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하여간 곧 헐린다는데도 꼬박꼬박”
바람을 막기엔 한참은 모자란 철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마저도 문이 아귀가 안 맞아 온전히 열리지도 않는다. “뭐 문이 이래?” 남자는 투덜대면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그 손길이 거칠었다. “추워요 문닫아요.” 여자는 노인의 팔에서 주사바늘을 뽑으며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여자는 바닥에 늘어놓은 기구들을 가방에 챙겨 일어섰다. 노인에게 인사하고 막 들어오려는 남자를 밖으로 밀쳤다. 남자는 밀려나며 짧게 욕지거리를 했다. 쌀쌀한 날씨에 두꺼운 패딩을 입은 남자는 그러나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남자가 슬리퍼를 찍찍 끌며 뒤로 물러났다.
“고만 좀 와요. 의사양반.” 남자가 인상을 쓰면서 담배곽을 손바닥에 탁탁 내려쳤다.
“월급쟁이가 일하는데 댁 허락 받아야 돼요?” 여자는 작은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남자가 기막히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니, 저 사람들 다 불법거주민이야. 그거 당신 몰라? 무슨 병원이 불법 저지르는 사람들 상대로 의료봉사를 해?”
“그쪽 입에서 법이라니 참 믿음이 가네요.” 여자가 비아냥 거리자 남자는 부러 철문을 쾅쾅쾅 주먹으로 내리쳤다. “할머니! 집 비워 응? 할머니까지 다 쓸어버리기 전에!” 남자가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언덕을 내려갔다. 찌익 찌익 슬리퍼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어기적 어기적 팔자로 걷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여자는 피다만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겼다.

경기도 외곽에 있는, 지방이라고 하기도 뭐한 작은 동네였다. 재개발로 큰 병원에 영화관, 백화점까지 들어섰지만 아직도 10년 전 그대로인 그곳은 그러나 역시 곧 사라질 터였다. 허술하게 세워진 집들과 촘촘히 모여있는 다세대 주택들 중에 남아있는 사람은 이제 힘없고 갈 곳 없는 노인들뿐이었다. 여자는 그러한 사람들을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하여 건강을 체크하고 영양제를 놔주었다. 병원에서 명한 봉사라고는 했지만 사실 여자가 영양제 값까지 부담하며 자발적으로 하는 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는 항상 언덕 위에 있는 다세대주택을 마지막으로 들렀다. 시내에서 가장 외진 방향, 가장 높은 언덕위에있는 다세대 주택은 아마 헐리더라도 마지막으로 헐릴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3층짜리 건물 2,3층엔 이제 아무도 살지 않았고 1층에 나란히 붙어있는 철문 중 한곳에만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한 분 살고 계셨다. 여자는 그 분을 마지막으로 진료하고 나와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그날의 ‘봉사’를 마쳤다. 매주 수요일 여자가 봉사하는 날 여자는 항상 그 집에서 그 남자를 마주쳤다. 남자를 건달이라고 노인들은 말했지만 남자의 방문을 환대하는 노인도 있었다. 남자는 문을 위협적으로 치거나 소리를 지르며 집을 비우라고 하면서도 나갈 때 꼭 문을 닫고 나갔다. 아귀가 맞지 않아 너덜거리는 철문을 여러 번 열었다 닫았다 하며 아귀를 맞춰놓곤 했다. 남자는 노인들을 ‘협박’하러 올 때마다 마주치는 의사가 불편해, 여자의 방문 시간을 피해보려 했지만 결국은 그 집 앞에서 꼭 마주치게 되었다.
언덕을 올라오다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자를 보고 남자는 작게 욕지거리를 했다. “또 왔네요.” 여자의 무심한 인사에 대꾸도 없이 철문을 쾅쾅쾅 두드린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 다음주까지 집 비워요 네? 안 그럼 내가 확 들어앉아 버릴 라니까.”
“할머니 안 계세요.” 여자가 말했다.
“진작 말하든가.” 남자는 문을 치던 손을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
“담배한대 필래요?’ 여자가 내민 담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자는 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담배곽을 손바닥에 탁탁 치고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나한테 관심 있어요?” 남자가 여자를 보지 않고 얘기하자 여자가 피식 웃었다. “근데 왜 자꾸 꼬셔요.”
“꼬시면 넘어와요?”
“아니요.” 남자는 여자의 옆에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웠다. 침묵 끝에 남자가 타이르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 와요. 여기. 어차피 저 사람들 다 나가야 되고 나중에 나가면 한 푼도 못 받아요 진짜. 그쪽이 자꾸 왔다 갔다 하니까 노인네들이 괜찮은줄알고 안뜨는거 아니야? 거주지 옮기면 그때 봉사를 하든가 말든가 그건 내 알바 아니고.”
여자가 허공을 쳐다보며 얘기하는 남자 앞에 마주보고 섰다. 남자는 흠칫 놀라 한걸음 물러났다.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요. 깡패새끼가. “ 이번엔 여자가 바닥에 침을 탁 뱉고 언덕을 내려갔다. 침을 뱉는 폼이 영 어색하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거기 깡패들 들락거린다며?” 자판기 앞에서 막 커피를 꺼내려고 허리를 숙이는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불쑥 물었다. 여자는 막 꺼낸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담도 크다. 여자애가.”
“여자 애라뇨 선배. 그리고 그런 사람들 하나도 안 무서워요.”
“참. 대단하다. 너 정도면 오라는 병원도 많은데 왜 이런 시골병원 와서 그런 꼴 당하고 그러냐?”
“꼴을 뭔 꼴을 당해 내가. 그리고 이 동네 괜찮거든?”
여자가 쏘아붙이고 뒤돌아 가자 선배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여자를 따랐다. ‘아 너 여기 출신이랬나?’

