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1. 공황장애를 앓았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몸 담은 실제의 물리적 공간과 정신 사이에 한 겹 막이 존재했었음

사람들 속에 섞여서 웃고 떠들면서도 언제 공황 발작이 올 지 몰라 혼자 불안 속을 헤매곤 했었는데..

꿈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그렇게 혼자다


2. 길가를 거니는 수 많은 얼굴들이 있지만 도움 받을 수 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그저 배경의 일부로 보인다

번쩍이는 간판, 가로수 정도의 소품으로 느껴진다


2. 날씨는 폭우가 쉴 틈 없이 쏟아지고 나는 우산이 없다


3. 언제나 나는 집을 향해 돌아가고 있다

공황장애를 겪을 때 매일 아침 나의 목표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기였는데,

꿈 속에서 역시 집으로 가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여 있다


4. 마치 중력이 훨씬 더 약한 행성에서 살다 왔다거나,

혹은 나에게만 작용되는 저항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힘을 줘도 앞으로 걸어지질 않는다

나는 집으로 가야 하는데 자꾸만 뒤로 밀려간다


5. 포기하면 안 되는데 죽을 힘을 짜내도 앞으로 가지질 않는다 

뒤로 밀리는 힘에 어느 순간 몸을 싣게 된다

마치 내 등짝이 자석이고 어디선가 나를 끌어당기는 자력이 있는 것 같다


6. 종잇장처럼 하늘하늘 어디론가 폭우를 맞으며 실려간다

길가의 사람들은 모두 검은 우산을 쓰고 일제히 앞으로 걷고 있다

나만 뒤로 실려 날아가고 있어, 하지만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는다

난 멀어지는 사람들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7. 어느새 밤이 드리우고 드디어 나를 뒤로 실어가던 힘이 멈춘다

여전히 미친듯이 비가 쏟아지고 온 몸이 젖어 무겁다


8. 네온싸인들이 지나칠 정도로 번쩍이는데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나만 빼고 모두 검은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간 게 분명하다

나만 영영 집에 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9.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다

비가 오니까 아무도 모를 거야, 하고 몰래 조금만 운다

정말로 이게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는다


10. 분명 조금만 흐느꼈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자 무릎까지 물이 차 있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눈물로 만들어진 수면 위를 때린다


11. 울음을 그치자 수위는 더이상 올라오지 않는다

허리춤까지 차오른 눈물 바다는 시원하지만 춥지 않다

하체가 바다에 잠긴 채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맞는다


12. 지금쯤은 집에 헤엄을 쳐서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집이 어딘지 잘 모르겠다

분명히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집이 없는 지도 모르겠다


13. 갈 집이 없으니 이제 울 이유가 사라졌다

천천히 주저 앉는다

바닷속에 들어간다


14. 더 이상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물 바다 속은 고요하고 캄캄하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서 손가락을 꿈질거려 본다

분명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데 눈 앞엔 어둠 뿐이다


15. 어느 순간 꿈질거릴 손가락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생각 외에 모든 것이 녹아 그림자가 되었다

어두운 바닷속 그림자가 되어 가만히 가만히 일렁인다


-


이 꿈을 일고여덟번에 걸쳐서 나눠 꾸는 중

매번 세찬 비를 맞으면서 군중 속에서 집에 가고 있는데

나중엔 갈 집이 없단 걸 깨닫고

녹아서 그림자가 되곤 해

분투하던 꿈의 초반보다 차라리 그림자가 된 마지막이 편안하더라

아쉽게도 그림자가 되고나면 금방 꿈이 깨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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