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수 표기는 합본판 기준. 감상은 맨 밑에!
1. 정책의 우선순위, pp.153~154
―이 교수님, 대한민국에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만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그것만이 심각하고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문제인가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예술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녹록한 부분이 있는 줄 아세요?
머릿속이 서늘했다. 허 위원의 말은 사실을 짚었을 뿐 비난도 질책도 아니었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진행해나가는 일들은 수없이 많고 중증외상 문제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물음과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허 위원은 차분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필요성을 알린다고 해도 국가 정책이 움직일 수 있는 파이는 정해져 있어요. 그게 현실이고 사실이죠. 민주 국가에서 정책을 집행할 때 다양한 안건이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일들이 발생하고요. 시급했던 정책들이 미뤄지다 폐기되기도 하고, 대규모 국책사업이 예산 낭비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옳은 방향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른걸요.
2. 남과 여, pp.170~171 / p.176
이런 아귀 같은 상황이 끝없이 꼬리를 물었다. 연인이 연인을 칼로 찔렀고 부모가 자식을 밟아댔다. 자식의 주먹질에 부모가 쓰러졌고 손자의 발길질에 노인이 의식을 잃었다.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작은 대부분 경미했다. 밀어젖히다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고 그것이 심각한 구타로 이어졌다. 폭력은 그렇게 깊어지며 번져나갔다. 밖에서 일어나는 주먹다짐과 칼부림이 집 안에서도 빈번했으나 피해자들은 대개 침묵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상대를 벌하지 않았고, 생계가 상대에 달려 있어 벌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로부터 듣는 사고 경위는 대략 이러했다. 지나가던 남자가, 처음 만난 남자가, 연인이나 남편이 술을 마시고 때리고, 제정신으로 칼로 찔렀다. 여자를 잡아 던지고 가구를 들어 여자에게 던졌다. 가구 모서리는 여자의 약한 몸을 짓이기고 들어가 내부 장기를 찍어내며 터뜨렸다. 그럴 때 오로지 제일 질긴 신체 조직인 피부만이 온전히 붙어 있다. 폭력의 강도는 점차 세졌으나, 서서히 끓어가는 물 온도에 익숙해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 개구리처럼 여자들은 앞으로 더 맞고 살이 썰려 나갈 것을 알지 못했다.
3. 밥벌이의 이유, pp.428~429
―밥 벌어먹고 살게 되었으면 돈 욕심은 더 내지 마라.
어머니는 의사가 된 내게 자주 말씀하셨다. 밥이라고 해서 다 같은 밥은 아닐 것이므로, 어리석은 나는 밥을 벌어먹고 사는 것과 욕심내어 더 벌어먹으려는 것의 경계를 알기 어려웠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얼마만큼이면 충분합니까?
―시장기를 스스로 없앨 정도면 된다.
어머니의 답은 어머니처럼 곧았다. 살아오면서 나는 있어야 할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고, 분수에 넘치는 끼니를 원한 적이 없다. 빈 그릇에 채워지는 것을 채워지는 대로 먹었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밥을 벌어먹는 것만으로 허덕였다. 어쩌면 나의 허기는 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끼니를 채워도 가시지 않는지도 몰랐다.
4. 서한(書翰), p.536
언론에서는 대원들이 ‘자원’해서 수색에 나섰다고 했다.
자원이라. 참으로 그럴듯한 말이다. 나는 그 말의 출처가 궁금했다. 그 단어를 곱씹으며 조직 구성원으로서 자원의 의미를 더듬었다. 윗선으로부터 내려오는 위험한 업무 투입 명령은 조직 안에서 때로 자원의 탈을 썼고,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조차 강요하는 것이었다. 제 몸에 폭탄을 달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일이 전쟁터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죽은 다섯 명의 대원들이 진정 자원해 나선 비행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추락 원인은 며칠이 지나도록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토리가 쓴 글에 있는 내용도 좋았는데 중복이라 뺐어. (토정에 골든아워로 검색하면 나옴)
이하는 사족.
1) 서문에서 김훈 작가 『칼의 노래』를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았고, 책을 쓰면서 작가에게 조언도 받았다고 해.
그런데 나톨이 가장 읽기 힘들어하는 문학 스타일이 바로 김훈! 김훈 작가 영향 많이 받은 문장은 솔직히 읽기 괴로웠다!!
이만 줄일게.
2) 뒷날개에 적힌, 이름 있는 등장인물만 200명이 넘어.
사람을 묘사할 때 성별을 암시하거나 그로 인한 편견을 드러내는 묘사가 거의 없어서 좋았음.
3) 시종일관 우울하고 부정적인 내용이라 안 맞는 톨은 패스하기 바람.
2부 들어가서는 자기혐오적인 표현이 심해져서 읽기 버거웠어.
교수님 인터뷰 같은거 보면 굉장히 냉소적이고 자기혐오적인 부분이 언뜻언뜻 보였는데 책에서도 그런 부분이 많나보네. 대단한 분이지만 어떤의미론 너무 안타까운 분이야ㅠㅠ