막 진료를 마친 여자가 나란히 붙은 철문을 바라봤다. 지금처럼 문이 뒤틀리진 않았어도 낡아서 열고 닫을 때 마다 큰소리가 났었다. 그래서 옆집에 사람이 나고 드는걸 알 수 있었다. 비어있던 옆집에 고등학생 언니와 제 또래의 남자아이가 이사온건 여자가 딱 10살되던 해였다. 옆집 언니는 여자가 평소처럼 두들겨 맞고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나갈 때 문 앞에 서있었다. 여자에게 소주 한 병을 건네며 아버지에게 전해주고 제 집으로 오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치료라는걸 받으면서 여자는 또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꼈다. 그래 봐야 연고와 반창고가 전부인 치료였다. 그 후로 여자의 피신은 계속되었다. 밤에 일을 했던 언니 대신에 여자의 치료를 맡은 건 제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서툰 동작으로 연고를 퍽퍽 바르던 손길은 금방 능숙해 졌다. 여자가 빈집을 바라보며 막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구둣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의사양반 비켜요.” 덩치가 큰 40대 중반쯤의 남자였다. 남자는 문 앞을 막아선 여자를 향해 위협적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편찮으시다니까. 꺼져요.” 여자가 담배를 입가로 가져가자 남자는 그 손을 확 잡아챘다. “이게 미쳤나.” 순식간에 여자는 바닥을 뒹굴었다. 여자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얼굴가죽이 벗겨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 남자다. 여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남자의 목소리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몸에 힘이 빠졌다. 여자가 고개를 들자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형님이라는 그 사람과 여자 사이를 가로막고 서있는 남자는 또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너 이 새끼. 노인네들 하나 못 쫓아내서 내가 여기까지 와야 돼? 일을. 줬으면. 응? 기회를. 줬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시발. 제대로. 해야. 될 거. 아냐! 이 새끼가 빠져서. ” 살과 살이 마주치는 소름 돋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형님이라는 사람이 말을 멈출 때마다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가 마치 용수철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자가 피식 웃자 다시 여자에게 달려드는 형님이라는 사람을 남자가 가까스로 막아 섰다. ‘죄송합니다. 해결하겠습니다.’ 남자는 앵무새처럼 되풀이 했다. 

