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연애
책상에 올려놓았던 혜준의 핸드폰이 진동하고 혜준은 액정에 뜬 이름을 한 번 보고 반사적으로 모니터 아래의 시각을 확인한다. 아직 전화하기엔 이른 시각이다. 모니터 하단의 시각에서 14를 금방 뺀 혜준은 핸드폰을 충전 케이블과 분리하여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다른 사람들은 그런 혜준을 더러는 쳐다보기도 하고, 더러는 익숙하다는 듯 신경 쓰지 않는다.
사무실 밖으로 나온 혜준이 복도를 한 번 두리번거리고는 전화를 받는다.
사무실 밖으로 나온 혜준이 복도를 한 번 두리번거리고는 전화를 받는다.
"네."
'무슨 일 있어요?'
"네?"
서툰 한국어 발음은 한국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환경에 가서 더 어눌해졌는지 아니면 전화라는 매개체 탓인지 오늘따라 더욱 낯설게 들린다. 휴게장소를 향해 걷던 혜준이 걸음을 멈추자 다시 핸드폰 너머의 남자가 말했다.
'전화를 늦게 받아서.'
"아니요. 너무 일찍 전화해서 그랬어요. 나야말로... 무슨 일 있나 하고."
아니요, 없어요. 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즐겁게 들려 혜준은 입꼬리를 조금 올린다. 군데군데 불 켜진 사무실을 지나 혜준의 슬리퍼가 느릿하게 휴게실을 향한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온 휴게실은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져 혜준이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다행히 안에 있던 사람이 혜준을 눈치챈 듯 커다란 텀블러를 들고나온다.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간 채로 혜준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상대도 혜준에게 눈인사하며 혜준의 핸드폰을 슬쩍 바라본다. 공무원 사회가 좁고 소문이 빠르다는 건 이쪽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 안다. 그 말인즉슨 혜준이 야근을 하는 날이면 일정한 시각에 걸려오는 전화가 있다는 것과 전화를 거는 상대가 누구라는 걸 다들 안다는 얘기다. 요란한 연애 같은 건 한 번도 꿈꾸지 않았는데, 너무 요란한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을 하는 혜준이다.
아무도 없는 휴게실 의자에서 다리를 쭉 뻗은 혜준이 핸드폰 너머 유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도 없는 휴게실 의자에서 다리를 쭉 뻗은 혜준이 핸드폰 너머 유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내 얘기 안 들었죠?'
"휴게실에 사람이 있어서요."
남들 앞에서 굳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혜준을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구는 유진이지만 오늘은 그를 이해한 듯 가볍게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만 내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지금 워싱턴이에요.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오늘 나를 기다리게 하는 걸 보면 내 돈이 필요하지 않은가 봐요. 다들 복권에라도 당첨된 건가.'
여전히 돈을 기준으로 삼는 유진의 말에 혜준이 쓴웃음을 짓는다. 내내 책상 아래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펴고 발을 꼼지락거리며 혜준은 유진이 자기를 기다리게 한다며 투덜대는 걸 듣는다. 유진이 말하는 것들을 들으며 혜준은 그가 사소함을 나눌 대상이 필요했다는 걸 느낀다.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그것을 도구로 삼지 않는 상대가. 유진이 혜준에게 말하는 것을 혜준은 약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진을 배신하거나 이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유진은 혜준을 사랑했고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것들을 혜준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유진의 질문에 혜준이 슬리퍼로 바닥을 문지른다. 혜준 역시 자기가 느끼는 것을 남과 나누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특히나 유진 한, 이 남자를 상대로라면 어디까지 보여줘야 할지, 어느 선까지 다가가면 될지 혜준은 아직도 그 경계를 정하지 못했다. 유진은 혜준에게 다 말해달라고 하지만 혜준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혼자서 감당하던 때문이기도 하고, 또... 유진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가 혜준에게 처음이라서만은 아니다. 처음이 아니었더라도 혜준은 마찬가지였을 거다. 혜준은 가능하면 오래 유진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다. 어쩌면 유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나는 늘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 다 당신과 나누고 싶어요. 이혜준씨, 당신도 좀 그래 주면 좋겠는데.'
유진의 말에도 혜준이 쉽사리 얘기를 꺼내지 못하자 유진은 대화의 방법을 조금 바꾼다.
'오늘 어땠어요?'
"그냥... 똑같았어요. 일하고, 밥 먹고, 지금은 야근하고..."
'그리고?'
유진의 질문에 혜준이 입술을 핥고 바지를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하루를 반추하다 혜준은 낮에 사무실서 들은 이야기를 꺼낸다.
"청사 근처에 유명한 케이크 집이 있는데, 거기 샌드위치도 맛있다고 하더라구요."
'가봤어요?'
"아니요. 늘 사람이 많아서..."
아아. 유진이 가볍게 대꾸하고 혜준은 말을 잇는다. 유진의 간투사는 영어 같기도 하고 한국어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가 살아온 시간처럼. 그리고 유진도 혜준과 대화할 때 딱히 그를 의식하고 내뱉는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주말에는 안 한다고 하더라구요."
'왜요?'
"여긴 주말엔 사람이 없으니까요. 다들 집에 가서."
집? 아. 유진이 혼자 이해한 듯 감탄사를 내뱉고는 혜준에게 말한다.
'그럼 언제 가볼 거예요? 거기.'
"글쎄요. 가려면 점심에 좀 일찍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요즘에 좀 바빠서요."
'나중에 나랑 같이 가요.'
"네?"
'휴가 내서 한 번 갈게요.'
"아니,"
말을 하려다 말고 혜준은 입을 다문다.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혼자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며 혜준은 반사적으로 터져나간 말이 아니라 그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생각한다. 휴게실엔 아무도 없고 유진은 혜준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데도 말하기가 쉽지 않다. 얼굴을 보고 말하는 건 더 어려울 것 같지만 한편으론 쉬울 것도 같다. 유진은 혜준의 비언어적 표현을 모두 다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이혜준씨? 혜준이 말을 하다 말고 멈추자 유진이 혜준을 불렀고 혜준이 내내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아주었다.
'누구 왔어요? 전화 끊을까요?'
"아뇨, 아니요..."
혜준이 고개를 저었고 머리카락이 흩어져 혜준의 시야를 가렸다. 혜준은 소리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저기..."
말해요. 핸드폰 너머 들리는 유진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혜준은 그 다정함에 기대 용기를 내본다. 아직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더 솔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올 때 연락해요."
핸드폰 너머로 유진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혜준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얼굴이 화끈거려 사무실에는 조금 있다가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