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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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의사생활/겨울정원] 정원의 겨울. 下-1










5.
가을.






날이 쌀쌀해졌다. 정원은 출국할 날짜를 가끔 보며 한숨을 얕게 쉬었는데 귀신같은 김준완은 뭔 일 있냐고 물어왔고 가을이라 그런다며 정원은 대충 대답했다. 준완은 의심의 눈초리로 정원을 바라보았고 정원은 논문으로 눈을 돌렸다.






겨울에 대한 감정은 이미 자각했고, 정원은 알고 있었다. 제 감정뿐만 아니라 겨울의 감정도 중요한 것을. 제가 여기서 말한다 했을 때 최선의 상황도 있겠지만, 최악은 겨울과의 관계도, 제 꿈도 잃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정원에겐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쉬이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 가을 날, 정원은 준희와 단 둘이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정원은 ER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끼리 밥 한 끼 먹자했을 뿐인데, 결론은 준희랑만 먹게 되었다. 준희가 희수에게 붙인 포스트잇의 약속시간과 장소는 응급베드에 밀려 쓰레기가 되었고, 준희는 의도치 않게 원하던 정원과의 한 끼가 성사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준희는 알면서도 겨울과 희수에게 정원과 사복입고 식사했다고 자랑했다. 준희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원과 겨울의 미묘한 쌍방의 기류를.





그 날 저녁, 겨울은 정원의 교수실에서 불이 꺼지고 나올 정원을 기다렸다. 정원은 밖에서 겨울이 기다리는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나와서 꽤 놀랬지만 ER로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겨울에게 눈을 맞춰 물었다.





“응급이에요? 가요, 빨리. 가면서 얘기해요.”
“아니요. 교수님. 응급 아니에요.”





응급이 아니란 말에 짧게 안도하던 정원은 겨울의 다음 말에 당황했다.





“저 저녁 사주세요. 이번 주말에 저녁사주세요, 교수님.”
“그래요. 다 같이 회식해요”
“단 둘이요. 단 둘이, 밖에서 이 옷 말고 사복 입고.”





말을 끝마치고 정원을 바라보는 겨울의 눈빛은 뭐랄까,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정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은 다 같이 회식이라는 말로 둘러댔을 때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겨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겨울은 몰랐겠지만 정원에게 그 말은 곤란함과 함께 작은 안도감을 주었다. 겨울도 자신에 대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정원은 목적지를 향한 발걸음을 여전히 내딛으며 겨울의 콜을 무시했다.



“미안해요, 장겨울 선생. 주말에 제가 좀 바쁜데, 양평 가기로 했거든요. 미안합니다.”









정원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엎드려 자신을 자책했다. 누군가에게 상담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라 정원은 애꿎은 소파에 머리를 꽁꽁 박아댔다.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정원은 소파에 한참을 엎드려있었고, 번호키 누르는 소리와 함께 준완이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다 소리를 질렀다.



“깜짝이야!! 불도 안 켜고 왜 이러고 있어? 안정원 아프냐? 열 나?”



정원을 돌려 눕히고 이마를 만져보던 준완이 중얼거렸다. 열은 없는데 이거 마음병 아냐?.....



“나 들어갈게......”




정원은 방으로 들어가 소파에서처럼 엎드려 중얼거렸다. 거짓말은 왜 하니, 멍충아......









그 후 어느 날, 정원은 테라스에 익준을 불러다가 커피 한 잔을 주며 물었다.



“야, 익준아. 내가 누구한테 미안할 말을 했거든? 좀 핑계를 대면서 했단 말야. 미안하다고 말은 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안정원 무슨 말이야. 네가 지금 찔려서 나한테 물어보는 거면 미안한 마음이 계속 있는 거 아냐? 핑계는 왜 대냐? 안드레아, 거짓말은 나빠요~”



정원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으휴, 멍충이도 이런 멍충이가 따로 없다. 미안하면 사과해! 친절왕 안정원, 착한 안정원, 예민한 안정원!”



정원이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내리자 익준은 등을 한 대 팡 치며 말했다.



“나 간다! 말로 사과 못 하겠으면 네 최선의 행동이라도 해, 임마.”