“남 쳐맞는거 보고 웃고, 배운 사람들이 더 한다고.”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 옆에 남자가 쪼그리고 앉았다. 담배 한대를 여자에게 건네고, 여자가 입에 물자 불을 붙여줬다. 남자에겐 습관적인 반응일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
“그쪽은 생각보다 지위가 낮네요? 그쪽에서 오래 굴렀으면 한자리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욕심 없는 타입이라 내가.” 아무렇게나 내뱉으면서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핀 남자가 마른 침을 삼켰다. 무슨 말을 참는 것 같았다.
“할말 있음 해요.”
“보기 싫어요.”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뭐가요.”
“그쪽. 그만 와요. 진짜 죽겠으니까.”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안한데, 싫어요.” 꽤 큰소리로 말했는데.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언덕을 내려갔다. 여자는 일어서려다가 힘이 빠져 그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환자들 사이에서 원래 평판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무뚝뚝하고 동정심 없는 얼굴로 얘기하는 의사를 좋아하는 환자는 아무도 없었다. 얼굴이 진창이 되어 병원에 돌아왔을 때 ‘싸가지 없는 의사가 어디서 맞고 왔다.’는 다소 틀린 얘기가 아닌 소문이 돌았다. 여자의 선배는 여자보다 더 흥분해서 여자의 봉사활동을 도시락 싸 들고 말리겠다고 선언했다.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여자는 한동안 그 동네에 발길을 끊었다. ‘진짜 죽겠으니까.’ 꾹꾹 눌러 겨우 말을 뱉던 남자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남자는 처음 여자를 보고 어떻게든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모양이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남자는 언제나 그랬듯 금방 포기했다. 여자는 물러설 생각은 없었지만 남자에게 숨쉴 기회를 주고 싶었다.
콜을 듣고 로비로 나갔을 때 남자는 여자의 선배에게 멱살이 잡혀 있었다. 간호사는 남자가 데려온 할머니 온몸에 타박상이 있다고 보고했다.
“의사한테 손대고!! 노인한테 손대고 이 새끼가!!” 천성이 올곧고 불의를 못 참는 선배는 과도하게 흥분한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지가 때렸으면, 병원에 데리고 오겠어요?” 여자가 끼어들었다. 남자는 찢어진 한쪽 슬리퍼를 손에 들고 있었고, 발은 흙투성이였다. 여자가 환자용 슬리퍼를 남자의 발 밑에 툭 던졌다. 선배는 계속 씩씩댔다. “너 때린 새끼지?”
“아니요. 선배 좀 모르면.” 여자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간호사들은 구경꾼들을 흩으러 놓느라고 애를 먹었다. “영웅놀이 해요?” 여자는 선배에게 툭 뱉고는 남자에게 턱짓했다. “따라와요.”
“선배한테 말 꼬라지가. 선배가 가만히 있어요?” 발바닥에 여기저기 찔리고 쓸린 데가 있었다. 그냥 소독만 하면 되는 정도여서 여자는 대충 소독약을 넓게 발랐다. 남자가 움찔거렸다.
“나 원래 싸가지 없어요.”
“원래 아닌데.”
남자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연고를 바르던 여자가 남자를 쳐다봤다.
“이제 좀 아는 척 할 생각이 생겼어요?”
“아니요.” 남자가 얼른 말했다. 여자는 상처부위에 연고를 바르던 솜 뭉치를 꾹 눌렀다. 아플 텐데도,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재개발이었다. 노인들이 다쳤고, 동네에 소란이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 되었다. 겁을 먹은 남은 노인들은 울며겨자먹기로 동네를 떠났다. 기다렸단 듯이 촘촘한 집들 사이로 철근과 하얀 천막이 둘러졌다. 여자가 언덕 위에 달했을 때 천막이 낡은 철문 두 개가 나란히 있던 그곳의 풍경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자는 습관처럼 담배를 물었다.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살았던 집이다. 기억할 수 있는 어린 나이부터 밤낮없이 두들겨 맞았던 끔찍하고 구질구질한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여자는 후원을 받기 위해 단상에 동물원 원숭이처럼 섰던 일을 기억했다. 아버지의 폭력과 경제적 궁곤함. 여자는 생리대를 살 돈이 없었다는 말을 일부러 꺼냈다. 매일 상처를 달고 학교에 갔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여자의 피난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더. 더 불쌍해 보여야 했으므로. 여자는 이야기를 하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어른들은 동정의 눈길로 휴지를 건네줬다. 하지만 여자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그런 구질구질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정말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 이었다.
막 돌아서려는데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남자가 언덕을 올라왔다. 여자를 발견한 남자는 좀 놀란 눈치였다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간 남자를 여자는 기다렸다.
“막 들어가도 돼요?” 한참 있다 천막에서 나오는 남자를 보고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대꾸 없이 담배곽을 꺼냈다.
“여기 다 헐리고 건물 새로 들어오면, 오래 전에 떠났던 사람은 어떻게 돌아오죠?”
남자는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고는 빈 담배곽을 구겨 힘껏 땅바닥에 던졌다. 여자를 바라본 남자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뭐 볼거있다고 들락거려요?”
“개인적인 일이에요.”
“여기 곧 헐려요. 안보여요?”
“헐리기 전에 보러온거에요. 그쪽은 아니에요?”
남자는 기가막힌듯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작게 욕지거리를 내 뱉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라이터는 번번이 불꽃만 만들고는 사그라들었다. 여자가 지포 라이터를 건네자 남자는 담배를 두 동강 내어서 바닥에 버렸다.
“언니 기다려요?” 여자가 라이터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안 돌아와! 안 돌아온다고. 정상적인 사람이면. 넌 대체 왜 돌아왔어? 여기. 좆 같은 이 동네 뭐 있다고?”
“나한텐 좋은 기억이 더 많아.” 소리치는 남자 앞에 여자가 몸을 움찔하자 남자는 습관적으로 여자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웃기고 있네.” 남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얼굴은 한껏 굳은 채 였다. 남자의 손이 추리닝 주머니 근처를 배회했다. 초조해 보였다. “언니 기다리는 거지?” 여자가 묻자 남자가 참지 못하고 여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한번 만 더 아는척해.” 남자가 낮게 얘기했다. 여자는 습관적으로 몸을 떨었다. 두렵지 않은데,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남자는 바들바들 떠는 여자에게서 떠밀린 것처럼 화들짝 떨어졌다. “씨발.” 남자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씨발.”
“안 어울린다 너. 깡패새끼랑.”
“너 제발. 우리 제발 보지말자. 괴롭다. 쪽팔리고, 시발 내가 너무 쪽팔리고 그래서 너 보면 기분이 좆같아. 진짜. 응?” 남자가 애원하듯 말했다.
“싫어.” 여자가 울먹였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고 너무 오랫동안 후회했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끝까지 놓지 말고 옆에 있을걸 그랬다고. 여자는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럼 내가 꺼지면 되겠어?”
“싫어.”
“그래 꺼질게. 여기서 백년만년 살던가 시발. 니 맘 대로해.”
“싫어. 개새끼야 싫어!!” 여자가 언덕을 내려가려는 남자를 붙잡았지만 남자는 뿌리쳤다. 여기 다시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저를 모른 척 하는 사람한테 계속 말을 걸고 틈을 찾는 게 여자한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그 흔한 친구도 없던 여자한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여자는 그 모든 게 한 순간에 다시 수포로 돌아간다는 게 두려우면서도 섣불리 남자를 다시 잡지 못했다. 거칠게 바닥에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멀어지는데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커져서 여자의 귀를 할퀴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였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여자와 남자가 닿기 위해 여자만 다가갈 수는 없는 거였다. 여자는 주저앉아 울었다. 남자가 제 울음소리에 다시 돌아와 주길 바라면서. 눈물을 닦아주고, 여자의 상처를 치료해주길, 언제나 처럼 그래 주길 바라면서. 해가 지면서 흰 천막에 쌓인 건물에 그늘이 졌다. 까맣게. 여자의 사방은 꼭 절벽처럼 보였다. 

