다 무슨 소용인가. 영진은 이미 알았다. 선의는 이 세계에서 왜곡되고 조롱받을 뿐이라는 걸. 여긴 도덕군자를 세우는 곳이 아니라 프레임을 선점하고 이미지메이킹에 성공하는 자가 이기는 승부처다.

자신이 일거수 일투족이 정치임을 모르는 권한대행에, 그런 무진을 전적으로 따르는 수정까지. 너무 투명해서 위험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영진은 인정할 수 없었다. 한주승 실장이 떠나며 남긴 말을.

 

[자네 옛날에 말이야, 양진만 대통령 처음 만났을 때 모습이 딱 저랬지.]

 

청와대 비서실 사무실. 컵라면에 물을 받으며 주승의 말을 떠올리는 영진. 실장님은 무슨내가 언제 그랬다고. 투덜대며 서류 든 손으로 라면 용기를 옮기는데, 또각또각 들려오는 구두 소리.

돌아보면, 들어오는 수정.

영진, 순간 당황해 허둥댄다. 라면을 놓는데, 아뜨..! 뜨거운 물이 손에 튄다. 그러면서도 서류는 안 놓는. 그 모습에 혀를 차면서도 안쓰러운 수정. 어휴, 하며 영진의 손에 들린 서류를 뺏어 라면 위에 덮는다.

 

수정     먹고 하죠, .

영진     (생각하던 얼굴이 나타나 왠지 들킨 거 같은데)

수정     (영진의 맞은편에 기대 서는) 생색 내시는 건가? 대통령은 유고에 비서실장은 공석이라.. 여기 이 청와대에 제대로 일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래서, 컵라면 하나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이 나 혼자 이렇게 개고생이다?

영진     대행님이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매일 달려드는 윤 대표나 강상구 시장 보면 모르겠습니까?

수정     대행님만의 방법으로, 올곧게 잘 돌파하고 계세요.

영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정치적 선택을 할 줄 모르신단 얘기에요.

수정     정직과 신의가 대행님 정치죠.

영진     정직해서 상 받는 건 보이스카웃 때뿐입니다. 여기서 정직은 약점이고 약점이 드러나면 반드시 공격당하게 돼 있습니다.

수정     (말을 말자.. 라면 위에서 서류를 내린다) 3분 넘기지 마세요. (싱긋 웃고 돌아서는데)

영진     지금 대행님께는 비서실장이 필요합니다.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요.

수정     (되돌아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다 있네요, 우리가? 여기 청와대엔 아무도 대행님 편이 없어요. 누군가 한 명은 대행님을 지지하고 응원해줄 바람막이가 돼줘야죠.

영진     환경부에서 정수정 비서관이 했던 것처럼?

수정     (보는데)

영진     몰랐네요. 자리 욕심 있는지.

수정     (그런 말이 아닌데.. 괜히 오기가 생겨 이죽거린다) 차영진 행정관님 지금, 저 신경쓰시는 거에요? 기분 좋네요?

 

얄미웠다.

대행님의 선의를 늘 계산하고 제동 거는 정치꾼 중의 꾼. 맞는 말만 하는데 그게 너무 칼 같아서 재수없을 정도였다. 어떤 돌발상황에도 재빠른 두뇌 회전을 따라가기 버거운 적도 있었다. 갑작스런 권한대행직에 무진이 우왕좌왕할 때, 예의 그 정중함으로 비수를 꽂았다. 그래도 유능하다는 건부정할 수 없었다.

 

[비서실장직은 차영진 행정관을 임명하기로 했어요.]

 

놀라웠다. 둘은 정반대의 인물인데. 대행님은 그 사람 방식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느새 청와대 생리를 체득한 무진에, 수정은 훌쩍 거리감을 느꼈다. 내가 알던 인간 박무진이 아닌 느낌내가 가장 잘 알고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이 대행님 편이라 믿었는데. 청와대에서 혼자가 된 기분. 저 정치꾼이 더 가까이 무진을 지근거리에서 모신다니 분하고 싫었다. 더 분한 건 그가 실제로 대행님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그래도 축하는 해야겠지. 이제 내 직속상산데.

 

수정     축하해요. 차영진.. 비서실장님. (표정관리 안 되는)

영진     저기, 정수정 씨.

수정     ? (마주 보는)

영진     ……치맥할래요, 같이?

수정     (갑자기? 치맥?)

영진     저기광화문에, 잘하는 데 아는데.

수정     (승진턱이라도 내겠다는 건가? 재수없어..)

영진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아니저녁, 안 먹었으니까. 물어본 거예요.

수정     (싱긋) 싫은데요.

영진     (숨 쉬는 법을 잊은 듯)

수정     이런 날 축하주를 살 만큼 내가 성숙한 인격도 아니고. 위로주 받을 만큼 불쌍해보이는 것도 기분 별로네요.

           나가버리는 수정.

영진     (그런 뜻이 아닌데. 그냥 밥이나 한번.. 근데 나 방금,) 치맥이라 그랬냐? (.. 최악이다)

 

수정이 두고 간 컵라면을 보며 참내.. 하며 웃는 영진.

언제부턴가 수정만 보면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 같다. 정치 풋내기를 물가에 내놓은 것 같아 불안한 건지, 한 실장님 말대로 옛날 내 모습 같아 눈에 밟히는 건지, 사사건건 언쟁을 벌이니 신경 쓰이는 건지. 단둘이 있으면 자꾸 눈치를 살피고 일렁이는 이 마음은 도대체 뭔지.

 

영진이 비서실장이 된 뒤로 아침마다 비서실장실에 배달되는 조간 신문은 수정이 챙겼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얼굴을 보며 주요 일간지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도 정치를 인간적으로,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수정에게 면박 주고 핀잔 주는 시간이 꽤 즐거웠다

아니, 사실 그냥 그 얼굴을 보는 게좋았다.

 

그 즈음 민희경 국정기록 비서관도 근무시간이 무척 재미있어졌다.

 

희경     (. 녹음기를 누르며) 차영진 비서실장. 오늘도 정수정 비서관과 담소 중. 얼굴이 아주 바보 같음. 사랑에 빠진 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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