정원은 주말에 결국 익준의 집으로 갔다. 최선의 행동이란 게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익준에게 인간 안정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뭐냐고 물으러 간 거였지만, 결국은 우주랑 노는 시간이 전부가 되었다. 토요일 저녁, 내일 다시 놀러오라는 우주의 부탁에 주말 내내 우주와 놀은 안정원은 무엇하나 결론지은 것 없이 출근했고, 여전히 겨울에 대한 미안함으로 겨울을 피해 PICU에 박혀 있었다.




그 때, 겨울은 익준에게 주말 내내 양평이 아닌 익준의 집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정말로 정원이 겨울에게 마음이 없구나를 겨울은 실감하고 있었다. 겨울은 짝사랑을 접기로 결심했다고 익준에게 말했고, 익준은 정원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게 되었다.










정원은 PICU에 제일 늦게까지 박혀 있다가 퇴근하면서 쓰레기통 밖으로 떨어진 몽쉘 껍질을 보았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면서 정원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볼에 가득 넣고 먹는 겨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보자마자 겨울이 생각난 건 심각한 사랑의 증거인 걸 알면서도 정원은 스치는 생각으로 간주하려다가, 결국은 결심했다.




다음 날, 정원은 24시간 편의점에 새벽부터 들러 과자와 컵라면을 제일 큰 봉투에 양 손 가득 들고 몰래 출근했다. 들킬세라 피부과 진료층에 내려 한 층 계단으로 올라간 정원은 일반외과 의국에 도착했다. 햇살이 비춰오는 덕에 작은 창문으로 본 의국에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정원은 슬쩍 웃으며 의국으로 들어가 간식 창고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몽쉘을 5박스나 넣고 비닐봉지까지 치우며 완전범죄를 꿈꾼 정원이 나가려던 찰나 일반외과 교수님이 들어와 정원은 자연스레 컴퓨터를 켜 논문을 찾아보는 척을 했다.



일부러 의국을 스쳐지나가면서 겨울이 몽쉘을 먹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윤복이 몸쉘 한 박스를 들고 나오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정원 교수님.”
“네에, 안녕하세요. 근데 그 과자는?”
“장겨울 선생님이 몽쉘 많다고 NS 의국 선생님들이랑 나눠먹으라고 주셨어요.”
“맛있게 먹어요~”




정원은 미소를 지으며 내일은 뭘 사다 넣어놓을까 생각하며 PICU로 돌아갔다. 키다리 아저씨가 또 있다는 소문이 일반외과를 비롯해 율제에 돌았고, 일반외과 의국만 채워지는 탓에 이익준 교수에게 감사한 누군가가 채워주는 것이 아니냐는 결론이 난 것을 듣고는 정원은 중얼거렸다. 이익준, 그거 진짜 인기 많네.








PICU에서 아이의 상태가 위급해진 일이 계속 있어서 정원은 얼마간 키다리 아저씨 일을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아이의 상태가 호전되어 드디어 조금이나 쉴 시간이 생긴 정원은 교수실 간이침대에 누웠다. 눕자마자 생각한 것이 일반외과 의국에 간식 떨어졌을 텐데라는 생각이었다. 겨울을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출국날짜는 정해져있고, 무엇 하나 결정 내리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정원을 원망스럽게 했다. 익준의 멍충이라는 말이 자꾸 귓가에 들렸다. 정원은 인정했다. 그래, 나는 멍충이다. 그렇지만 정원의 마음만 복잡해졌지 결론 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겨울이 짝사랑을 접는다고 익준에게 말한 뒤로, 익준은 정원을 만나 겨울에 대해 언급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익준에게 들을 근황들이 전혀 없어진 뒤로 정원은 겨울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가, 퇴근길에 율제 정문에서 겨울을 만나게 되었다. 차마 가까이 가진 못하고 떨어져 서 있던 정원은 민하에게 가을의 초입에 들은 말이 생각났다. ‘장겨울 선생님이 청남방 입는 동안은 가을이에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여전히 인사는 겨울이 먼저였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네요?”
“네, 약속이 있어서요.”




정원은 당연히 민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겨울에게 “추민하 선생님?”이라고 되물었지만 돌아온 건 정원과 겨울의 앞에 세워진 외제차 한 대였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 마디를 남긴 채 겨울은 외제차에 올라탔고, 안에는 정원이 모르는 남자가 타 있었다. 겨울을 태운 차는 갔고, 정원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한 건지, 더 고민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지금 아예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겨울과는 아예 인연이 끊어지는 게 맞는 건지. 정원의 머릿속은 꼬여버린 실타래가 되었다. 잘 감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꼬여 있어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모르는 실타래.