 

 

- 과거 이야기

 

 

진우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방학 동안 키가 훌쩍 컸다. 체격이 워낙 작은 편인 채영과 쭉 비슷한 키였는데 6학년때 좀 크는 것 같더니 겨울이 지나니 채영과 꽤 차이가 났다. 진우의 누나는 교복을 맞추러 갔을 때 더 큰 걸로 맞춰야 한다며 진우와 실랑이를 벌였다. “너 3학년때까지 입어야 돼” “이상해. 야 한채영 나 이상하지?” 진우가 헐렁한 교복을 입고 채영앞에 섰다. 좀 창피한지 뒷목을 만졌다. “아냐 금방 맞을 거야.” 채영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누나와의 실랑이가 끝났다. 반면 별로 크지 않게 맞춘 채영의 교복은 3학년때까지 입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채영은 생각했다. 진우처럼 갑자기 키가 클 자신의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너 이년 돈 어디서 나서 이런 거 해쳐입어?” 술을 잔뜩 먹고 온 채영의 아버지는 채영의 교복을 보고 버럭 화를 냈다. 자다가 화들짝 놀란 채영은 비몽사몽 한 상태로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 다녔다. 새벽 3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동네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채영은 애원했다. “조용히. 제발 조용히 때려요.”

채영은 교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자고 있는 아버지 몰래 안방에 가서 거울에도 비춰보았다. 몸을 양 옆으로 흔들 때마다 주름진 치마가 예쁘게 흩날렸다가 차분해졌다. 채영은 가방에서 진우네 누나가 준 쓰다만 립스틱을 발랐다가 얼른 지웠다.
“너네 아버지 점점 멍청해 지는 것 같다.” 채영이 문밖으로 나오자 진우가 몸을 바싹 붙여오며 그랬다. “전엔 얼굴은 안 때리더니.” 진우는 채영의 앞을 막아서고 가방에서 파우더를 꺼내 채영의 얼굴에 발랐다. “할 줄은 아는 거야?” 채영이 불안하게 물었다. “누나 보면 이렇게 하던데.” 진우가 퍽퍽 거칠게 채영의 얼굴에 분을 눌러 발랐다. 채영은 터진 상처부분이 쓰려서 찡그리면서도 진우를 믿어보기로 했다.

