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솔아

 

밤새 화장실에 있을 수는 없기에 조금 진정이 된 솔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정신을 차리긴 한 것인지 달려들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지호는 그저 지척에서 연고만 만지작거리며 솔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호를 비낀 솔이 그 사이 말끔하게 정리 된 소파에 앉아 제 앞을 툭툭 쳤다.

 

커피 테이블 위 물티슈로 제 손을 닦은 지호가 솔의 손등에 연고를 얇게 바르곤 잘 스며들 수 있도록 입 바람을 불어주었다. 제 손에 묻은 연고를 물티슈에 닦고, 연고 뚜껑을 닫는 지호를 구경하던 솔이 물었다.

 

내가 잘 못 한 거야?”

?”

내가 인혁이 형이랑 만나는 게 잘 못 된 거야?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정도로?”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솔아.”

 

지호가 손을 내젓는다. 그럼 아까 왜 그랬는지 설명해보라는 듯 솔이 지호를 빤히 바라보았고, 지호는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그냥, 내가 속이 좁아서

?”

 

**

 

이세린!!’

 

솔이 그렇게 말렸다고 세린을 찾아가지 않을 지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밍 나쁘게도 세린을 만난 것은 모든 테스트가 끝났을 뿐만 아니라 결과 보고가 소화에게까지 올라간 이후였다. 그래서 그런지 지호를 마주한 세린은 굉장히 지쳐보였고, 조금 짜증나보였다.

 

나 귀 안 먹었어. 소리 지르지 마.’

뭐야, 너 몰골이 왜 그래.’

내 몰골이 뭐. 안 그래도 잘 왔다. 부르려고 했는데.’

 

세린을 보자마자 따지려 했던 지호였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얌전히 의자에 앉았고, 세린은 들고 온 태블릿을 지호에게 건넸다. ‘, 뭔데이게 뭐야, 시발.’ 대수롭지 않게 태블릿을 받아 든 지호는 솔과 인혁의 매칭률에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는다.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세린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휘적거렸고, 지호는 태블릿 화면을 옆으로 넘겼다.

 

이게 맞아? 측정기 고장 아냐?’

솔이 능력 장난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 너하고도 78%가 나왔어.’


믿을 수 없다는 듯 태블릿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넘겨보았지만 하나 달라지지 않은 수치에 지호는 세린처럼 조금 피곤하고 많이 짜증난 표정을 지었다.

 

참고로 이거 부소장님한테 보고 들어갔다.’

?!’

 

지호가 펄쩍 뛴다. 어린 연준이라도 소화가 제 소속 인혁에게 솔을 매칭 시키고 싶어 할 거라는 걸 알 것이다. 자신의 살기에 알아서 숫자가 바뀌기라도 바라는 것인지 말없이 태블릿만 노려보는 지호에게 세린이 조언을 해주었다.

 

솔이랑 매칭 되고 싶으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

하루라도 빨리 두 사람 매칭률 기준 이상으로 높이던가, 아니면 솔이 완고하게 너랑만 매칭 되고 싶어 하게 만들던가.’

 

전자보단 후자가 더 쉬워 보인다. 이미 솔은 자신에게 센티넬은 지호밖에 없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했으니. 하지만 부쩍 인혁과 친하게 지내는 솔의 모습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

 

그래서, 나랑 인혁이 형이 친하게 지내는 거에 불안해했다고? 내가 인혁이 형이랑 매칭 될까 봐?”

 

어이없어 하는 솔의 질문에, 고개를 푹 숙인 지호의 정수리가 살짝 위아래로 움직인다. 어떤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빨개진 귀를 보니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 알겠다. 솔이 지호의 양 볼을 쥐곤 얼굴을 들어 올렸지만 지호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솔이 애써 터지려는 웃음을 참는다. 그동안 연구소에서 지내면서 지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들었다. 센티넬들이 입을 모아 센티넬들에게는 물론, 자신의 가이드에게조차 무례했다던 지호가 자신을 만난 이후로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했다. 뭐 지금은 너무 부드러워서 녹아버릴 정도지만.

 

미안해.”

뭐가?”

그냥내 감정 하나 조절 못해서 솔이 너 다치게 했잖아.”

……

다신 안 그럴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미워하지 말라는 지호의 말에 홍콩에서 보았던 울먹임이 겹쳐 - 울컥한 솔이 지호를 와락 껴안았다. 모르겠다. 인혁의 말대로 지호가 비 접촉 안정화 때문에 자신을 원하는 것이라도, 솔은 그냥 윤지호가 좋았다.

 

**

 

윤지호 센티넬은 한가한가봐?”

, 좀 한가합니다.”

 

비 접촉 안정화 훈련 날. 솔을 데려다 주던 지호가 소화를 마주쳤다. 다분히 비꼼이 가득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은 지호가 소화를 위해 문까지 열어주었다. 소화가 솔에게 같이 들어가자고 했지만 솔은 먼저 들어가시라며 소화의 권유를 거절한다.

 

그럼 차인혁 연구원 도착하면 같이 들어와요.”


솔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인 소화였지만 훈련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싸늘해진다. 분명 그 날 인혁이 솔을 만났다고 보고 받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솔을 불렀던 그 때보다 더 가까운 두 사람의 모습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 했어?”

 

솔이 개구지게 웃어 보이자 지호가 입술을 삐쭉거린다. “또 불안하면 말해, 알았지?” 솔의 말에 지호가 질색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웅얼거린다. “솔 군, 지호 님.” 하지만 뒤쪽에서 들리는 - 불안의 원인이 건네는 천진한 인사에 지호가 인상을 찌푸려 결국 웃고 마는 솔이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솔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인혁이 궁금해 하자 솔이 지호를 바라보며 오늘따라 지호가 잘 생겨보여서 웃었다고 대답한다.

