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MBC 드라마 <더킹투하츠>
은신 커플 헌정(은시경 X 이재신)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과가 끝나고 시경은 습관처럼 재신의 궁을 찾았다. 정결한 궁내 환경을 위하여 사흘에 한 번 앵무새 목욕을 시키겠다는 핑계가 일주일 째가 되면서 어느덧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잡은 터였다. 공주궁에 들어서면서 다시 근위대 정복의 깃을 매만지던 시경이 재신의 침실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은시경입니다."
"......"
"공주님, 은시경입니다."
"......"
마땅히 들려야 할 인기척이 없어 시경은 다시 한 번 노크를 하며 목소리를 높였으나 역시 대답은 없었다. 시경은 불현듯 불안감을 느끼며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갔다. 어제와도, 그저께와도 같은 풍경이다. 그림 하나, 화병 하나 바뀐 구석이 없다. 이맘 때쯤이면 늘 창밖을 바라보던 공주의 휠체어까지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흠흠."
재신이 등을 지고 앉아 있어 시경은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괜한 헛기침으로 주의를 끌어보려 했으나 재신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또 역정을 내실까 싶어 마음을 졸이면서도 시경은 천천히 휠체어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달뜬 숨을 몰아쉬는 재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요 며칠 잠잠하다 싶었더니 또 앓는다. 불쾌하게도, 매우 익숙한 절망이 그를 뒤덮었다.
"공주님 주치의 모셔와."
부관에게 간단히 용건을 전한 뒤 시경은 휴대전화를 품에 넣고 공주의 목과 허벅지를 들고 안아 올렸다. 평소라면 있는 힘 없는 힘 다 짜내어 완강히 거부할 사람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반박 한 마디 하지 못했다. 게다가 잔뜩 괴로운 표정에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또 같은 악몽을 꾸는 걸로만 보여 시경은 답답해졌다. 총탄으로부터는 지켜줄 수 있어도 악몽은, 그의 영역이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곁에서 온기를 잊지 않도록 손을 붙잡아주는 것 뿐. 판단도 행동도 아무것도 통하지 않아 철저히 무력했다.
"으으.....으..."
하얀 침대에 재신을 뉘인 후 시경은 티테이블의 의자 하나를 가져다 침대 곁에 끌어 앉았다. 수초 간 머뭇거리다 이내 땀에 젖어 뺨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쓸어올려준 후 그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주었다. 어떻게 해야 악몽에서 그녀를 건져낼 수 있을지 몰라 답답하기만 했다. 잠자코 있던 그는 이내 나즈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처음엔 친구처럼, 소중한 연인처럼. 나의 마음에..."
홍대의 한 클럽에서 '품위 없는' 재신을 처음 만난 것도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았다. 성곽에서 별똥별을 보며 노래를 들은 것도 겨우 한 달 전이다. 그런데 삶은 이렇게나 바뀌었다. 재신은 평생 회복할 수 없는 장애를 안게 되었고, 밤엔 늘 악몽에 시달리며 모든 일에 예민해졌다. 그는 그런 재신을 때때로 보좌하며, 곁에 늘 있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채감을 지고, 종종 사고가 있던 그 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날 공주님을 따라 잠깐이라도 합석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선왕 전하도, 공주님도 모두 지금보다는...
"그 노래..."
"공주님!"
"음정까지...기억력 좋네."
재신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졌다. 밝고 청명한 하늘에 흡사 먹구름이 낀 것 같았다. 시경은 생각보다 늦는 주치의로 인해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말씀을 아끼십시오. 공주님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물 한 잔만 줘요."
"아, 그러면."
"아니! 됐어요. 그냥 있어요. 물은 아무래도 좋아."
재신의 손은 땀에 젖어 뜨겁고 축축했고, 그 때문에 시경의 손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시경은 제 손을 붙잡는 재신의 힘 없는 악력에 잠자코 붙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그 날의 악몽은 꽤 지독한 종류여서 재신은 악몽으로 한 번 깨면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곤 했다. 이런 밤이 시경이 아는 것만 해도 벌써 다섯 번째였다.
"그 노랜 참 아쉬워요. 언젠간 꼭 제일 좋은 무대에서 부르고 싶어서 아껴뒀던 건데...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앨범에 실을 걸 그랬어."
"건강을 조금 회복하시면 가능할 겁니다."
"다리 병신 공주 노래까지 한다고 광고할 일 있어요? 됐어요. 말로만 들어도 구역질 나."
냉소적인 그녀의 말에 뭐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경은 하얗게 탈색된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우물쭈물거렸다. 칼같은 재신 앞에 서면 종종 일어나는, 전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은시경 씨가 불러줘요. 듣고 싶어. 그런데 보기보다 노랠 잘 하네요?"
"예?"
"듣기 좋다구."
"아...예."
시경은 다소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끊어진 소절부터 천천히 노래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긴장한 나머지 노래가 영 딱딱했다. 사실 시경은 제 입에서 나오는 게 노래인지 애국가인지도 구별할 정신이 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처음도 아닌데, 예컨대 WOC 훈련 때 조원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군가를 부르듯 정확히 딱 떨어지는 노래에 재신은 웃음을 참지 않고 연거푸 터뜨렸다.
"원래 칭찬에 약한 타입인가봐요? 아깐 잘 하더니."
"아닙니다."
시경의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투과되어 드러났다. 재신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열이 나서 좀 정신이 없고...시야가 흐릿하긴 하지만, 귀는 잘 들려요."
"예."
"은시경 씨 노래 좋다는 거 진심이라구요."
"...예."
"그리고......이렇게 가끔 밤에 곁에 있어주는 것도 고맙구."
"......"
"나 요즘 밤엔 좀 무서워. 그런데 은시경 씨가 있으면, 그냥 좋아요. 노래 안 불러도요."
뜸을 들이다 이은 재신의 말에 시경은 대답 대신 재신의 이불을 더욱 꼼꼼히 여며주었다. 재신은 그런 시경의 행동에 말없이 손을 더욱 꾹 쥐었다.
"곁에 있어요."
"곧 주치의 선생님께서 오실 겁니다. 괜찮아 지실 겁니다."
"주치의 말고 은시경 씨 말하는 거예요 난."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시경은 얼치기 같았던 제 대답을 금새 후회했다. 그리고 주저하다 좀전부터 거슬리던 재신의 눈을 찌르는 머리칼 몇 올을 다시 넘겨주며 대답했다.
"그럼요. 여기 있겠습니다."
파리한 재신의 입가에 조그만 미소가 번졌다. 시경은 이런 병약한 웃음이라도,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엄청 오래전이지만 처음으로 미친듯이 앓이하게 만들었던 은신커플의 아주 짧은 뒷얘기야! 써놓고 나 혼자 가~~~~끔 읽던 건데 혹시나 은신 추억하는 톨 있으면 조금이나마 반가웠음 해서 올려왔어*_*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