여전히 등교는 진우와 함께 했지만 하교는 그렇지 않은 날이 늘었다. 진우는 학교가 끝나면 남자아이들과 게임 방에 가거나 축구를 했다. 채영은 여자아이들의 눈빛도 달라졌다고 느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여자애들한테 인기 있는 편은 아니었는데, 진우가 점심시간에 채영의 자리로 올 때마다 여자아이들은 조용히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채영은 둘의 대화를 누군가 들으면 창피할 것 같았다.
“누나가 너도 급식 신청하래.” 책상에 턱을 괴고 쭈그려 앉은 진우가 볼펜으로 채영의 노트에 낙서를 하면서 말했다. “나 점심 안 먹어도 돼.” 채영은 누가 들을 까봐 무서워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진우가 눈을 들어 채영을 봤다. “왜?” 같이 목소리를 낮추면서 “무슨 일 있어?” 한다. 남자애들은 나이가 들수록 눈치가 없어지는 것 같다고 채영은 생각했다. [그리고 너도 우리 반 오지마.] 채영은 진우에게 볼펜을 뺏어 공책 모퉁이에 이렇게 적었다. 진우는 한동안 멍하니 공책을 바라보다가 볼펜으로 찍찍 글자 위를 그었다. “싫어. 아무튼 너 급식 신청할거야.” 진우는 교실을 나가며 큰소리로 얘기했다. 채영은 그만 책상에 고개를 묻고 말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청소를 끝내고 아이들이 교실을 나설 때 채영은 자리에 엎드렸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려 했는데 눈을 떴을 땐 창 밖이 어둑어둑했다. 채영은 얼른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불빛이 훤한 버스정류장에 학원을 마친 아이들이 슬금슬금 채영을 곁눈질로 보았다. 채영이 영문도 모르고 안절부절 할 때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팔꿈치를 툭 쳤다. “야. 너 생리 묻었다.” 짧은 머리를 한 여자애였다. 채영은 그 애를 멍하니 쳐다봤다. 여자애는 우습다는 듯 “생리 묻었다고.” 한번 더 말하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채영은 그때까지도 얼떨떨한 채 서있었다. 검붉은 피가 치마까지 번져있었다. 아주 붉은 피는 아니었지만 밝은 조명에서 본다면 누구나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였다. 채영은 얼른 안방으로 가 아버지의 자켓과 서랍을 뒤졌지만 십원한장 찾을 수 없었다. 진우네 집 문을 두드렸는데 진우도 진우의 누나도 집에 없는 것 같았다. 채영은 진우네 집과 채영의 집 사이에 쭈그려 앉았다. 몸도 무겁고 피곤했고 서러웠다.
“여기서 뭐해?” 채영의 앞에 진우가 쭈그려 앉았다. 축구를 하고 왔는지 진우에게 쾌쾌한 땀냄새가 났다. 채영은 진우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진우가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닐 동안 채영은 가지고 온 속옷과 바지를 붙잡고 화장실 앞에 서있었다. 진우가 누나의 서랍에서 생리대 몇 개를 꺼내왔다. 크기가 제각각 이었다. 진우는 채영에게 모두 건네며 멋쩍게 웃었다. “여러 갠데?” 채영은 일단 다 받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첫 월경이었다. 다음날 집에 왔을 때 진우의 누나가 출근길에 들러 생리용 속옷이며 생리대 그리고 진통제가 든 쇼핑백을 건넸을 때 채영은 또 울고 말았다. 진우는 옆에서 뻘쭘한지 자꾸만 제 누나의 등을 밀었다. “늦겠다 얼른 가.” 누나가 가고 둘은 문 앞에 서있다가 어색하게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 채영은 진우와 어색한 게 어색하다고 생각하며 아버지가 볼 수 없도록 쇼핑백을 꽁꽁 숨겨놓았다.