정원의 앞으로 익준과 석형 송화가 탄 차가 와 섰다.



“안녕, 안드레아!”



정원은 그제야 차가 왔음을 알고 보는데, 익준이 말했다.



“천사를 보셨나?”



헛웃음이 나왔다. 천사를 놓친 건가 싶기도 했다.



“뭘 이렇게 멍을 때리고 있어.” “추워, 얼른 타.”



머릿속에선 신부와 의사, 겨울의 실타래가 더 비비 꼬여지고 있지만, 그와 다르게 정원의 마음은 겨울의 대한 실타래가 곱게 감기고 있었다.










퇴근하려는 정원의 앞에 익준이 찾아와 만원과 담배 4개피, 라이터를 털어간 비 내리던 가을밤이 있었다. 익준을 두고 가려는데, 익준이 별안간 “겨울이다”라고 얘기했고 정원은 익준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분명 아까 퇴근하다고 가는 걸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먹다가 봤는데도 익준에 속아 쳐다보고 말았다.



“뭐야”
“뭐긴 뭐야, 뻥이지.”



익준이 너스레를 떨다가 먼저 떠났고, 정원은 퇴근을 위해 정문으로 나갔다. 병원에서 본 적없는 외제차가 들어왔고, 그 차에선 겨울이 내렸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또 첫 인사는 겨울이었다.



“이따 집에서 봐, 안녕!”



차 안 남자는 그 때 그 남자였다. 겨울은 병원으로 다시 들어가고 정원 비를 피해 택시를 탔다. 정원은 테라스에서 스쳐 지나간 이야기가 떠올랐다. 겨울이 계속 다른 외제차를 타고 내리고 그 차의 남자는 겨울의 남자친구라고 광현과 익준이 말하던 것.




이제는 정원이 마라톤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이유가 없었다. 나지막이 울리던 콜이 더 이상 울리지 않게 됐고, 정원은 마라톤에만 집중해도 되는 거였다. 정원이 생각한대로 정원의 꿈을 이루려 출국날짜에 출국하면 되고, 병원장과 로사, 송화, 익준, 준완, 석형에게 말했던 것처럼 의사보다는 신부로 살고 싶다는 말을 지키면 되는 건데 정원은 지금에 와서야, 선택을 하고 싶어졌다. 겨울과 함께 의사로 사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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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먼저 가져왔어 ㅎㅎ
겨울은 또 언제 쓰나 싶당 ㅋㅋㅋㅋㅋㅋㅋ
다들 읽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가 에피소드 덧붙인 게 많아, 이해해줘!)
  • tory_1 2020.06.03 19:55
    헐 헐 ㅜㅜㅜㅠㅠ 너무 좋아
    이거 보니까 정원이 감정선이 다 이해된다 ㅜㅜㅠㅠㅠ
  • W 2020.06.09 17:06

    고마워ㅠㅠ 안정원 감정선을 내 상상력으로 알아야하다니.... 암튼 읽어줘서 고마웡

  • tory_2 2020.06.03 22:19
    허억ㅠㅜㅜㅜㅜㅜ좋다ㅜㅠㅜㅠㅠ
  • W 2020.06.09 17:06

    눈물 갯수의 오조오억배 고마워ㅠㅠ 나만 목마른 거 아니지 겨울정원에ㅠㅠㅠ

  • tory_3 2020.06.03 22:33
    재밌게 보고있어 속이 시원해 ㅋㅋ
  • W 2020.06.09 17:06

    의도치않게 3톨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었구나 ㅋㅋㅋㅋ읽어줘서 고마워!!

  • tory_4 2020.06.05 17:33
    하 웬일이야ㅜㅜㅜㅜ 정원이 진짜 이랬을거같다ㅜㅜㅜ 겨울끝나면 그 후도 써주면 안되겠니.... 7개월 어떻게 버티죠...?
  • W 2020.06.09 17:07

    겨울 이후도 노력해볼게 봄에 함 데이트 해야하지 않겠워 ㅠㅠㅠㅋㅋㅋㅋㅋ

  • tory_6 2020.06.20 00:11
    읽다보니 왜 맘이 아프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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