 

하긴 지호님 외모가 출중하시기는 하죠.”

그만 놀려, 한 솔.”

하하핫!”

인혁이도 왔으니까 들어가 봐.”

저요?”

, 부소장님께서 형 오면 같이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벌써 오셨어요?”

 

소화가 벌써 도착했다는 말에 인혁이 조금 다급해진다. 이만 들어가 보라며 지호가 솔의 손을 놓았고 솔이 지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

 

이번 훈련의 목적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추정되는 안정화를 한 솔 가이드가 조절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쎄요?

 

연구원답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애초부터 안정화는 가이드의 능력이라 연구소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보조적 도움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설명이 끝나자 옆방에서 센티넬 세 명이 들어왔다. 인혁과 함께 매칭률 테스트를 했던 - 오며가며 안면을 익힌 센티넬들이었다. 솔이 설명을 듣는 동안 제타파를 높이고 온 것인지 솔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두의 숨이 조금 벅찼다. 인혁이 솔에게 측정기를 장착해주었고, 세 명 중 솔과의 매칭률이 가장 낮은 센티넬 - 재하가 솔의 앞에 앉았다. 인혁은 솔에게 평소처럼 접촉 안정화를 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솔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한 솔 가이드. 안정화는 가이드의 심리적 상태에 영향을 받습니다.”

, 죄송합니다.”

저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구요. 그냥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였어요.”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내민 소화가 싱긋, 웃어보이곤 다시 세 대의 모니터를 번갈아 바라본다. 분명 나긋한 말투인데도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조금 주눅이 든 솔을 북돋아준 인혁이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보고한다. 시작하자는 의미인 것인지 소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솔이 재하의 등에 손을 대며 눈을 감았다.

 

-

 

고생했어, 솔아.”

뭐야. 언제 와 있었어?”

방금 왔는데 타이밍이 좋았네.”

 

분명 거짓일 지호의 말이지만 그래도 고되고 외로웠던 훈련이 끝나자마자 지호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 지호님 오셨습니까?” 정리를 마친 인혁이 훈련실에서 나오면서 지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 솔이 데리러 왔어. 고생 많았다.”

 

훈련 시작 전보다는 덜 퉁퉁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티가 나는 지호의 목소리. 솔은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지호의 손을 잡고 끌었다.

 

제가 무슨 고생은요. 솔 군이 고생이 많았죠.”

아니에요. ,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볼께요.”

. 쉬세요, 두 분.”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두 사람을 배려하는 것인지 인혁이 무언갈 확인하는 척 그 자리에 멈춰 서있다. 저렇게 친절하고 배려 깊은 인혁인데, 지호가 인혁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솔의 결론은 결국 자신이 더 노력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어땠어?”

신기했어.”


참치마요와 제육볶음이 붙어있는 삼각 김밥을 바구니에 넣으며 솔이 대답한다. 정말 오늘 훈련의 소감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신기하다라는 말밖에 없었다. 지호를 포함해 다른 센티넬들을 안정화는 넓은 호수와 자신, 그리고 자신이 잠재워야 하는 파도 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파도 외에도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이 있었다.

 

안정화 하는 센티넬 제타파였을 수도 있지 않아?”

 

단무지와 볶음 김치 사이에서 고민하던 솔 뒤에서 지호가 두 가지 모두를 집으며 묻자 솔이 고개를 젓는다. 느낌이 달랐다. 호수는 분명 재하라는 센티넬의 것이었지만 물방울들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그 물방울들은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잠재우려고 할 때마다 다른 방향에서 튀어 올라 안정화하기가 너무 까다로웠다.

 

신기하네

그치? 나도 처음 느껴봤어.”

그래서, 여러 명을 안정화하느라 이렇게 배고파 진거야?”

 

삼각 김밥 외에도 핫바와 작은 컵라면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계산대에 올려놓으며 놀리자, 솔이 멋쩍게 웃었다.

 

으아- 배불러!”

어어, 바로 눕지 마. 체해.”

 

뒷정리를 하던 지호가 침대에서 베개를 들고 와 솔의 등 뒤에 받쳐준다. 적당한 각도로 기대앉은 솔이 지호를 불렀다.

 

윤지호.”

.”

수아는 민현우 센티넬이 베이킹을 할 때 집중하는 입이 귀여워서 좋대.”

?”

그리고 희수님은 연준이가 밥을 복스럽게 먹어서 사랑스럽대.”

?”

 

삼각 김밥 비닐을 한 손에 든 채 지호가 뒤를 돌아본다.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한 지호의 시선에 솔이 본론으로 들어간다.

 

넌 내가 왜 좋아?”

갑자기?”

. 갑자기. 나 왜 좋아해?”

 

요 며칠 - 정말 두통이 일 정도로 지호와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자신이 지호에게 끌린 이유는 매일 같이 제게 건네는 인사 때문이었고, 지호의 가이드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은 지호가 알게 해준 감정 - 올곧은 안정화가 주는 기쁨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제게 짓는 미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그 모든 것이 좋다. 솔 자신도 이렇게 사소한 이유로 지호를 애중하게 되었는데, 지호가 안정화 때문에 자신을 좋아하는 것에 불안해 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애중하는 데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데.

 

지호에게선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 끔뻑끔뻑. 솔이 서서히 감기는 눈을 애써 깜빡이며 지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정리를 마친 지호가 솔 옆 바닥에 앉아 솔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가뜩이나 배가 불러 반쯤 졸고 있는 솔인데, 따뜻하고 다정한 지호의 손길이 더해지니 거의 가수면 상태에 빠진다.

 

솔이 넌.”

……으응.”

내가 처음으로 느낀 <고요>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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