진우는 그 날 이후 채영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사람처럼 굴었다. 두 사람이 중학교에 가면서 진우의 누나는 이른 저녁에 나가 늦은 아침에 들어오곤 했다. 특히 채영과는 마주칠 일이 많이 없었으므로 진우까지 집에 늦게 가면 채영은 꼼짝없이 제 집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진우는 친구들로부터 집이 엄하다느니 범생이라느니 하는 얘기를 들었다. 점심시간에도 진우는 제 친구들과 떨어져 채영과 급식을 먹었다. 아이들은 두 사람을 의식했고 채영은 그것이 신경 쓰였지만 진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결국 두 사람이 학교의 공식커플로 명명되면서 아이들의 놀림거리나 혹은 은근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도 진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채영은 딱히 아는 친구들이 없었으므로 마땅히 해명할 곳도 없었는데, 진우는 친구들의 ‘네 여자친구 지나간다’ 소리를 들어도 그냥 웃고 말았다. 진우는 애들이 뭐라 하던 자주 채영의 반에 먹을 것을 두고 가거나, 날씨가 추우면 교실 앞 문으로 채영을 향해 자켓을 던지고 사라지기도 했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복도를 걸어가던 진우가 막 진우를 지나치려던 채영을 붙들었다. “인사도 안하고.” 생글생글 웃는 진우에게 채영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빠르게 말했다. “아는척좀 하지마.” 진우는 그런 채영이 괘씸해 체육복 상의를 채영에게 건네며 말했다. “집에다 좀 갖다 놔줘. 오늘 늦게 감.” 그런 진우 뒤로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채영은 죽을상을 하면서도 진우의 체육복 상의를 들고 교실로 들어왔다. 졸업하기 전까지 이어진 그러한 소문과 아이들의 놀림이 채영은 조금 싫었지만 그래도 진우덕에 학교생활이 그럭저럭 즐거울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너는 뭐냐? 너도 이지현 동생이냐?”
학교에서 온 채영은 집 앞에 덩치 큰 남자들을 맞닥뜨렸다. 채영은 의아했다. 그도그럴것이 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굳이 이곳까지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채영이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못할 때 진우가 남자와 채영 사이를 막아 섰다. “옆집애 예요.” “친하냐?” “안 친해요.” 진우는 손으로 채영을 밀었다. 채영은 얼떨결에 얼른 집안으로 들어왔다.
‘도망갔다.’ 고 진우는 조용히 말했다. ‘그 년이 빚을 잔뜩 지고, 남자랑 눈이 맞아 너 버리고 도망갔다’ 그렇게 그 사람들이 말했다고 했다. ‘그러니 빚은 네가 갚아야지.’ 진우는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풀이 했다. 그러나 채영은 그게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우 또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누나가 돌아오지 않는 한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진우는 형체도 모르는 빚을 갚기 위해 밤이면 술집에 가서 설거지며 삐끼일을 했다. 막 고1 여름방학이 끝났을 때였다. 같이 일하는 형들은 네가 여자였다면 훨씬 더 빨리 돈을 갚을 수 있었을 거라고, 재미있는 얘기를 하듯 지껄였다. 그러면 진우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누나에 대한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원망이 뒤섞였다. 채영과 다르게 진우는 이상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에야 생각해보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언젠가는 언덕 위 구린 집을 떠나 괜찮은 직장을 얻고, 탄탄한 가족을 꾸릴 수도 있을 거라는, 그런 이상한 꿈. 진우는 제 삶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진우를 짓눌렀던 것은 채영에 관한 생각이었다. 진우의 세계는 항상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음지와 양지. 양지는 희망이 있는 곳이다. 어렸을 적 벽 하나를 두고 채영은 음지에, 저와 누나는 양지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채영의 손을 잡고 힘껏 당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 진우는 음지에 쳐 박혔다. 채영은 적어도 이곳을 떠날 수 있는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채영은 이제 혼자 양지에 있다. 적어도 진우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제가 손을 내민다면, 진우의 힘이 더 세서 채영마저 음지에 쳐 박혀 버릴까 봐, 그게 두려웠다.
반면 채영의 세계는 그 낡은 다세대 주택의 1층이었다. 친척도 친구도 없는 채영은 그 장소를 자신이 떠날 수 있다고, 떠나고 싶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어렸을 적 아빠의 매를 피해 집 구석 어딘가에 몸을 숨기는 게 전부였던 채영에게 진우는 머물고 싶은, 머물러야 할 채영의 세계였다. 세계 그 자체였다.

갑작스런 변화 앞에 채영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채영은 진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항상 먼저 다가오는 것은 진우였기에, 기다리면 결국 진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 이진우 여친 이지?” 학교에서 진우와 어울리는 걸 본적 있는 남자아이가 불쑥 물었다. “안녕 난 김민준. 둘이 헤어졌어?” 민준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가자.” 진우가 끼어들었다.
“진우야.” 채영이 불렀지만 진우는 계속 민준을 떠밀었다. 민준이 채영을 뒤돌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채영아. 앞으로 인사하자.”

“시끄러워요.” 한창 두드려 맞고 있는데 진우가 문을 두드렸다. 채영은 얼른 바닥을 기어 문을 열었다. 추리닝 바람에 진우가 채영을 내려다 봤다. 고주망태의 아버지는 어기적어기적 현관으로 왔지만 그 전에 채영이 먼저 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오늘 일 안 나갔네.” 엉망으로 더럽혀진 진우의 집을 채영은 습관적으로 치웠다. 진우는 선반을 뒤적거렸다. “언제까지 그럴래. 뭐라도 좀 해.” 겨우 연고와 오래되어 색이 바랜 반창고를 찾았다.
“가만히 있어야 빨리 끝나.”
“그러다 죽어도 모르겠다.”
채영은 얌전히 진우의 앞에 쭈구려 앉았다. 진우는 손가락에 짠 연고를 채영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전에 만났던 네 친구가 나 좋대.”
“…..”
“너 알고 있었어?”
“몰라.”
“걔가 너네랑 같이 놀쟤. 그럴까? 그럼 나도 집에 있는 시간도 줄일 수 있고, 아빠 성질도 덜 돋우고.”
막 채영의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진우가 일어나서 물을 꺼내와 채영에게 건넸다. 채영이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던 진우가 페트병을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채영아. 너는 그냥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하다가, 대학을 가던 취직을 하던 어쨌든 이 동네 떠야지. 너네 아빠랑 평생 살래?”
“그럼 내가 너네 집으로 올까?”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너는 그냥 거기 있어, 이쪽으로 오지마. 난 너 아는 척 안 할게. 너가 김민준이랑 놀던, 내 친구들이랑 놀던 난 너랑 아는 척 안 할거야 이제.”
“왜? 왜 그래야 돼?”
“몰라. 오늘은 자고 가.” 진우가 페트병을 냉장고에 도로 넣어놓고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채영은 그렇게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진우는 채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선언했다. 그래서 민준을 만났다. 채영은 진우가 자신을 너무 순진하거나, 멍청하다고 생각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채영은 그렇게 멍청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았다. 채영은 진우를 상상했고 그래서 진우에게 미안했다. 민준은 관계가 끝나면 꼭 등을 돌리고 담배를 피웠다. 그 또래의 남자아이가 피우는 허세인가. 그렇다면 진우도 그럴까? 어떤 여자를 만나서, 잠을 자고 관계가 끝나면 등을 돌리고 담배를 피울까. 채영은 민준의 등에 손을 올렸다. 끈적하고, 땀이 식어 차가웠다. 불쾌한 느낌이 들어 채영은 다음부터 그냥 담배를 피우기로 했다.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민준은 생각보다 일찍 싫증을 냈다. 채영은 개의치 않았지만 민준은 전교1등을 따먹었다며 소문을 내고 다녔다. 덕분에 채영은 다른 의미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해명할 사람이 없었다. 진우는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침묵했다.

어른들은 채영의 불행을 듣고 싶어 했다. 후원을 위한 심사라곤 했지만 채영이 보기엔 어른들이 그 이야기를 꽤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몇몇 어른들은 눈물을 흘렸고, 세상에서 가장 동정 어린 눈으로 채영을 바라봤다. 채영은 제 불행에 더 살을 붙여 얘기했지만 그것이 결코 저의 가장 아픈 살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채영이 끝내 눈물을 흘렸던 것은, 진우와의 이별을 마음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채영은 누구를 위하는 일인지도 모른 채 제 세계를 떠나기로 했다. 앞으로의 희망보다는 눈 앞에 절망이, 외로움이 더 채영을 발 빠르게 만들었다.
가끔 진우를 마주칠 때마다 진우의 운동화가 낡아가는 것이 꼭 진우의 인생 같다고 생각했다. 진우는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를 추스르지도 못한 채 낡아갔다. 그래서 채영은 떠나기 전에 운동화를 선물했다. 그 운동화도 언젠가는 낡겠지만, 진우가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는 첫걸음이 되기를 바라면서. 다시 돌아오리라고 마음먹지는 않았지만 진우와 다시 만날 것이라는 걸 채영은 알았다. 언덕 위의 그 구린 집을 떠나면서 채영의 세계는 부서졌고, 완전한 삶을 위해 어쨋든 진우를 다시 찾아야 하니까. 떠나기 전 채영은 마지막으로 진우를 보기 위해 쪽지를 남겼지만 진우는 끝끝내 채영을 만나주지 않았다.



ㅡㅡ 

에필로그


직원을 여럿 둘 수도 없는 작은 병원이었다. 여자가 살던 동네는 재개발로 땅값이 치솟았고, 사람의 발길이 뜸하던 그 언덕까지 예쁜 카페거리며 쇼핑거리가 생겨 사람들이 북적댔다. 그러나 여자는 또 다른 그녀의 동네를 찾았다. 그녀가 어렸을 적에는 그래도 학원들이 밀집되어 있던 지역이라 좀 번화했던 동네가 이제는 가난한 노인들만 모여 사는, 누구도 찾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변했다. 어디인지는 결국 중요하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던 연어처럼 어떤 사람도 결국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곳은 노인들과, 알코올중독자들 그리고 불행한 여자들과 아직은 희망을 갖고 있는 어린 학생들이 살았다. 여자는 구질구질한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고, 사실은 자신과 똑같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또한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작은 진료실에 전등이 깜빡였다. 겨우 적자를 면하고 있는 장부를 들여다 보던 여자의 방에 누군가 노크했다. 여자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간호사가 사색이 되어 들어왔다.

“선생님.”
“왜 퇴근 안하고요?”
여자는 간호사의 얼굴을 보고도 그렇게 말했다. 또 누군가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렸거나 나이가 많은 노인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 문을 두드렸는지도 몰랐다. 자주 일어나는 이런 일들에 신입 간호사는 항상 아연실색이었다. 간호사가 뭐라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남자가 슬리퍼를 끌며 들어왔다. “좀 비켜봐요.” 남자는 서있기도 버거운 듯이 문 앞을 딱 가리고 있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여자는 얼른 일어나 동그란 의자를 남자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간호사를 향해 퇴근해도 좋다고 눈짓했다. 간호사는 불안한 기색으로 진료실을 나갔다.
절뚝거리며 진료실을 들어온 남자가 의자에 앉았다. 여자는 간단한 의료품이 있는 트레이를 끌어다 옆에 두고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몸 전체에 피가 흥건했지만 가장 심한 건 얼굴 쪽이었다. 얼굴 한쪽이 완전히 부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남자가 숨을 겨우 내쉬었다. 여자는 상처를 보기 위해 남자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붉은 핏물이 남자의 턱을 따라 흘렀다.

“와.” 여자는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이건 뭐. 사회생활도 못하게 만들어놨네.”
“그러라고 이런 거야.” 남자의 발음이 불분명했다. 광대 바깥쪽에서 입술 밑까지 칼로 그은 상처가 깊었다. 여자는 안에서 터져 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참았다.
“그래도 나는 많이 봐줬지. 칼 맞고 뒈지는 놈들도 많아.”
“자랑이다.”
여자가 소독약을 바르자 남자가 몸을 떨며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되게 아플 거다.” 여자가 무심한 척 말했다. “빚은 진작에 갚았겠구만, 그 정도 밑바닥에서 굴러줬으면 곱게라도 보내주지.” 끝내 불만 섞인 소리가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너무 속상했다.

“나는 이제 돈도 못 벌어.” 남자가 웃으려다가 실패했다. “이 동네 맘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한다. 눈에 띄지 말랬거든.”
“아주 개새끼들이네.”
“그러니까 니가 먹여 살려야겠다. 어쩌냐. 너 이제 인생 조졌다.”
“상관없어. 너 아주 안 오면 내가 그쪽으로 들어가려고 했거든? 나이 마흔쯤에.”
“야. 그거 내 악몽인데. 저 바닥에서 너 보는 거.”
“꿰매야 돼.” 필요한 기구를 챙기려고 일어나는 여자를 남자가 붙잡아 앉혔다. 그리고는 여자의 가슴에 쓰러지듯 안겼다.
“진짜 무서웠는데. 그거. 너도 내 꼴 날까 봐. 그래서 평생 너 보지 말았음 했는데, 또 이렇게 보니 그건 그거대로 쪽 팔리데”
“가운에 피 묻어.”
“미안해.”
“나는 너 사랑해.”

남자는 웃는지, 우는지 조용하게 몸을 떨었다. “보고 싶었어 채영아.” 남자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남자의 어깨를 안았다. 남자의 등은 끈적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따뜻했다. 그래서 여자는 안심했다. 여자의 세계가 비로소 완전해 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의 세계도 마침내 완전해 지기를 바랐다. 여자는 남자를 힘주어 안았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되도록 세게.

 

 

 

 

 

 

예전글 옮겨왔어. 요즘은 글이 영 안써져서 ㅠ 두편을 한편으로 합쳤더니 좀 긴느낌이 있네. 재밌게 봐줘.

  • tory_1 2018.02.11 22:22
    ㅠㅠㅠㅠ너무좋다 이런 분위기ㅠㅠㅠㅠㅠ금손토리 대다네ㅠㅠㅠ
  • tory_2 2018.02.11 22:38
    이거 책으로 내자!!!!ㅠㅠㅠㅠ
  • tory_3 2018.02.11 22:40
    와 너무 좋다 진짜...정독했어ㅠㅠㅠㅠㅠㅠ너무 좋다....
  • tory_4 2018.02.11 23:30
    서사 완벽하시네...박수 치고갑니다 지우지말아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생각날때마다 보러올게ㅠㅠㅠ토리 금손금손!!!
  • tory_5 2018.02.12 00:14
    삭제된 댓글입니다. (삭제일시: 2018/08/27 19:16:32)
  • tory_6 2018.02.12 09:47
    와... 진짜 너무좋다 단편드라마 본거같아... 자주자주와줘 금손톨아ㅠㅠ
  • tory_7 2018.02.12 10:50
    ㅠㅠ 좋다
  • tory_8 2018.02.12 15:11
    헐 냔아 너무 좋아ㅠㅠㅠㅠ 이런 스토리 환장하는데 돈주고 읽어야 할 정도야 진짜 잘읽었어!!
  • tory_9 2018.02.12 16:34
    너무 좋아ㅠㅠㅠㅠㅠㅠ 좋은 글 써줘서 고마워!
  • W 2018.02.14 04:22
    재밌게 읽어서 정말 다행이다 ㅜㅜ 좋은 얘기들 고마워!!
  • tory_11 2018.02.14 15:11
    좋다ㅜㅜㅜㅜㅜ단막극 본 느낌이야
  • tory_12 2018.02.14 23:27
    나도 홀린듯 읽었다!
    재밌었고 참 따뜻하다!
  • tory_13 2018.02.16 12:53
    너무 좋아....돈내고 봐야할것 같아. ㅠㅠ좋은 글 고마워 톨아
  • tory_14 2018.03.01 01:19
    토리들 말처럼 돈 내고 봐야 할것 같으다..
    다음편 어디서 볼수 있죠?? ㅠㅠㅠㅠ
    정말 잘 읽었어!!
  • tory_15 2018.03.04 18:54

    토리 좋은 글 고마워ㅠㅠ 재밌다... 덕분에 잘 읽었어.

  • tory_16 2018.03.08 16:54

    헐 뭐야 홀린듯이 봤네 너무좋다ㅠㅠㅠㅠㅠㅠ

  • tory_17 2018.11.05 16:53

    세상에 존잼이야 ㅠㅠㅠ토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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